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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고경숙 시 '혈(穴)을 짚다'

혈(穴)을 짚다 

 

                  고 경 숙

 

아프다, 까마득하게 먼 기억이

강처럼 흐르는 곳 어딘가를 누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벌판 한복판

말안장에 얹혀진 돌덩이 하나

늘어진 신경 끝으로

죽은 장미의 검붉은 체액이

길을 내고 있다

 

전생의 마지막 귀가다

푸른 늑대의 유령이 달 없는 밤에만 나타나

여자의 붉은 살을 뜯는다는

계곡을 지나며

살아 숨쉰다는 안도에

호흡이 불규칙해지면,

별은 무리지어 이마에 박히고

접신하는 주술사처럼

동물의 이빨을 목에 건 모래바람이

삽시간에 눈과 귀와 입을 막는다

 

아프다, 관자놀이 가까이 머물며

비속한 쾌감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강언덕에 화살을 날리는

전생에 관해

유감스럽다거나 '제발'이라는

단순함 외에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것은

펄떡이던 강물이 메마르며

뜨거운 공기가 헉!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다, 아프다

네가 짚고 간 길을 따라

아무리 짚어도

계속 허청대는

지상에서의 삶.  

 

 -계간 <시산맥> 2012 여름호- 

 

‘혈(穴)을 짚다’를 읽으면 아픈 기억이 생생해진다.

누구나 지독하게 아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던 날이 떠오른다. 지독한 열병, 통증이 심해지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자기도 모르게 들어간다.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고 프로스트의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든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기도 하고, 사막의 모래바람 속을 헤매기도 한다. 푸른 늑대의 유령이 달 없는 밤에 나타나 여자의 붉은 살을 뜯는다는 계곡을 지나기도 한다. 비속한 쾌감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강 언덕에 화살을 날리는 전생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강처럼 흐르는 곳 어딘가를 누르면’ 그 막혔던 혈(血)이 뻥 뚫린다. 혈(穴)을 짚기만 하면 의식의 흐름은 늘어진 신경 끝으로 죽은 장미의 검붉은 체액이 길을 내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식물의 생명의 통로가 뚫린 것이다.

침이며 뜸, 부황이 생각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인체의 혈을 뚫어 동물적인 아픔과 기(氣)의 흐름이 자연적이기도 하고 인위적이기도 하다. 사실 아플 때 주로 열이 나고 비몽사몽간을 헤매기 일쑤이지만, 시인은 혈(穴)을 짚은 후, 한 줄기 길이 난 곳을 따라 오히려 기나긴 여행을 한다. 기가 뚫렸지만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별이 이마에 박히기도 하며 오히려 눈과 귀와 입이 막히기도 한다. 이 혼돈의 시기, 어쩌면 삶의 해답을 찾았을 수도 있건만, 모든 것이 해소되지 않고 혼란이 공존하는 것이 아이러니컬하면서도 특별나다.

그 다음엔, 지구의 어느 지점이 떠오른다. 지팡이 하나로 선조들이 찾아내던 산 좋고 물 좋은 명당자리 하나, 혹은 사하라 사막을 휘돌던 바람이 어느 한 지점에 몰려든 구멍(穴)일 수도 있다. 역시 강처럼 흐르던 지구의 어혈들이 땅 속으로 흐르다 분출한 화산의 분화구일 수도 있고, 작게는 뜨거운 물이 펑펑 솟아나는 온천일 수도 있다.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 매우 생동감 있는 구체적인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지점이 화학작용을 만나 4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지독한 아픔과 혼란이 물리적인 장소와 또 만난다. ‘아프다, 아프다 네가 짚고 간 길을 따라 아무리 짚어도 계속 허청대는 지상에서의 삶’ 이라 했으니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모든 현실은 지상에 머문다. 아무리 아파도, 미련이 없는 척 해도 결국은 삶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전생에서의 기억조차 유감스럽다거나 ‘제발’이라는 단순함 외에 아무 생각도 안 들고 헐떡이던 강물이 메마르며 뜨거운 공기가 길을 막고 있다고 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혈을 짚기 위해 아둥바둥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진리 앞에 시인은 이것을 강조하고 싶은 게 아닐까? 모든 것이 돌고 돈다. 시간과 공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혈을 짚으면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시공을 초월한 넘나듦의 매력에 빠졌다. ‘혈(穴)을 짚다’는 것은 더욱 더 많은 방향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소통이 중요시되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더더욱!

 

추천인 황경순 2006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