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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낭만적 이미지즘, 김광균(金光均)의 시 세계

-작가 분석-

낭만적 이미지즘, 김광균(金光均)의 시 세계

황경순(시인)



1. 들어가는 말

시 ‘머-언 곳에 여인(女人)의 옷 벗는 소리...’ <설야(雪夜)>라는 시는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눈 내리는 풍경조차도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했던 김광균은 소리조차도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 쓴 이미지즘 계열의 시인이다. 어려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찾아온 가난, 장남으로서 집안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무감, 일찍부터 뛰어든 생활전선, 첫 직장인 항구도시 군산과 군산에 비해 엄청나게 번화한 서울에서의 도시 체험, 그리고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만남,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와사등(瓦斯燈)’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김광균의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시작(詩作)과 문단활동, 그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2.작품을 통해 알아보는 김광균(金光均)의 인생과 시세계

김광균의 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의 시 대부분이 한 폭의 산뜻한 그림을 연상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깊고 자세하게 보면 그 내면에는 고향, 육친의 상실과 같이 주위의 대상들의 소멸에 대한 아쉬움과 그것으로 인해 빚어진 향수라는 두 개의 정서적 축을 그 근원으로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의 시적 출발은 바로 비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비애는 구체적인 죽음의식과 생활의 고난,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12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경제적, 정신적 빈곤, 그리고 6남매를 혼자 손으로 부양해야 하는 어머니의 기구한 운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찍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의 외로움 등이 초기 김광균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1) 유년시절의 상실과 그리움

김광균은 어린 시절 유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가 12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가장인 그는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고향을 떠나 군산, 서울과 같은 객지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그가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갑작스럽게 기운 집안, 가난한 생활의 연속, 장남으로서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책임감,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있어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을 빼앗아 가 버리기에 충분하다.

빼앗겨 버린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감은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동심의 세계로 회귀하여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외롭지 않고 평화와 안정이 보장되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김광균의 유년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더듬게 해 주는 매개체는 전깃불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생활을 하면서 인위적인 전깃불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체험과 연결되면서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그 시절 자신이 가졌던 ‘꿈과 희망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이라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하게 된다.

광균(光均)이 어렸을 때는 램프를 켜고 살았다. 램프의 호야를 닦는 것은 주로 그의 몫이었다. 램프를 닦고 석유를 넣은 다음 성냥불을 켠 뒤에 불빛을 크게, 또는 작게 하면서 램프의 등뒤부터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마냥 신기하게 여겼던 소년이라고 한다. 이런 등불에 대한 체험을 하면서 광균(光均) 은 꿈과 희망을 갖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는 이다. 그의 유년시절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은 설야(雪夜)에 잘 나타난다.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기쁘게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설레이느뇨

서글픈 옛 자취인양 흰 눈이 내려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호을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설야(雪夜)>

눈이 내리는 광경의 묘사로부터 시작되는 이 시는 비유에 의한 시각적 이미지가 관념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밤'의 어두운 이미지에 대조되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적 자아는 상실감 또는 부재의 현실인식으로 인한 그리움과 기다림이라는 심리적 상태에 처해 있다. '먼~곳'이라는 관형어는 그 그리움이나 기다림의 대상이 쉽게 도달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며 시인은 '호롱불'과 '등불'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자신의 꿈과 희망을 그리워한다. 또한 '그리운 소식'으로서의 눈은 다시 '서글픈 옛 자취'로 비유적 전이를 이룬다. 이것은 그리움의 정조가 지금은 잃어버린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이 부재하고 있다는 현실을 새삼 인식하는 데서 서글픔의 상태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비애에 잠기게 된 자아는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는 '행위로 비애의 차단을 시도한다. 등불을 켠다는 것은 비애의 차단을 통해서 현실의 고독이라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어린 시절의 따뜻함에 대한 소망과 열린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2)가족의 죽음을 접하면서 형성된 그의 죽음의식

인간을 공동체의식의 테두리로 묶어주는 최초의 단위는 혈육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이다. 김광균의 시에 드러나는 사람들은 보통 1차 집단인 가족과 구성원이나 벗들에 한정되어 진다. 특히 친족 구성원으로 이끌리고 있는 그의 모든 시는 끈질길 정도로 과거를 되새기는 일을 반복한다.

