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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역사를 넘나드는 상상력 /윤동재 시집 『대표작』

문학과창작 2009봄호 게재

윤동재 시집 『대표작』

역사를 넘나드는 상상력


황경순(시인)




윤동재 시인의 시집 『대표작』이라는 제목만 보고, 그동안 쓴 시선집인가 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시의 제목 중 하나였다.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역사 속을 넘나들며 시공을 초월한 묘사를 능수능란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역사 속을 넘나들며 역사적인 인물과 철학, 종교 등 전반적인 분야를 자유자재로 묘사하고 있다. 두 번째로 주목을 끈 것은 삶에 대한 천진스럽고 바람직한 자아성찰의 세계였다. 인간의 기본 도덕성에 대한 자기반성에 너무나 철저하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엄격한 반성과 자아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행동하려는 의지가 결연하다. 세 번째로는 그의 박식한 철학적인 사유와 종교 및 사상의 통합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모든 철학과 종교, 유·불·선을 모두 아우르는 화합의 미학, 물아일체의 자기 수련 의지가 전편을 통해 흐른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자기반성을 하게 하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1. 역사 속으로 들어간 시인(詩人)


윤동재 시인의 시는 참 재미있고 흥미롭다. 시집에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 속의 인물이 두루 나오고 있어서 시대를 초월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몇 편을 읽자 마자 역사 속으로 함께 빠져 들어간다. 그 인물들의 면면 또한 다양하다. 단순한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그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인은 시대를 늘 걱정하고, 그 아픔을 나눌 줄 안다. 또한 그 아픔을 조상들과 함께 나눈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지만, 시대의 비교를 통해서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이끌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모든 것이 헛되니/ 탑을 만들지 말고/ 비명을 짓지도 말라고 했건만/어째서 탑비의 글을 짓고 글씨도 썼느냐고/ 진감선사가 최치원의 두 어깨 위로/ 사정없이 죽비를 내리치고 있었지요/ 죽비소리가 지리산 청계산 골짜기를/ 쩡쩡 울리고 있었지요

―「쌍계사 죽비소리」 부분


이 시에서는 도력 높은 고승인 진감선사와 그 비문을 지은 신라시대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나오는데, 진감선사가 최치원을 죽비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풍자인가? 윤동재 시인은 어디서나 이런 역사적인 인물을 모셔 와서 형식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대해 질타하고 있다. 시인 자신이 진감선사가 되어 사정없이 최치원을 비롯하여 쓸데없는 공적비나 짓고 있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모른다고 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좆이 훈훈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박재삼 시인은 아는 사람도 만나보고 싶고/ 우스개 소리도 한 마디 해 보고 싶어/ 오랜만에 이승 나들이를 해 보았다고 했다

―「나들이」 부분


반면 ‘나들이’는 상당히 개인적인 인연에 따른 인물 순례이다. 가난과 설움에서 우러나온 정서를 아름답게 다듬은 언어 속에 담고,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고하신 박재삼 시인과의 생전의 추억을 더듬으며 평소에 주고받던 농담을 시에 삽입함으로써 웃음을 저절로 자아내게 하고, 서민적인 고인을 생각하는 동시에 시인의 서민적인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평생을 최한기와 공부를 함께하고 있어 그를 가장 잘 안다는 사람은 그가 공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서 나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상은 공부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상을 주려면 시간을 듬뿍 주는 것이 가장 좋은데 대한민국 학술원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습니다

―「최한기」 부분


이 작품은 윤동재 시인의 사상적 밑바탕이 되는 작품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고 서양의 과학서적을 번안할 정도로 평생을 백성들을 위한 책들을 쓰거나 번역하고 공부하신 혜강(惠崗) 최한기를 끌어와 현대의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는 학자로 비유하여,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산문시로 나타내고 있다. 그 학자의 면면을 이어받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이 절절이 나타나 있다. 시를 쓰는 일에서도 시인은 이 분을 큰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가슴 속에 깨달음이 넘치면 절로 글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구태여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 살아 움직이는 빛을 발한다.’ 혜강 최한기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시를 쓰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 시와 삶의 스승 가운데 한 분이 혜강 최한기이다.


다음 작품 역시 문학에 대한 그의 기본자세를 잘 드러낸다. 대문호인 톨스토이도 헛된 이름보다도 진정한 대표작은 그의 초라한 무덤이라고 몸소 실천으로 말해주는데, 범인들은 얼마나 더욱 겸손하게 작품에 임해야 하는 지를 강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귀족이어서 귀족의 묘지에 묻혀야 했지만 스스로가 거기 묻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극히 쓸쓸하고 초라하여 오히려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그의 무덤이 톨스토이의 대표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표작」 부분


이렇게 시인은 역사 속의 인물을 그의 주변으로 늘 끌어들인다. 그 인물들의 전공 분야도, 살다간 시대도 매우 다양하다.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대해(大海)’의 고사를 끌어와 맹목적으로 무조건 내놓는 것이 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부석사의 전설에 나오는 ‘선묘’를 끌어와, 학식이 높은 것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하기도 한다. 한문소설의 주인공 ‘유광억’, 의병장 ‘신돌석’, 석가모니불, 예수님, 부처님, 염라대왕, 만암 스님, 큰스님 등을 현대로 모셔와 친일파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을 응징하여 서민들의 속이 시원하게 한다. 깨달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고 있는 중생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쏟기도 한다. 윤동재 시인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시(詩) 속으로 불러와서 자신도 깨닫고 독자들에게도 깨달음을 주는 구도자의 정신을 보여준다.


