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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관조와 희망의 그림 메시지 /양채영시집`개화`리뷰

<문학과창작 2009 가을호>


관조와 희망의 그림 메시지

--양채영 시집 『개화』--


황경순(시인)

시력 40년의 양채영 시인은 이력답지 않은 겸손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여전히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아홉 번째 시집을 상재하였다.

시집 『개화(開花)』를 읽고 난 느낌은, 정갈한 그림처럼 산뜻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시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이미지가 강하다. 때로는 고요한 산수화로, 정물화로, 또는 인물화로 그려지는 그의 시세계에 빠져 현실의 번잡함과 혼란스러움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최근 인간성의 황폐화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상한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어 심각한 범죄가 늘고 있다. 그래서 심리치료가 강조되고 있는데,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아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여러 가지 심리치료를 활용하는데, 그 한 가지로 예술치료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미술치료, 놀이치료, 음악치료 등이 있고, 그 중 시치료의 효과도 많은 연구가 되고 있다. 바로 이런 그림 그리듯이 아름다운 이미지와 시어들로 구사된 시집이 많이 읽히면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의 특징을 들어보라면 첫째, 아름다운 시어의 구사로 그려지는 그림 같은 시라는 점이다. 시집 전체에 녹아든 아름다운 시어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전편을 흐르는 정갈하고, 걸림돌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런 시어들로, ‘시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읽을수록 소리내 읽고 싶다. 소리 내어 읽다보면 점진적인 마음의 흐름을 나타내는 시어들, 평범한 말 속에도 발견되는 심오한 진실의 세계에 젖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둘째, 그의 시에서 읽혀지는 것은 관조미(觀照美)이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바라보는 비움의 미학, 관조의 미학에 빠져, 독자들로 하여금 쓸쓸한 마음을 갖게 하면서, 동시에 인생을 폭 넓게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게 한다. 셋째,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 가슴 두근거림, 설렘, 희망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시인의 시각, 시인다운 감성은 나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의 시들은 이 세 가지 특징들이 전편에 다 녹아 있다. 확연히 구분할 수 없는 일관된 이미지들의 전개방식과 의식들이 읽을수록 머릿속에 서서히 각인이 된다.


1. 아름다운 시어들로 그려진 시, 이미지의 결정체


그의 시는 물 흐르듯이 읽혀진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어들이 구사되어, 자꾸 낭송하고 싶다. 누가 읽어도 쉽게 읽혀지는 시, 그러면서도 자꾸 읽으면 뭔가가 점점 더 느껴지는 시들이다. 전개 방식은 이미지를 연결시켜 나간다. 선명한 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를 낳는다. 시를 읽으면서 한 부분 한 부분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꽃망울 부풀면 걱정된다/ 꽃 피면 며칠 있지 않아/ 꽃이 질 텐데/ 그래도 꽃이 피고/ 세상은 환하게 꽃 속에 파묻힌다/ 며칠 있지 않으면 꽃이 질 텐데/ 바람이 불고 낙화가 분분하다/ 허무하다 허무하다/ 꽃잎 속에서 나부낀다/ 꽃망울 부풀면 환한 세상/ 누가 겨울의 어둠을 물어보기나 했나/ 어느새 꽃은 피고 꽃은 지고/ 땅과 하늘은 중천에 꽃망울을 만든다.

―「개화」 전문


시인은 자연과 꽃을 많이 읊은 시인으로 유명하다. 꽃은 그의 초기 시부터 화두였으며, 이번 시집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시집의 제1부가 바로 꽃이다. 이 시 ‘개화’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의 시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니, 그의 시의 특징과 의식을 가장 집약한 시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인생을 편안하게 비춰보며 유유자적하는 관조미가 느껴진다. 질 줄 뻔히 알면서, 허무한 줄 알면서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또한 허무함과 관조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에 대해 두근거리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꽃망울 부풀면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끼지 않고, 걱정부터 앞선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은 어김없이 피어 세상이 환해진다. 또 낙화가 분분해지고, 그러면서도 누가 겨울의 어둠을 물어보았는지, 꽃이 왜 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연은 그저 순리대로 흐를 뿐이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그렇듯, 사람도 역시 짧은 순간 허무하게 살다가 간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시가 아닐 수가 없다.


