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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능동적 상상력과 구도자의 삶/이향아 시집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이향아 시집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2010 『문학과창작』 봄호

능동적 상상력과 구도자의 삶

황경순(시인)


이향아 시인의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를 세 번 읽고 나니 마음이 잔잔해진다.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에 비친 반영처럼 나의 자화상이 보이는 듯했다.

시인은 사물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다양성을 읽는 투시안을 가지고 있다. 물 한 모금, 이슬 한 방울에서도 근원을 읽어낸다. 바슐라르의 ‘능동적 상상력’이 발동하여 물질의 변화를 통하여 미래지향적 새로운 창조를 해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냥 사물로 보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관계임을 인식시킨다. 시인에게 모든 것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고, 화학방정식처럼 명확한 관계를 맺는다.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관계는 물수제비처럼,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더욱 나아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영역까지 분해되고 확산되어 새로운 우주를 창조한다. 또한 시인은 끊임없는 자아성찰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물의 미세한 관찰을 통하여 나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거기에서 반대되는 측면을 항상 배려할 줄 안다. 고향과 어머니, 소외된 것들, 사라지는 것들을 끌어와 더욱 근원을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기도록 한다. 상대방을 반성하게 하면서, 스스로도 반성하고 몸소 실천하는 삶의 면면이 보인다. 그런 시각은 결과적으로 종교적인 구도자의 자세로 귀결되어 더욱 수준 높은 사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끄는 힘을 발휘한다.


1.투시안으로 바라본 유기체들의 관계와 대순환의 섭리


아침마다 눈을 뜨면 냉수 한 컵을 마신다/ 목 줄기를 훑어 내리는 이슬과 구름 폭포와 강물/ 물길 따라 나도 산천을 순례한다/ 넘치는 구정물과 허섭스레기 쫓겨나는 것들의 뒤를 따라서/ 한 오백 년 엎드려 기다릴거나/ 그러다가 무지개로 떠오를거나/ 아침마다 은혜의 이슬을 마시며/ 무엇이 되어 돌아올까 허튼 꿈에 잠긴다

―「냉수를 마시며」 부분


냉수 한 컵을 마시면서 시인은 물의 공간이동을 통해 물리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산삼뿌리를 적시고 기암절벽을 뛰어넘은 물, 냉장고까지 오기까지의 물의 기나긴 여정을 언급하며 근원을 모색하고, 곧 내 몸의 보약으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폐수를 몰아내도록 설정한다. 짧은 영광을 안고 다시 이슬이 되고 무지개가 되는 물, 그 물의 근원을 쫓아 시인은 내면의 성찰을 통한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 대단한 비약인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시 한 수에 이렇게 많은 우주의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또한 시작은 바로 끝이며, 끝은 다시 시작이라는 의식이 다른 모든 사물과 관련되어 깊이 있는 철학의 세계가 엿보인다.


2.현실 비판을 통한 자아성찰과 겸손의 세계


시인은 먹이사슬처럼 얽힌 사물들의 고리와 고리 속에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낸다. 냉수 한 잔 속에서 은혜의 이슬을 발견하고, 삶의 기쁨인 무지개를 발견해 낸다. 또한 먼지 속에서도 오래된 눈물을 통한 자신의 발전을 위한 정진하는 자아성찰의 세계가 보인다. 또한 시인은 조용히 현실을 비판하는 시들을 통해서 더욱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채찍질을 한다.


그 쪽에서 삿대질을 하면서 눈을 부라리니까/ 내가 죄인임에 틀림없는가 보다/ 나는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서슬 퍼렇게 몰아세울 때마다 구석에 쫓겨/ 이제는 벼랑 끝에 외발로 서야 한다

―「물구나무서서」 부분


「물구나무서서」에서는, 살다 보면 작은 일에도 잘잘못을 따지며 큰소리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무조건 기선을 잡아라”, “고분고분하다가는 상대방의 밥이니라” 는 것을 금언처럼 여기고, 무조건 큰소리부터 치고 본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다 겨우 분이 풀렸는지 돌아서는/ 그 사람이 고마운,/ 그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햇살이 마구 쏟아지는, 저 쾡한 하늘”이라고 마무리 하며 금언을 지킨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적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외발로 서서 그 말들을 들어주는,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이 풀려서 돌아서는 것을 보며 애처롭게 생각한다. 한바탕 자신을 향해 난리를 피우고 돌아서는, 그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표현한 시인의 그 마음, 쓸쓸하면서도 겸손한 구도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례로 문을 잠그고」에서는 서로 편을 가르며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을 꼬집고 있으며, 「반상회」를 통해서는 서로 모른 체하고 살다가 아파트 값을 담합하기 위하여 아파트 이름을 ‘~빌, ~ 리움’ 등 각국의 말을 섞어서 제값을 받자는 것에 대해, 세상의 그 약삭빠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면서 쓸쓸해하고 있다. 몇 년 전 우리 아파트도(나는 반상회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지만) 어느 날 아파트 이름에 긴 꼬리표처럼 ‘休플러스’란 말을 달고 버티고 선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실에서 겪게 되는 생활의 모든 일들이 시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 반성되고, 겸손함으로 거듭난다.