2. 삶에 대한 천진스런 자아성찰과 비판을 통한 서민들의 대변인


윤동재 시인의 시에서는 서민들의 애환이 어디에나 배어 있다.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란 말이 딱 들어맞게,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그에게는 교훈을 주고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 된다. 그러면서도 시적 전개는 까다롭거나 어렵지 않다. 무리 없는 자연스러운 이야기 속에 진지함이 느껴지고, 때로는 해학적이면서도 재미있다는 점이다. 읽으면서 그 기발하면서도 무리 없는 발상에 미소 짓는 사이에 저절로 깨달음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이 천진스럽고 유머러스한 전개 방법은 시인의 독특한 표현이다.


“야야, 서울 생활 힘들제 내 다 안다/ 니가 준 돈 십만 원 도로 놓고 간다/ 애들이랑, 에미에게 우짜든동 잘해 조라/ 친구들에게도 가끔씩 소주 한 잔 사라”

―「십만 원」 부분


「십만 원」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잘 드러나 있다. 모처럼 상경하신 어머니께 아내 몰래 넣어드린 십만 원이 편지와 함께 내게 되돌아온다. 어머니가 계시는 남쪽 하늘 큰 별 하나를 보며 눈물짓는 시인,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서민들의 애환이 아닐까? 이런 작품은 무척 많다. 노점상 할머니의 쑥을 몽땅 사서 쑥국을 끓여먹으면서 느끼는 간간한 쑥국의 맛! 시골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들어드리며 쓴 ‘마음은 무게가 없다’라며 힘들어하지 않는 담담한 분에게서 얻는 깨달음, 평생 이 일 저 일 전전하다가 모처럼 넥타이를 매고 좋은 직장 취직했다면서 외판원이 되어 나타난 친구의 애환 등, 현대에 만연한 실업 사태까지도 잘 보여준다. 현실의 문제점을 그때그때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시인인 것이다. 또한 시인이 몸담고 있는 교육계의 입시위주의 정책, 인성교육과 주입식 교육의 갈등을 비판하기도 한다.


올해 일흔한 살 부산 할매/ 명일 시장에서/ 고구마 고추 호박 가지를 팝니다/ 들깻잎 양파 무도 팝니다 (…중략…) 장사하느라 절에는 거의 못 가지만/ 우수리보살로 통합니다/ 우수리보살 하면/ 명일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수리보살」 부분


반면에, 이 작품은 인심과 공양을 스스로 실천하는 서민을 표현하였다. 없는 살림에 인심이 난다고 하였던가? 내일 굶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걸인에게 찬밥덩이라도 건넨다. 건설현장 날품팔이 일꾼이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몸 바꿔 나신 부처님이라며 꼭 천 원씩 건네주기도 하고, 생전 처음 이집트로 해외여행 간 농부가 집집마다 길손들이 마실 수 있게 내놓은 물 항아리를 보고, 매일 자기 집 앞에 내놓고 실천하기도 한다. 깨달으면 바로 실천하는 서민들의 자비심과 실천의지를 표명한다. 아무리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도 서민들을 짓밟고 실정을 모르는 정치인들, 부유층 인사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동시에, 서민들의 풍요로운 마음의 여유를 자연스럽게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먹보씨는 자기도 피선거권을 가지게 되면 대통령질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필리핀을 갔다 와서는 대통령질에 대해서 아주 흥미를 잃었다고 합니다 마을마다 우물 하나씩만 파주어도 살아서건 죽어서건 늘 칭송받는데 그렇게 쉬운 일을 자기가 왜 맡아서 해야 하느냐고 했습니다

―「막사이사이 우물」 부분


위의 작품은 척박한 경제현실을 잘 꼬집고 있다. 이렇게 쉬운 대통령질을 왜 못해서 욕을 먹는 것일까? 그밖에 이집트 아스완에서 마차를 타면서 흥정을 하는데 마부가 말도 한 식구이니 돈을 따로 챙겨줘야 한다는 이야기, 백안관에서 미국 대통령이 뻔뻔스런 허연 일만 하고, 청와대에서는 모두 서슬 퍼런 짓만 하기 때문에 ‘허연 집, 퍼런 집’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무척 설득력 있는 발상이다. 또한 ‘먹보씨’ ‘느림보씨’라는 말 자체는 얼마나 해학적인가?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현실 비판적인 시를 웃음으로 처리함으로써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아들딸들이 팔순 기념으로 보내주어 오셨다는 할아버지 한 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문자를 지우는 데 성공하여 산스크리트 비문을 읽고 우리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비문에 씌어진 글자는 수백 글자가 넘지만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고 했습니다. 착하게 살자 그것뿐이라고 했습니다 현지인 가이드는 비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낸 사람을 처음 만났다고 했습니다