(가) 아버지의 죽음

어렸을 적 일찍이 상업계에 뛰어든 아버지 덕택으로 김광균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지만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누이동생이 어린 나이에 죽는 등 애정상의 결손을 입은 가정에서 자라나게 된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도 이러한 어린 시절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외감이나 우울, 연민과 같은 심리적 상태를 보이는 시들이 많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으로 소리를 내어 울었던 그는 아버지를 여윈 슬픔과 불안감을 후에 <해바라기의 감상(感傷)>이라는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해바라기의 하-얀 꽃잎 속엔

퇴색(退色)한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길가의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黃昏)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헤뜨리고 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무덤 위에 등불을 키려

나는 밤마다 눈멀은 누나의 손목을 이끌고

달빛이 파-란 산길을 넘고.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김광균은 여기에서 해바라기 꽃잎을 통해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가 해바라기 꽃잎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현재이고 그 꽃잎을 통해서 어머니를 떠올린 시간은 과거이다. 그가 떠올린 과거시간에는 퇴색한 작은 마을과 늙은 어머니의 고단한 노역이 존재한다. 어머니가 노역을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죽음에 있을 것이며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는 현실이 아닌 곳에 존재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일을 하게 되고, 2연의 마지막 행 ‘머리를 헤뜨리고 느껴 울었다’라는 표현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빗대어 아버지를 여윈 후 집안의 어려움, 자신이 가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과 같은 것으로 인한 광균(光均)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정신적 안식처인 과거로 회귀하여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산 자로서 함께 하고자 하는 심정과 의지를 담고 있다.

(나) 누이동생의 죽음

광균(光均)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누이동생은 마음씨가 아주 고왔을 뿐만 아니라 항상 웃는 얼굴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게 되고 그런 동생에 대해 광균(光均)은 특별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기항지』의 발문에 있는‘<조화(弔花)>의 세 편은 열 여덟에 죽은 누이동생에 대한 나 개인의 조가(弔歌)’라고 밝힌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누이동생의 죽음을 조상(弔喪)하는 시편들로는 <대화(對話)>,<조화(弔花)>,<수천리(水鐵里)>,<대낮>등이 있다.

칸나의 입술을 바람이 스친다

여윈 두 어깨에 햇빛이 곱다.

칸나의 꽃잎 속엔

죽은 동생의 서러운 얼굴

머리를 곱게 빗고 연지를 찍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이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대낮

비인 마당 한 구석에서

우리 둘은 쓸쓸히 웃는다

<대낮>

이 시에서 광균(光均)은 칸나를 통해 죽은 동생의 서러운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칸나는 그와 동생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다. 환한 대낮에 칸나의 꽃잎을 보며 머리를 곱게 빗고 두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동생을 만나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또한 환상에 빠진 채 죽은 동생과 쓸쓸히 웃는 광균(光均)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착각에 빠져 환상 속에서 죽은 동생과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누이동생은 죽었지만 그는 동생이 죽지 않은 것으로 인정하고 싶어한다. 동생이 죽지 않았고, 아버지도 죽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그의 간절한 염원이 표출된 것이다.

(다) 어머니의 죽음

광균(光均)은 그의 아버지보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더 각별했다. 이것은 일찍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대한 기억이 별로 없음에도 기인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했던 어머니의 노고와 기구한 운명을 곁에서 오래 지켜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김광균이 어머니를 그리워함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목련(木蓮)에서도 드러난다.

목련은 어찌 사월에 피는 꽃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던

어머니 가신지도 이제는 10여년

목련은 해 저문 마당에 등불을 켜고

지나는 바람에 조을고 있다

목련은 슬픈 꽃

사월이 오면

나뭇가지 사이로

어머니 백상은 어른거리나

지금쯤은 먼 곳에서

옛 마당에 핀 꽃을 잊지나 않으셨는지 <목련>의 일부

여기서 그는 목련을 통해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목련은 어머니와 그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다. 그는 죽음 자체를 부정하여 죽은 자를 산 자로 인정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해 조문 마당에 핀 목련꽃도 등불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아버지나 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무덤에 등불을 켜는 행위나 램프를 처마 끝에 거는 행위와 동일하다.

