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쇼생쇼사

시인 황경순 2007. 12. 25. 18:57

'폼생폼사'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남자는 폼에 살고 폼에 죽고, 거기에서 파생된 말이 여자는 '쇼생쇼사', 쇼핑에 살고 쇼핑에 죽는다는 말이 덩달아 돌았었다. 더불어 끽생끽사 애연가, 술생술사 애주가....그런 말을 무수히 만들어 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1

내 주변에도 '쇼생쇼사' 파 언니가 한 분 있다.

나와는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틈만 나면 백화점으로 직행, 특히 옷에 대한 쇼핑 열정이 대단하다. 본인과 가족의 옷만 쇼핑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 친구들의 옷도 쇼핑을 한다.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가 "이거 너 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갖고 와 봤어. 입어 보고 맘에 들면 사. 무쟈게 싸게 팔아서 아까워서...." 이렇게 보따리보따리싸들고 와서

입어 보라고 난리다. 5천원짜리 머플러, 만원짜리 스카프, 앙증맞은 몇 만원짜리 가방까지....고르는 눈도 안목이 높아서 세일 물건이라도 천도 좋고 디자인도 좋은 것으로 잘도 골라 오신다. 주변에서 그 언니가 골라온 물건 하나씩 안 지닌 사람이 없으리라. 누가 시켜서 하면 절대로 못할 일이지만, 본인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니...

그 중에 나도 몇 개 건진 게 있다. 늘 바쁘게 살아서 쇼핑 갈 시간이 부족한 나를 또 엄청 챙기시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한 후배를데리고 가서 세일할 때 코트를 하나 사 입혀 왔는데, 그 옷이 내 맘에 엄청 들었다. 내가 입어 보았더니 그 후배보다 솔직히 내가 더 잘 어울린다고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내게 어울릴 것 같았는데 너무 고가라서 사오지는 못했다면서 안타까워하시는데, 마침 나도 그런 코트를 하나 사려던 참이라, 오늘 나가면 당장 사 오시라고 했다. 갈 것도 없이 전화를 하신다. 그거 옷 남은 거 있어? 당장 빼 놓겠다는 약속을 매장에서 받아낸다. 암튼 못 말려...

그리하여 그 날 퇴근길로 득달같이 달려가신 그 언니, 다음날 내 손에 그 옷을 처억 안긴다.

거금을 투자했지만, 대신 쇼핑도 했으니 얼마나 좋은가? 요즘 그 옷 입고, '앙드레 황'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애용하고 있다.

2

올해는 부츠가 신고 싶어졌다.

운전하고 다니니 별로 필요도 없고 불편해서 한겨울이면 그저 앵글부츠 정도가 고작이고, 잘 신지 않는 부츠이지만, 올해는 롱부츠가 신고 싶어졌다. 마침 모임에서 선물을 내가 사야할 일이 있어 백화점을 잠시 들를 일이 생겼다. 그 볼일부터 보고 부츠를 하나 고를 요량으로...

1층에 구두 특판 매장이 있는데 들렀더니, 이럴 수가!

첫눈에 반한 부츠, 검정 쎄무가 가운데 있고 샤링이 잡혀 있으며, 구두 아랫부분과 맨윗쪽은 악어가죽 비슷한 무늬가 하얗게 놓여 있는 것이었는데, 부츠 고르면서 내 평생 이렇게 한 눈에 든 건 처음이다. 세일해서 20만원, 거금을 들여서 샀는데, 그 모델이 인기가 좋아서 싸이즈가 빠졌단다. 할 수 없이 주문을 해 두고 돌아왔는데, 며칠 뒤 연락이 와서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언니가 대신 사다 준 그 코트와는 완전히 세트가 되어, '앙드레 황'이라는 별명을 더욱 듣게 되었다....

3

지난 일요일.

오전에 영화를 보고, 딸만 집에다 내려준 뒤 직장으로 향했다.

월요일까지 꼭 내야할 문서인데, 늦게 와서 어떻게 써야하는지 확인을 못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아서, 해 놓고 갈 요량으로 문을 두드렸건만, 당직하시는 기사분이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다. 어딘가 순시 중일테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그냥 돌아서서 나왔다. 부천까지 내친 걸음이라 매장에서 자꾸 오라는데 한 번도 못 가서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 언니는 반색을 하며 내게 이것저것 권한다. 마침 사파리식 점퍼도 하나 사고 해야 해서, 바지랑

몇 개 골랐다. 겨울 진바지도 하나 고르고, 딱 내 맘에 들었으므로....하나 과소비 한 건 바로 코트이다. 겨울 코트는 많은데, 검벙 벨벳이 마음에 들어 또 하나 사고 말았다. 들어가는 길이라 좋은 물건을 특별히 할인해서....

암튼 덕분에 크리스마스 케익과 맛있는 포도주도 사은품으로 받고, 식구들 선물도 작은 것으로 사고....내 옷만 산 것 같아서 미안해서....

집에 오니 남편도 호주에서 다니러 오신 아주버님과 또 쇼핑을 했다고 한다. 내 점퍼와 어쩜 색깔이 그리 비슷한지....암튼 지출은 많았지만, 올겨울 쇼핑은 이제 그만해야지.

4

연초부터 쇼파를 바꾸려고 남편과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딱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뤄왔다.

오래 써서 가운데가 내려앉은 모습, 가장자리에 가죽이 듬성듬성 일어난 자국까지...

볼 때마다 바꿔야한다는 강박관념에까지 사로잡혔지만, 늘 바빠서 그냥그냥 버티고 살았다. 게다가 요즘은 면으로 된 방석카바까지 너덜너덜해져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아주버님께서 다니러 온다는 소식도 있고, 그 바쁜 짬을 내어 늘 지나다니며 보아온 가구 공단에 갔다. 늘 퇴근하는 길목에 있지만 한 번도 못 들렀기에...

7시가 넘어서 사람도 별로 없는데, 누박으로 된 카우치 쇼파가 또 내 맘에 쏙 들었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좁은 듯한 매장에 안으로 들어가니 쇼파가 매우 많았다. 이것저것 다 보았지만, 처음에 본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싼 것도 많고, 다양한 쇼파가 많았지만, 사람도 가구도 첫눈에 반하는 것이 역시 최고인가 보다. 연말이고 하니 싸게 불렀다는데, 더 팍팍 깎아서 흥정을 했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값에 가까워져서 꼭 10만원만 더 쓰라는 직원의 말에 못 이기는 척 하고 구입을 했다.

앙증맞은 쿠션도 꼭 끼워달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 배송도 금요일까지 해 줘야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드디어 쇼파 도착, 나는 밖에서 일 보느라 시부모님이 대신 집에서 받으셨는데, 나랑 계속 통화를 하면서 물건이 제대로 왔는지 확인을 했다. 물론 쿠션까지....

그리하여 지난 토요일 손님맞이에는 아무 이상없이 훤한 집안이 되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첫눈에 반하는 보너스가 두 번이나....흐뭇...

'쇼생쇼사'파는 아니지만, 살림장만, 옷 장만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올 겨울 추위 걱정 뚝이다!

전에는 단정한 것으로 주로 사서 입었는데, 이젠 약간은 패셔너블한 것으로 패턴이 조금 바뀐 것 같다.

나이 든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적응하면서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