꿈으로 가는 길인가/ 스스로를 바라보며 나는 새/ 날개의 물결에 물결이 빛나고/ 물결 저 너머 깊은 곳에/ 잉어와 연어 떼가 날고 있다 // 사람과 집들이 거꾸로 된/ 참 아름다운 세상의 물결을/ 물 흐르듯 물속을 날아가는 새/ 아우성도 총소리도 물결에 잠겨/ 들릴 듯 사라지는 한 가락 절창 // 물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새/ 폭포수도 떨어지다 솟구쳐 오르는/ 산도 숲도 하늘 한복판/ 아! 푸르게푸르게/ 저 물속을 날아가는 새.

―「물 위를 나는 새는 더 아름답다」 전문


물 위를 나는 새, 먹이를 찾는 새, 새의 날개에 물이 깃드는 모습, 물 흐르듯 물을 차며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단숨에 그려진다. 폭포수를 차고 나는 새의 모습, 숲에서 계곡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 산도 숲도 하늘도 푸르다. 그 푸르름 속으로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뿐이 아니다. 물 위를 나는 새가 더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된 세상을 꿈꾸기 때문일까? 아우성도 총소리도 물결에 잠겨버리고, 새는 하늘인지 물속인지 모르게 그저 날기만 한다. 시인은 그 속에서 불합리한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그 새와 함께 날아올라 물을 찍고,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2. 관조의 미학, 생성·소멸의 순환, 합일의 경지


「원추리꽃」을 읽으면 그의 삶에 대한 관조의 미학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매미 울음 속에나 묻어둘까/ 잊자 잊자 해도 아른거리는/ 노오란 원추리 꽃의 하늘거림/ 그 끝에 먼먼 천둥소리.”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우중충한 장마 끝에 노오란 원추리꽃이 산뜻하게 핀 풍경이 환하게 떠오른다. 멀리 떠나가는 천둥소리를 배웅하는 그 환한 꽃들의 귀 기울임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눈과 귀는 모든 사물들에게 열려 있다. 그냥 피는 원추리꽃이 아니다. 천둥소리를 배웅하면서 그 비바람을 견뎌내야만 얻을 수 있는 눈부심이다. 또다시 그런 어려움이 올까 걱정을 하면서 긴 목을 흔들며 가녀린 꽃그늘에, 매미 울음 속에 묻어두려 한다. 노오란 빛의 그 환함 속에서 느껴지는 밝음과 그늘과 천둥을 대비하여 인생을 관조하는 시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푸른 난 잎에 또 여린 꽃잎에/ 싸락눈의 몸 섞는 소리가/ 왼 뜨락에 하얗게 차오른다”라고 표현한 「춘란(春蘭)」과, “누구든 다가서면 소곤거리는 바위/ 그 속에는 참으로 오랜 말이 들어 있다.”라고 표현한 「시간의 무게 2」에서는 자연의 합일合一이 느껴진다. 인간 또한 그 속에 포함된다. 싸락눈이 내린 이른 봄, 비 섞인 싸락눈의 몸 섞는 소리가 뜨락에 차오르고, 벌들은 꽃 속에 몸을 섞고, 모든 것이 섞이는 합일의 경지, 난꽃 한 송이가 세상을 모두 하나로 만들어, 섞이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쪼그려 앉은 시인도 그 속에 자연스레 섞인다. 커다란 바위와 나무는 공생共生한다. 나무는 바위의 침묵을 한없이 들어주고, 바위는 나무의 잎을 바위에 새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강물이 바위 속으로 흘러들게 하고, 바위는 누구든 다가서기만 하면 참았던 말을 소곤거린다. 시간 속에는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간다. 자연이 모두 합일合一이 되고, 인간도 역시 그 일부분이 된다.


꽃이 필 때/ 그는 꽃보다 화사하게 피어/ 맘껏 하늘거렸다/ 비가 올 때/ 그는 빗줄기처럼/ 내 몸을 휘감고/ 속속들이 젖어왔다/ 바람이 불 때/ 한량없이 나부끼며/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의 몸짓」 전문