위의 몇 가지 작품을 통해서 알아봤듯이 해바라기와 어머니, 칸나와 죽은 동생, 목련과 어머니의 연결방식에는 두 사물간에 공통성이 있다기보다는 해마다 보게 되는 칸나나 해바라기 꽃처럼 죽은 아버지나, 어머니, 누이동생을 매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광균(光均)의 심리상태에 의한 연상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누이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등 가장 가까운 가족구성원의 죽음을 접하였지만 그는 그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심리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이미지즘의 기반

(가) 김기림과의 만남을 통해 모더니즘에 눈뜨다

1935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광균(光均)은 소공동의 낙랑다방에서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 준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라는 직함으로 문단에도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비평가 김기림이 바로 그이다. 김광균은 김기림과의 첫 만남을 “그날 밤의 다방에서 대화는 나의 시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주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김기림은 주지주의이론가이며 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시운동을 이끌어나간 대표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런 김기림과의 만남은 대표적인 한국 모더니즘 시인 김광균을 있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기림은 김광균이 나중에 시작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진다.

첫째, 그 전까지 시대적 조류나 문단의 흐름, 동향에 대해서 체계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지 못했었던 그가 중앙문단과, 예술의 시대성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둘째, 김기림과 그의 주변인물들의 소개에 의해서 적지 않은 수의 젊은 시인, 화가들과

만나게 되고 그들과 교류하게 된다.

셋째, 김기림과의 만남은 그에게 인상파 이후의 현대회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몰고

오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런 회화에 대한 관심은 그에게 시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시작경향이 눈에 띄게 회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김광균은 다른 어떤 것보다 회화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고 후에 이런 자신의 내면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었다.

【고호의 <수차(水車)가 있는 가교(架橋)>를 처음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 느낀 유럽회화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보다 생생하다. ․․․ 나는 급속히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시집보다 화집이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 하였고 내 정신 세계의 새로운 영양(榮養)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김광균, 30년대의 화가와 시인들, 『와우산』P.172

이런 그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이후 동시대 화가들과의 교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김기림과의 만남은 해방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는 김광균이 문학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동반자이자 후원자였다. 그들 사이의 인연은 6.25전쟁으로 인해 김기림이 납북되면서 끝이 났지만 그 후 1988년 김광균이 ‘김기림 기념사업회’의 공식회장을 맡음으로써 다시 이어지게 된다.

(나)젊은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안목을 넓히다

김기림과의 만남을 전후해 김광균은 당시 조선문화 예술계의 시인, 화가들과의 교류를 넓혀 나간다. 그 무렵 그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고향친구이기도 한 김재선과 시인 오장환, 소설가 이봉구, 화가 최재덕, 김만형등과 어울렸으며, 오장환의 소개로 서정주와도 만나게 된다. 김광균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예술세계 속에 시대정신을 구현해보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은 똘똘 뭉쳐 밤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시와 소설, 그리고 회화에 대해 끊임없는 토론을 하였다.

이러한 문인들과의 만남 중에서도 시인 오장환과의 교류는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비교적 형편이 넉넉해서 일본 출입이 자유로웠던 오장환을 통해서 김광균은 도쿄에서 나온 신간시집과 컬러판 화집들을 얻어 볼 수 있었다. 또 그 후에 오장환이 경영하던 ‘남만서방’이란 서점에서 국내외의 문학서적과 시집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김광균이 막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던 서정주를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이런 만남을 기폭제로 하여 김광균은 그의 주변 친구들과 시인부락(1936), 자오선(1937) 등의 동인을 결성하였다. 비록 이들의 활동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발자국을 남긴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회화성에 빠져들다

