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한국시문학상 수상작/휘발성 외/이상호
2008 한국시문학상 수상작
휘발성 외
이상호
1
중국 여행길에 즁국명주라는 술 한 병을 사왔다. 혼자 마시
기 아까워 아끼고 아끼다가 어느 날 드디어 개봉하려는데 술
병이 너무 가볍다. 귀에 가까이 대고 살살 흔들어보자 거의
빈 병이라는 느낌. 이리저리 병을 돌려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보일 듯 말 듯 실금이 갔다. 남은 술을 따르니 겨우 작은 잔
하나도 다 못 채운다. 그동안 실금 사이로 살금살금 알코올이
달아났던 것이다.
2
자궁을 빠져나오느라 내 몸에도 실금이 생겼는지
실금 사이로 조금씩 증발하는 알코올처럼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목숨
휘발성이 너무 강해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미리 따라볼 수도 없고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궁금한
-'시인세계' 2008 여름호-
마른장마
장마라는데 비는 오지 않고
햇볕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오후
고지의 뿌리가 얕은 풀들은
벌써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엔 나도 자꾸 몰이 말라
찬란한 불빛이 홍수 진 거리를 지나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서
어제처럼 침침한 또 하루를 돌아본다.
아무리 뒤져보아야 쓸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수한 나, 그래도 곱게 화장을 하고
내가 가서 닿을 수 있는 하늘꼭지
어디쯤일까 궁금하여 이리저리 뒤척일 때
내 마음 속으로
불타
불타
불타
모든 것 불타고 사라져야
바람이 되고 돌이 된다고
난타처럼 쏟아지는
당신의 말씀.
-'문학과 창작' 2008 가을호-
이상호(李尙鎬)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동국대 대학원 졸. 문학박사.
―82년 『심상』 등단.
―시집 『금환식』 『시간의 자궁속』 『웅덩이를 파다』 『아니에요, 아버지』 등.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1988) 수상.
-편운문학상 본상(2001)
―현재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장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주간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학술정보관장,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출처 : 다음 카페<http://cafe.daum.net.munhakac>의 문학아카데미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