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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손옥자/ 김영남 최영미 강만수 김진기 허전 고정애 *[문학과창작]2009년봄호

거리距離, 그 아이러니와 역설

손옥자

(시인)

출전 : 문학아카데미문학과창작 http://cafe.daum.net/munhakac



*김영남 「남성현 고개」 (「학산문학」 2008년 겨울호)

*최영미 「서투른 배우」 (「문학사상」 2009년 1월호)

*강만수 「노인」 (「문학과 창작」 2008년 겨울호)

*김진기 「3분 행복」 (「정신과 표현」 2008년 12월호)

*허 전 「미운 아버지」 (「한국문학예술」 2008년 겨울호)

*고정애 「각인」 (「문학과 창작」 2008년 겨울호)




‘거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물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라고 써 있다.

「일월 곤륜도」라고 하는 이철수의 판화가 있다.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 될 무렵, 동시에 하늘에 뜬 해와 달을 바라보는 작가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거기에는 이런 글구가 씌어져 있다. “들일 마치고 고개 들어보니 해 있는데 달이 뜬다. 일월곤륜이 가난한 집 병풍이구나. 좋은 시절이다”. 넉넉한 작가의 시선이, 사물과 작가와의 좋은 거리가, 해와 달, 둘 다를 병풍으로 갖게 만든 것이다.


KTX가 마을을 쓱 스친다

언덕에 앉아 나는 어딘가를 벤다

베어 쓰린 곳을 한번 따라가 본다

복숭아꽃이 소독약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는 비탈길

그 아래 와인 터널이 벤 곳에다 반창고까지 붙여주겠다

할아버지들 잔주름처럼 성글게 돋은

길가의 수많은 감나무 가지들

그 늙은 얼굴들도 한번 어루만져보자

그러면 깨끗이 옹기를 목욕시킨 다음, 톡톡

항아리 목청 틔우는 청도 할머니의 손이 보이고,

앞치마 두른 경산 아낙과 가방 둘러멘 대구 총각이

골목 담장 길에서 만나 먼 기억으로 피우는

살구꽃 같은 미소도 보인다

그런 둘을 오래 담고 있으면 반도 전체가 발효되겠다

그리하여 감나무와 마을과 길과 언덕이 서로 도우면서

항아리에서처럼 한 번 더 곰삭아 외로워지는 곳

이런 곳엔 승용차 함부로 세우면 안 되겠다

함부로 세우면 큰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겠다

떠난 첫사랑 갑자기 다시 만났을 때처럼

―김영남 「남성현 고개」 전문


화자는 지금 언덕 위에 앉아 있다. 언덕 위에 앉아서 우연히 “KTX가 마을을 쓱 스치”는 것을 본다. 그리고는 문득 자신의 베어 상처 난 곳을 들여다보게 된다. 들여다보는 그곳이 시의 4행부터 16행까지다.

여기서 화자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멀리 바라보는 것들은 아름답다. “복숭아꽃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비탈길”도, “수많은 감나무 가지들 그 늙은 얼굴들도”, “청도 할머니의 손”도, “경산 아낙과” “대구 총각”도 모두 아름답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어루만져 보”고 싶고, “살구꽃 같은 미소”로 보이고, “반도 전체가 발효되”어 부풀어오를 것 같은 느낌까지도 갖게 되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가 가지고 온 아름다움이다.

“이런 곳에 승용차 함부로 세우면 안 되겠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왜? “함부로 세우면 큰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승용차라 함은 화자의 것일 것이고, 화자가 승용차를 타고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개입’, 즉 거리의 좁힘이다. 거리가 좁아짐으로써 직접 개입하게 되고, 좁은 거리에서 부딪히게 되는 것들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거라는 걸 화자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그 상처가 “떠난 첫사랑을 갑자기 다시 만났을 때처럼”이라고 말함에 있어서랴! 사실 사랑은 그리움이다. 사랑이 그리움일 때는 떨어져 있을 때이다. 적당한 거리는 그리움을 유발한다. 다시 말하면, 적당한 거리는 상대의 좋은 점만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격이 좁아졌을 때, 그것은 상처다. 특히 사랑은 적당한 간격이 필수다. 사랑이 깨졌다면 그것은 서로간의 간격이 문제였을 것이다. 다음의 시를 보자.


술 마시고

내게 등을 보인 남자.

취기를 토해내는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봄날이 길어지며 희망이 피어오르고


연인이었던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엉키고 풀어졌다.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얼어붙은 원룸에서 햄버거와 입 맞추며

나는 무너졌다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너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

우리 영혼의 지도 위에 그려진 슬픈 궤적

―최영미 「서투른 배우」 후략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연민에서 끝”냈어야 했다. 그게 가장 좋은 거리였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화자도 내내 불안했었던 것이 역력하다. “연민에서 끝냈어야 했는데”라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 모두는 잘 알면서도 왜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욕심 때문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소유욕, 다 가지려고 하는 욕심, 그것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것이다. 거리가 없어야 자기 것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부부 사이는 0촌이라고 한다. 촌수가 없이 아주 가깝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촌수가 없으니 남이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부부는 특히 적당한 거리를 잘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적당한 거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절제가 필요하다. 어쩌면 뼈를 깎는 고통도 따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도 불사해야 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처럼 이미 상처 받고, 다 아프고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어진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줄이 이어진다. 그리움의 줄이다. ‘이별’이지만, 잃어버림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함이다.