―「앙코르와트 산스크리트 비문」 부분


위의 시는 서민의 눈이 그만큼 천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의 눈에는 세파에 찌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동심으로 돌아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카세트녹음기가 어느 날 수명을 다하여 상좌 스님이 절 뒤쪽 소각장에서 다비를 해 주었는데 사리 수십 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두어 해 전 회주 스님이 입적했을 때 다비를 했는데 그때는 사리가 한 과도 나오지 않았고 얼마 전 주지 스님이 입적했을 때도 다비를 했는데 사리 한 과도 나오지 않아 모두들 쉬쉬했는데 사리 수십 과가 쏟아졌으니 미타사의 경사입니다

―「카세트녹음기」 부분


이 얼마나 기막힌 발상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윤동재 시인은 시공(時空)만 초월한 것이 아니라 만물(萬物)을 초월하여 모든 사물 하나에도 의미와 마음을 부여하여,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풍겨난다.


3. 물아일체(物我一體), 그리고 시인의 행동강령(行動綱領)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의 두 시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불교에 대한 깊은 소양과 자비심, 깨달음에 대한 생각이 시마다 흐르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제1부는 모두 불교 소재이고, 3부에서도 많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시집 전편을 분석해 보면 유교적인 내용도 있고, 목사님, 신부님, 알라신, 이집트의 신들까지도 조금씩 언급되었으며,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불교를 다루면서도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국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수국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모니불이 보인다 // 도리없이 나는 시방/ 수국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두 손 모으고 있다

―「절터」 부분

나는 알라신이 주신/ 트루판 하늘 한 자락을/ 여행 가방에 잘 넣어와/요즘 날마다 꺼내 보고 있다

―「트루판 하늘」 부분


그는 세속화된 불교를 비꼬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어디에든 부처와 보살이 깃들여 있다고 말한다. 가이드가 알라신께 핸드폰으로 통화를 해서 얻어낸 푸른 하늘 한 자락은 시인에게 오래오래 남아 있다. 윤동재 시인은 불교적인 정서의 시를 많이 썼지만, 종교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현대인에게도 돌아가신 조상들에게서도, 외국의 톨스토이 같은 문호에게서도 그들의 사상과 종교가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물아일체(物我一體), 그 속에 부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알라신도 존재한다. 이런 실천정신을 갖기 위해 시인은 끊임없이 종교도 비판하고, 지도층도 비판한다. 방법적인 면에서도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말이다. 역사 속의 인물도 끌어오고, 소설 속 주인공도 끌어오며, 동물도, 식물도, 사물도 인간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이 동이 날 정도로 수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윤동재 시인은 경북 청송 출생으로 영남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원과 고려대학교 강사로 있다.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누구일까」라는 동시가 수록되어 있고, 옛이야기를 동시로 써서 들려줄 수 있도록 독특한 동시세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좋은 날』, 학술서 『한국 현대시와 한시의 상관성』, 동시집 『서울 아이들』 『재운이』 『동시로 읽는 옛이야기』 『도둑 쫓은 방귀』 등이 있다. 시그림책 『영이의 비닐우산』을 써서 프랑스와 일본의 아이들에게도 함께 읽히고 있다.

그는 참 매력적인 시인이며, 끊임없이 연마하고 행동(行動)하는 시인이다. “천진스런 상상력과 장난스러움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인식과 사고의 심도를 한층 강화하여 우리의 심각한 현실을 비판하는 시인”(이남호, 시집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설)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이런 바탕 위에서 ‘서슬이 살아 있는 사상시의 전범으로, 고금(古今)의 합작으로 시쓰기를 혁신하려는 이 시대의 향기를 가지고 있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새삼스러이 일깨우고 있는 은자의 시인’(김헌선, 시집 『날마다 좋은 날』 해설)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문학의 바탕이면서도 애매하게 누락되어 버린 한시(漢詩)와 한자(漢字)로 된 국문학의 상관관계 연구를 통해서 현대시의 발전을 추구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사상과 동·서양의 고전사상, 불교와 기타 종교들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윤동재 시인은 시공(時空)과 만물(萬物)을 초월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특한 시세계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다. 문학적인 자양분과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바른 인식과 지식, 그 바탕에 깔린 인간애와 통찰력 없이는 이처럼 개성 있고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우 겸손하다. 그의 시는 바로 서민들의 실천정신이요, 시인의 행동강령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망처럼 시(詩)가 그저 책 속에 머물지 않고, 밥이 되고, 물이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웠으면 좋겠다. 연륜에 비해 시집이 적은 것이 안타깝다. 절제의 미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인 자신의 다짐처럼 자주 작품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