그의 존재는 자연과 늘 함께 한다. 꽃이 필 때는 꽃보다 화사하고, 비가 올 때는 빗줄기처럼 나를 적시고, 바람 불면 바람처럼 나부낀다. 그리곤 또 떠나버린다. 모두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력 40년을 넘은 시인의 회상을 보는 듯한 시다. 그가 스승이었을 수도 있고, 여인이었을 수도 있으며, 친구였을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랑하는 어떤 사물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 어렵던 시절, 함께 흔들리던 시절을 뒤로 하고, 결국 모두 떠나버린다. 모든 것은 결국 떠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김춘수, 서정주 시인을 회상하는 시 등 인물에 대한 시도 몇 편 나오는데, 이러한 시인의 외로움과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역시 녹아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목도리를 한 사람이/ 구부정하게 지나간다 // 바람에 날려갈 듯한 가벼움/ 무소식은 너무 막막해/ 그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쩡쩡 얼고 있는 놋쇠 부딪는 소리/ 빈 하늘과 숲과 들판.” 이라고 표현한 「청동빛 그 겨울」에서도 이와 같은 자화상이 그려진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사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지지만, 모두 너무 외롭다. 특히 구부정한 그, 추운 강물, 설산 사이의 외로운 그, 외로운 새 한 마리, 그리고 부딪쳐버리는 청동빛 겨울의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무소식은 너무 막막하고 한 마리 새의 날개 부딪는 소리가 남기고 간 빈 하늘, 노년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딘가 숨어 있을 사막의 여우에게/ 묻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언제쯤 도착할지 알 수 없는/ 회신을 기다린다 해도/ 저 아름다운 모래 물결무늬는/ 끝없이 변해가고 있겠지.

―「화성의 사막」 부분


화성의 사막을 신문의 사진에서 보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사막이 있으면 사막의 여우도 있을 테고, 사막이 있으면 바다도, 강도, 생명체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시인의 텔레파시로 질문을 보낸다. 아무리 먼 곳의 모래사막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모래사막도 변할 것이라고 본다. 모든 것은 생성이 있으면 변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숨어 있는 메시지는 소멸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섭리는 우주와도 연결되어,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을 반복한다. 시인의 의식은 이미 삶을 초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3. 삶의 아름다움과 가슴 두근거리는 희망의 메시지


그의 시에서는 생의 황혼에 대한 관조미와 슬픔이 배여 있지만, 그 슬픔 역시 생의 아름다움과 가슴 두근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고 있다. 앞에서 보아온 시들도 대체로 그러하거니와, 몇몇의 시편들은 그 흔적이 더욱 뚜렷하다.


켜켜이 쌓인 하늘마다/ 그대 이름과 별과 이름 모를/ 설움이 쌓이고/ 불빛 고운 강물들이 뒤섞여 흐르고/ 아! 켜켜이 또 쌓이는/ 저 익명의 신비함이 깊어지고/ 하늘은 한량없이 높푸르다.

―「하늘 한 켜」 부분


하늘에 켜가 있고, 모든 사물들마다 하늘의 켜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켜켜이 쌓인 하늘마다 그 사물들의 설움이 쌓이고, 불빛 고운 강물들이 뒤섞여 흐르고, 익명의 신비함으로 하늘은 한량없이 높푸르다. 푸른 하늘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켜와 그 푸르름의 조화도 눈부시다. 고요함 속에 강한 희망의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양채영 시인은 1935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아호는 일여(一如)로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평생을 교직에 봉직하였으며, 1966년 월간 『시문학』 천료한 이래 시집으로 『노새야』 『선·그눈』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지상의 풀꽃』 『한림으로 가는 길』 『그리운 섬아!』 『그 푸르른 댓잎』 『지상은 숲이 있어 깊고 푸르다』 등이 있다. 그의 아호처럼, 한결같은 시인으로 40여 년 동안 절제된 이미지의 시를 써왔다. 홍신선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그 사람 됨됨이 역시 한결같아서 지인들에겐 아직도 해마다 연하장을 보내는 성실한 시인으로 통한다고 말한다. 그의 이번 시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양채영 시인의 근년 시들은 대체로 ‘비워내고’ ‘가벼우며’ 또 ‘날기’도 한다. 그리고 그 비워내는 자의 정서인 쓸쓸함과 적막이 깃들어 있다. (…중략…) 이러한 고적감은 특히 이번 시집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그것도 자연의 이법을 순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 여기에다 그는 특유의 ‘비워내고’ ‘나는’ 상상력을 대동한다.


양채영 시집 『개화』는 해설자의 말처럼 그런 인생의 황혼기의 슬픔과 아픔이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관조하는 시편들을 보면서 40여 년을 시를 써온 시인의 왕성한 시작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부디 건강하셔서 더욱 좋은 시들을 보여주시기를 기대해본다.







<양채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