“나는 무너졌다”고 했다. 여기서 화자는 거리를 두지 않고, 욕망을 채움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자신도 상처를 받는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상처의 깊이는 더하다. 가까우면 잃어버리고, 멀면 갖게 된다. 거리는 역설이다.


조각배에 몸을 싣고 있는 저 노인은

아슴푸레한 달빛 아래 날아가는 저


기러기를 다섯 마리 여섯 마리 달빛

그래 달빛을 가르면서 날아가고 있는

저기 저 달빛 아래 기러기를 노인은

눈을 감고서 기러기를 바라보고 있다


저 늙은이 어찌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 그는 기러기들을


이미 품었다 그가 담은 가슴 속 하늘에

―강만수의 「노인」 전문


“저기 저 달빛 아래 기러기를” “저 늙은이”는 “어떻게 품을 것인가”, 정말 어떻게 품을 것인가? 더구나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품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품었다”고 했다. 어떻게 품었는가? 기러기들이 날아가는 “하늘”을 가슴에 통째로 품었기 때문에 하늘 속에 있는 기러기는 당연히 가슴속에 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강만수 시인은 처음부터 거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거리를 잰 것이다. 시 「노인」에서 시인이 사물과 시인의 시선과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지 않았다면, 또 노인과 하늘과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없었다면, 만약 하늘이 노인의 가슴에 딱 붙어 있었다면, 노인은 기러기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 기러기는 벌어진 틈새를 찾아 달아나 버렸거나 아니면 숨이 막혀 죽어버렸을 것이다. 지혜롭게도 시인은 갖고 싶은 기러기와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기러기뿐만이 아니라 하늘까지 소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자와 사물과의 거리도 여기선 아주 중요하다. 화자가 노인과 혹은 기러기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아주 넉넉하고 아름다운 정경으로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자가 노인과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면, 기러기를 자신의 가슴에 담으려 했을 것이다. 화자와 노인과의 거리가 짧아 노인은 보지 못하고(안중에도 없고), “달빛을 가르면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가 노인에게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날아가는” 저 기막힌 “기러기”를 선물한 것이다.


―기어를 중립으로 놓으세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세요

―시동을 끄세요


장안 세차장 밀폐된 하늘, 먹구름과 우레를 동행하고

아나콘다가 갈라진 혀로 내 생의 행간을 썩썩 핥는다

먹이를 삼키기 전 입맛을 돋우려는 듯

거친 전희에

몸을 외로 꼬아 볼 사이 없이 걸어 나오는 절망

후두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그가 다녀갈 때마다 우편함에 수북이 쌓이는 협박문서

주소가 없으니 옆을 지나가면서도 알아볼 수 없는 여긴

신기전神機箭을

쏟아 부어도 빗나갈 과녁이다

견고한 내 영역,

이 아늑한 별채에서 박제가 되었으면

된 바람이 빗방울을 밀어낸다


3분 세차 끝

남은 물방울 속에 내가 들어 있다

―김진기 「3분 행복」


화자는 지금 3분 세차를 하고 있는 중이다. 화자는 차 안에 있다. 차 안과 차 밖의 거리는 아마 몇 센티도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차 밖에서는 “먹구름과 우레”가 밀려오고, 무시무시한 “아나콘다가 갈라진 혀로” “생의 행간을 썩썩 핥는다”. 공포다. 반대로 차 안에서는, 차 안을 “이 아늑한 별채”라고 했다. “별채”란 무엇인가? 별채는 ‘아씨’나 ‘마님’이 거처하는 곳이다. 정원이나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차 안과 밖이 채 10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서 김진기 시인은 최고의 공포와 최고의 평화라는 기막힌 공간을 연출한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화자는, 이 곳에서 “박제가 되었으면”하고 소원한다.

화자는 무언가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세차하는 “후두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우체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 소리로 들리면서 불안하다. 보통 사람들이 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가 왜 화자한테는 불안한가? 그것은 우체부(빨간 오토바이), “그가 다녀갈 때마다 우편함에 수북이 쌓이는 협박문서”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늘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괜찮다. 왜냐하면 세차를 하고 있는 여기는, “주소가 없으니 옆을 지나가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여기를 “견고한 내 영역”이라고 했고, 협박문서가 날아올 수 없는 여기에서 “박제가 되”기를 소원한 것이다.

