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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

산행 산행 황경순 북한산 꼭대기에는 달마대사가 산다. 오늘은 벗겨진 머리를 내밀고 푸릇푸릇한 수염과 구렛나루 듬성듬성 돋은 커다란 얼굴로 세상을 굽어보고 찡그리고 앉아 있다. 오후 햇살에 머리가 더욱 반짝거리는 사색에 잠긴 그를 만나려고 나도 낑낑거리는 사람들 대열에 끼여 얼굴을 찡그리며 북한산을 오른다. 그의 코앞에 닿으면 찡그렸던 그의 얼굴도 내 얼굴도 미소로 변해버린다. 북한산 꼭대기에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온몸으로 마음을 열어주는 달마대사가 산다. 시시각각 얼굴이 변하는 달마대사가 산다. 더보기
수신거부 수신기 수신거부 수신기 하얀 접시 하나, 파라보라 위성수신기가 가느다란 받침대 하나 의지한 채 베란다 난간에 서 있다 점점이 뿌려진 주름들 사이로 광속으로 날아드는 순간의 집합체들, 지구 저 편의 삶들이 동시상영으로 시시각각 접속된다 숨가쁜 동영상들로 말은 사라지고 최신 유행을 따라하는 어색한 몸짓들만 가지런한 베란다에 자리를 잘못 잡았다 작은 바늘 하나로 무심히 둥근 판을 돌리는 것이 영락없이 백백 돌아가는 뒤틀린 레코드판일 뿐이다 베란다 난간에서 뒤틀린 세상을 향해 돌아가며 바하의 첼로 무반주곡을 묵직하게 얹고 한 번씩, Back, Back! 외치고 있다. -문학과창작 2007 봄호- 더보기
햇살 밧줄 햇살 밧줄 숲이 하늘까지 다 차지한 치악산에서 자연탐사를 시작한다. 목표물은 가장 싱싱한 피톤치드란 놈, 녀석이 방심한 이른 아침 소리로 몰이를 하면 숨결 소리에 놀라 서서히 끌려오는 녀석, 온몸의 문을 활짝 연 후 꼭 붙들고 새로운 목표물을 찾는다. 초록 향기 퍼덕이는 소리에 놀라 부스스 눈 비비며 깨어나는 금강초롱 꽃망울, 나뭇잎 뒤척이는 소리에 줄지어 달아나는 개미, 다람쥐, 까마귀……. 기세등등 코를 벌름거리며 더욱 몰아붙이니 이게 웬 횡재! 오백 년 묵은 소나무 가지 끝에 딱 걸렸다! 눈부신 햇살 한 줌. 그 한 줌에 내가 오히려 꽁꽁 묶여 버렸다. -문학과창작 2007 봄호- 더보기
강낭콩꽃들의 사랑 강낭콩꽃들의 사랑 강낭콩꽃들을 보면 주홍빛 입술이 생각난다. 작은 입술들이 붉은 혀를 빼물고 오종종 모여 서서 둥근 아치를 타고 오른다 가는 팔로만 아치를 휘감고 허리도 다리도 길게 늘어뜨리고 발뒤꿈치까지 한껏 들고 비좁은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채 자꾸만 오른다 할 말은 많은데 말은 할 수 없고, 끝은 보이는데 닿지는 못해 붉은 혀만 헤벌쭉 내밀고 애꿎은 저녁 노을만 혀끝으로 맛보고 있다. 2006.7.14 더보기
대나무 문신 대나무 문신 담양 대숲 한켠에는 가슴에 문신을 새기는 대나무들이 산다 초록 살갗을 칼로 파내면 드러난 하얀 살점이 붉은 빛으로 생기를 띨 때까지 너무 아파서 주변 가지들을 부여잡고 문신을 새긴다 나약함을 달래려는 푸른 용무늬, 호랑이무늬 대신 그 이름, 그 얼굴, 그 심장의 순서로 한 점, 한 획, 붉게붉게 깊숙히 새긴다. 사철 푸른 대나무 그 단단한 가슴으로도 버틸 수 없는 것들이 그리도 많던가 대숲에 바람이 일면 텅 빈 몸뚱아리들이 한꺼번에 울고 붉은 피톨을 가진 그들이 살아 움직여 메아리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새겨보는 것은 사 랑 한 다 그 한 마디 2006.7.16 더보기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도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도 황경순 얼음구멍을 뚫고 얼음처럼 속이 훤히 비치는 별빙어를 낚는다. 불빛을 찾아 모여든 별빙어 떼는 얼음 구멍 속을 도는 투명체의 작은 별들이다. 동심원을 따라 빛을 내며 빨려 들어오는 별들, 별빙어 떼는 강물에 찬란한 빛을 가득 풀어 놓는다 저 혼자서는 보이지 않는 별, 빛을 받으면 비로소 투명한 빛을 내는 별, 그가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투명하다 못해 스스로 빛을 내는 줄만 알았어 별이 많아지면 그가 돌아올 거야 불빛 하나로 자꾸자꾸 별을 낚는다. 열 하나, 열 둘, 열 셋…… 아무리 낚아도 줄어들지 않는 별…… -2006미네르바 여름호- 더보기
가을에, 불륜을 가을에, 불륜을 황경순 그녀를 만나면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 만지면 터질 듯한 말랑말랑한 젖가슴을 살살 만지다 보면 딱딱한 꼭지가 반항을 한다 그러나 어느 새 젖어드는 혓바닥,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쩝쩝 입맛을 다시다 말캉말캉한 그것을 입으로 쓱 핥고 혓바닥을 굴리며 인사이드 키스를 할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녀에게 푹 빠져서 심장이 터질 듯 그예 그녀를 송두리째 범하고 만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에 붉은 혈흔을 남긴 채, 남몰래 울고 있는 감꼭지, 입가에는 그녀의 순결이 묻어나고 가을은 더욱 깊어간다. -미네르바 2006 여름호- 더보기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황 경 순 해수관음을 보는 순간, 나는 바닷물이 되었다 바닷물이 된 내가 바닷속 물고기 떼와 함께 해수관음을 향해 흘러간다 해수관음의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 물고기들의 팔딱거리는 아가미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지고 몸을 스치는 해초들의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맡겨도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져도 그 관능, 그 아픔을 이기며 나를 채찍질 한다 그 눈길이 미치는 곳마다 들어가는 이, 나오는 이 가슴 속에서 기나긴 행렬을 벗어나 해탈의 미로를 순식간에 빠져 나간다 나는 오늘, 일몰 따라 밀려오는 해수관음의 붉게 단장된 넓은 품에 나를 맡기며 드디어 나를 온전히 멈추었다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미네르바 2006 여름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