그가 자주 어울리는 일단의 화가들의 화풍 또한 그의 시작(詩作)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것은 고흐나 세잔느의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들이었다. 이들 그림에서 나타나는 조형적 구도와 공간 배치, 동원된 소재들의 입체감과 양감, 두터운 질감 묘사 등은 그의 시작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인상파 회화에서 중요시되는 선․색채․빛 등의 작위적인 결합과 배치는 기교적 차원에서 이를 시의 경우에 적용시켜 볼 만 하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김광균의 이미지즘은 이론 자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 서구 회화에 대한 자신의 기호와 언어 예술에 대한 자각을 기초로 텍스트 창작에 임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김광균은 상징주의나 모더니즘, 이미지즘 이론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 다만 김기림 등이 옆에서 그의 이미지즘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인식을 도왔을 것이다. 그는 이론보다는 이미지 중심의 시각적 조형성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회화적인 이미지는 그의 시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외인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내리고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길에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촌(外人村)>

여기서는 시적 정서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양한 색채어 들을 활용하고 있다. 구체화된 시각적인 감각은 다양한 서술어들과의 만남으로 시적인 정조의 형성에 기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은 바로 마지막 연의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이다. 어둠 속 하늘로 퍼져 가는 종소리의 파장을 시인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외인촌의 정경을 보던 눈으로 직접 그려보고 있다. 시인은 밤의 고요를 깨치는 종소리가 적막감에 감싸여 있는 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분수처럼 흩어지는' 이라는 말로써 형태를 부여하고 '푸른'이라는 색채어를 동원하여 색감을 넣어준다. 이 놀라운 감각적 표현은 시각적인 감각과 청각적 감각을 서로 통합시켜 새로운 공감각적인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는 당시 모더니스트 일반에게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30년대 모더니즘시의 주된 경향은 이미지즘과 결합하여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함에 있었으며 이런 경향을 회화적, 색채적 수법으로 가장 뚜렷이 구현한 시인이 바로 김광균이었다.

그의 이미지즘적인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바로 애상적인 분위기다. 위의 시어 중에 '고독한, 공백한, 여윈' 등이 환기하는 것은 바로 애상감이다. 애상감은 우리가 흔히 낭만주의의 주된 정서로 알고 있다. 그런 애상감과 우수감이 모더니즘에 표방되었다는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일 수 있다. 이미지즘을 내세우면서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현실성이 결여된 면이 있다는 것에 김광균의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서구시의 이론을 바탕으로 참신한 기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한 것이다.

4) 현대문명과의 만남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는 그 자신의 이상향을 상실한 채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현대문명과 도시를 지향하게 된다. 그의 현대문명과 도시 지향성은 그의 시(詩)속의 소재를 통해 나타난다. 그의 시속에는 전기, 기차, 영화, 다방들의 현대적인 소재들이 다수 등장한다. 김광균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도시적인 소재들이 그를 모더니즘 시인이라고 불리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김광균에게 있어 현대문명과 연관된 최초의 충격은 바로 유년기 때 겪었던 현대문명이었다. 그것은 바로 전기이다. 이전까지 등잔불이나 램프를 사용하여 생활하던 그의 고향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그는 현대문명을 향한 동경의 마음이 시작되었다. 또한 현대화의 상징인 기차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을 편리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도시와 아직 전 현대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농촌 사이의 공간적인 차이를 섬세하게 확인시켜주는 좋은 매개체였던 것이다.

하이얀 돌팔매같이/밝은 등불 뿌리며/이 어둔 황혼을 소리도 없이/기차는 지금 들을 달린다 <新村서>의 일부

모두들 눈물지우며/요란히 울고 가고 다시 돌아오는/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라

<야차(野次)>의 일부

갈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새로 두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추일서정>의 일부

5) 현대문명에 대한 태도

김광균은 그의 작품에서 도시어와 문명어의 잦은 활용과 함께 문명이 던지는 인상을 참신한 감각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현대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은 다소 미약했고, 김광균의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대문명 그 자체가 소재나 제재 적인 차원에서 주제형성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문명과 관련된 태도가 직접적이라기보다는 우회적이고 간접화된 표출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신호냐.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가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양 헝클어진채