김진기 시인은 차 안과 밖이라고 하는 짧은 거리를 절묘하게 이용했다. 그것도 긴 시간이 아닌 3분 안에 “생의 행간”의 양면성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어쩌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거리 안에 모든 것이 다 집약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행과 행복이 어쩌면 같은 거리 안에 공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몸속에 좋고 나쁜 박테리아가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배가 남산만한 아버지

간경화증 말기에다

위장까지 걸레가 되어

얼굴이 흙빛으로 죽어가는

미운 아버지

기차무늬가 새겨진 환자복을 입고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아무나 보고 살려 달라는

미운 아버지

내가 남의 집 귀한 딸 데리고 와서

잘 살아보겠다고 집 나설 때

방 한 칸 마련해 주지 못한

미운 아버지

내가 몸 다쳐 사경을 헤맬 때

하나님께 내가 무슨 죄가 많아

새끼가 먼저 죽어야 합니까 하며

울부짖던 겉 다르고 속 다른

미운 아버지

이제 베갯잇을 물어뜯으며

너만은 부디 잘 살라고 통곡하는 미운 아버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함박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돌아가신

미운 아버지

아, 내 심장이 울컥울컥 토해내는

뜨거운 핏속에 숨어 슬피 우는

미운 아버지

―허전 「미운 아버지」 전문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세상의 아버지들은 왜 다 고독하며 외로운 존재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용히 “아버지-”하고 부르면 왜 목구멍 근처께로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밀려올 듯 올 듯 하는지 모르겠다. 왜 세상의 아버지들은 다 안개 낀 긴 강가에 홀로 매어져 있는 나룻배 같은 느낌이 드는지… 쉽게 다가가기도,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구조 속에는 ‘거리’라고 하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렵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허전 시인의 시 “미운 아버지”는, 시 속에 “미운 아버지”가 여섯 번이 나온다. 5행의 아버지는 겉모습이 “미운” 아버지이고, 9행의 아버지는 자존심도 없는 “미운” 아버지이고, 12행의 아버지는 엄마를 울린 “미운” 아버지이고, 16행의 아버지는 무능한 아버지의 “미운” 아버지이다. 그리고 21행의 아버지는 화자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그것을 진작 알려 주지 않은 “미운” 아버지이고, 26행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자꾸만 생각나게 만드는 “미운” 아버지이다. 마지막 결구 29행의 아버지는 아직도 죽지 않은, 화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아버지의 “미운” 아버지이다.

역설이다. 제목은 말할 것도 없이 시구 마디마디가 다 역설이다. 시인은 처음에 아버지의 깊은 뜻을 몰랐다. 술만 먹고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나쁜 아버지로만 생각했는데, 본인이 사경을 헤맬 때 울부짖는 아버지를 보고 그제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차린 거다. 그래서 ‘기막히게 나를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의 최고의 표현이 “겉 다르고 속 다른”이다. 속에 그 진한 사랑을 가두어 두고 겉으로 절대 내색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감동의 표현, 그것이 “겉 다르고 속 다른”이다. 아이러니고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허전 시인은 운율적인 측면에서도 성공을 했다. 시를 소리 내서 읽어보면, 무리 없이 잘 읽혀진다. 그것은 “미운 아버지”를 세 행, 또는 네 행을 건너 중간 중간에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운율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잘 읽히는 행보 때문에 그 서정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서너 행에 한 번씩 불러오는 “미운 아버지”는 독자들에게 연민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연노랑솔새와 중국지빠귀

한국밭종다리와 붉은 머리멧새

푸른바다직박수리

이들은 동남아로부터 날아서 온다


몸길이 15센티 안팎 몸무게 10~20그램

연약하고 작은 몸으로 남지나해 동지나해

짙푸르고 망망한 바다를 건너서 온다


3000~4000킬로 되는 거리를

푸른 섬 홍도 그네들의 보금자리

그 품에 안기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서 온다


나도 모르게

아득히 먼 옛 조상께서 몸 깊숙이 새겨놓은

유전인자가 시키는 대로 살고 있듯이

―고정애 「각인」 전문


무엇이든지 거리 밖에 있는 것들은 거리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바다를 떠났던 사람들은 바다로 돌아온다. 계절을 떠났던 새들이 다시 계절 안으로 돌아오고, 부메랑이 최대한 탄력있는 거리를 유지하다가 급하게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거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두렵다.

고정애 시인의 「각인」에서도 국경을 넘었던 새들이 다시 국경 안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한다. “몸 길이 15센티 안팎”인 “연약하고 작은” 새가 “남지나해 동지나해/ 짙푸르고 망망한 바다를 건너서 온다.” “3000~ 4000 킬로 되는 거리를/ 푸른 섬 홍도 그네들의 보금자리/ 그 품에 안기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서 온다”고 고정애 시인은 말한다. 그 먼 거리를, 그 연약한 몸으로, “짙푸르고 망망한 바다를 건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네들의 보금자리/ 그 품에 안기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이라고 고 시인은 말한다.

거리 밖에 있는 것들은 왜 거리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걸까? 고시인은 「각인」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유전자가”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라고. 거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생각은 필사적이다. 어떤 면에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때,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금 밖으로 밀려났다. 거리 밖으로 내몰린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필사적으로 우리의 적정선인 거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것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일본)이 거리 안으로 너무 바짝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적당한 거리,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성공을 가져오기도 하고 실패를 가져오기도 한다. 사랑을 불러오기도 하고, 이별을 가져오기도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소의 상처와 아픔이 동반되더라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또 지속적인 어떤 관계를 위하여, 그리고 생의 탄력을 위하여 당신은, 적당한 거리를 위한 절제를 시도해 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