물봉이라도 무방한 일, 흰 깃발 두 팔에 펄럭이면서/ 아무데서나 나를 봉헌할 것인즉/ 세상은 비로소 나를 부르리/ 밤낮으로 나를 찾아 부리리/ 내 생애 소원하던 그대로 나는 넉넉하고 따뜻할 것이다/ 물불을 가려 편을 가를 때 나를 물이라 하니 천만 번 다행이다

―「맹물」 부분


그 앞에서 무릎을 꺾은 것은 내가 겨우 들꽃이었기 때문이다/ 빈 벌의 바람에 산발한 머리카락 쓰다듬는 갈퀴손/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장미보다 은은한 들꽃이 좋아’/ 나는 물론 믿지 않았다 // 콧대를 흔들며 얼굴을 젖힌 것은 내가 이젠 장미이기 때문이다/ 뽑히었음을, 뽑혀서 세워졌음을 금빛 종 흔들어 일으키고 싶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장미도 지네요, 목숨의 끝은 삭막하군요’/ 나는 물론 기죽지 않았다 // 하늘을 찌르던 어제가 그리울 때,/ 이 무슨 밀물 같은 노여움인가/ 들꽃이거나 장미거나 서 있음으로 끝이 아님을/ 장미의 자존심으로/ 들꽃의 고집으로/ 그들의 뒤뜰은 따로 남아 있음을/ 목숨 바쳐 피어나기 위하여/ 아니, 찬란하게 지기 위하여/ 빈손으로 엎드려야 하거늘/ 눈물로 발돋움해야 하거늘

―「장미와 들꽃」 전문


자신이 정말 맹물인 사람이 어찌 자기 자신을 알겠는가? 시의 전개방식 또한 대조를 이루며 독특하다. 시의 시작이 “나를 물로 보는 사람이 있어 천만다행이다”라는 표현처럼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다. 물로 보는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역시, 물을 근원으로 여기는 시인의 폭넓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물로 보여야 세상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대우주의 순환으로까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조금 모자란 듯 살아가지만, 의식은 늘 충만해 있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들꽃으로 자신을 표현했지만, 또 한편으론 “은은한 들꽃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아부에 결코 놀아나지 않는다. 나중에는 다시 장미가 되었지만, “장미도 지네요. 목숨의 끝은 삭막하네요”라는 말에도 또한 기죽지 않는다. 모두가 소중하다는 생명존중의 의식, 사물의 일면만 바라보기 쉬운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는 삶의 지혜가 녹아 있다.


3.하찮은 것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구도자의 삶


이런 자아성찰은 결국 구도자의 자세로 거듭나는 삶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자아성찰을 해도 실천이 없는 삶이란 그리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시인은 고향과 어머니, 하찮게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통해 인간 본연의 삶에 가장 근본이 된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그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정말이라고, 이것 보라고 버선목 뒤집듯이/ 창자를 뒤집어 난장에 펼칠 수 있다면/ 두 눈을 감고 혀를 깨물지 않아도 되련만/ 땀도 말라 소금만 서걱거리고 초침이 빠르게 달려/ 가슴이 방망이질 할 때/진액이 밭아서 아득해지고/ 결국은 목숨밖에 바칠 것이 없을 때/ 나무들은 벼랑 끝에 두 팔을 쳐들었다/ 넓은 천지 한복판에 벌을 서듯이/ 비상처럼 품고 살던 뼈아픈 말씀/ 이제는 이밖에 드릴 것이 없음/ 가을 나뭇잎은 혀를 깨물고/ 저마다 한 슬픔 피를 삼킨다

―「나뭇잎은 혀를 깨물고」 전문


올 봄에도 선암사엔 영산홍이 맑아서/ 살빛 들이비칠 듯한 그림자 흔들리고/ ‘이백 년도 넘었습니다’/ 백년을 두 번이나 한 자리에 서 있기/ 비바람 안개로 희망을 씻어내기/ 세상과 더러는 작별한 후에/작별한 그 자리는 무념으로 채워서/ 해마다 다르게 피를 걸러낸/ 걸러낸 그 피가 이슬처럼 내린/ 영산홍 곁에 서서 물들다가 왔다

―「걸러내는 중」 부분


가을에 나무들이 벼랑 끝에 두 팔을 쳐들고 벌을 서고 있다. 진실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으니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으로 가을 나뭇잎이 혀를 깨물고 피를 삼킨다”는 표현이 참 비장하다. 봄에도 선암사 영산홍은 맑은 피를 걸러내어 맑은 이슬로 피어나 수정처럼 찬물로 흐르고 있다. 이백 년 되었다는 영산홍 곁에 혼은 그냥 남겨두고 껍질만 올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야 하므로 막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걸러지고, 피를 토하는 꽃과 나무의 결연한 의지는 구도자의 눈이 아니고서는 그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무엇이든 버리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싶은 마음이 시집 제목인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모든 “여러 가지가 함께 좋을 때/ 그러나 꼭 하나만 골라야한다고 할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나 끝끝내 너 하나를 버리지 않아/ 이제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다”라는 시인의 삶의 방식은 한편으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불쌍히 여겨 버리고 싶지 않은 성찰의 삶이 엿보인다.

시인 자신이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시인은 등단이래,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권의 시집 상재 후, 이 시집이 열일곱 번째 시집인 것이다. 그 가운데 신앙시집 두 권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문집, 그리고 학술서적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지난 시집 『흐름』의 논조를 좀더 깊이 있게 설명한 듯, 이번 시집에서는 구도자의 자세를 더욱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시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해내려는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시인에게는 시가 바로 종교이기도 하고, 종교가 시이기도 한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사물을 투시하는 눈으로 자아성찰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은, 실로 대단한 구도자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