사념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와사등(瓦斯燈)>

와사등은 소재나 주제 면에서 전반적으로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객관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이미지로 제시하는데 그치고 만다. 이 시에서 도시에 살고 있는 시인의 정서는 고독하며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끌려 가는 세계이다. 그는 신문명의 낯설음과 화려함 속에서 비애를 느끼며 방황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첫 연과 똑같은 시어를 반복하며 도시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지만 여기서도 결국엔 '슬픈 신호가 차단한 등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비판의식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자신의 주관적인 내면에 갇혀있어 조금도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뎃상>의 일부

눈은 정다운 옛 이야기/남몰래 호젓한 소리를 내고/좁은 길에 흩어져/

아스피린 분말이 되어 곱―게 빛나고

<눈 오는 밤의 시>일부

창백한 감상에 녹슬은 돛

대 위에/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줄기 부표는 적막하려니.

<오후의 구도>의 일부

카아네이션이 흩어진 석벽 안에선/개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산상정(山上町)>의 일부

위에서 ‘향료는 노을’과 ‘눈은 아스피린 분말’과 연결되어 있다. 와사등과, 위의 예로 든 시를 살펴보아도 우리는 김광균이 현대문명 자체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녹슬은 돛대’나 ‘카아네이션이 흩어진 석벽’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인공적 자연의 퇴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소재의 차원에 그쳤을 뿐 주제까지 확대되지는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김광균의 시는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 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도 없이 주관성에만 머무른 것 같아 보인다. 김광균이 이같이 주관성에만 머무른 것 같이 보인 이유는 우선 위에서 밝혔듯이 그가 모더니스트라기보다는 낭만적 감상주의자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그가 시작(詩作)의 초기단계에서 도입한 현대문명들이 내면의 감상성을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 처음부터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김기림이라는 당대의 탁월했던 모더니스트의 도움으로 현대문명에 관한 어느 정도의 안목을 획득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것이 관념적인 수준에만 머물렀을 뿐 실제 생활 속에서 그 필요성이나 절실함이 심각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들로 그의 작품 속에서는 문명예찬적인 면은 다수 드러나 있지만 문명 비판적인 면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3.김광균의 생애 찾아보기 되짚어 보기

김광균은 1914년 1월 19일 경기도 개성시 원종동 396번지에서 부친 김장훈씨와 모친 한순복씨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시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 출신이었으나, 부친이 집안의 곤궁함을 덜기 위해 상업계로 진출하면서, 일제의 허식을 벗어버리고 실리를 중시한 결과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된다. 남대문 근처에서 포목도매상을 크게 벌였던 관계로, 어린 시절 김광균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이처럼 넉넉한 살림살이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유년시절의 그는 처음 들어온 환한 전기불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꿈 많고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비교적 넉넉한 생활 속에서 살았던 그의 유년시절도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그가 12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몹시 추운 날 새벽 가게에서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쓰러진 아버지는 단 한마디 말씀도 없이 누워 계시다가 12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아버지의 나이가 48세였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집을 채권단에게 내어준 후 그의 식구들은 외가를 이사를 하였다. 이때부터 ‘자고 나면 무엇을 먹이느냐가 아니라, 오늘도 또 무엇으로 어린것들의 배를 채우느냐’가 가장 큰 관심인 고난의 날들이 이어졌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김광균은 1932년 송도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중앙 일간지인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발표하게 된다. 이후 졸업 때까지 그는 간간이 <동아일보>를 비롯한 중앙일간지 몇 곳과 기타 잡지 등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민병휘’씨였다. 그가 용기를 주며, 아는 작가 이야기. 서울 문단의 소식, 문학을 하려면 무슨 책을 읽으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당시 김광균의 독서 성향은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었다. 감상성이 짙은 낭만주의적 경향의 텍스트들을 즐겨 읽었다. 특히 그는 이 시절 일본 명치 말기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의 한 사람인 ‘이시카와 다꾸보꾸’의 문학과 인생에 매료되어 있었다.

또한 김광균은 이 무렵 ‘연예사’라는 구락부식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단체는 약 1년을 존재하다가 김광균이 직장을 얻어 군산으로 내려가게 됨으로써 해산된다.

1932년 상업학교를 졸업한 김광균은 1933년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취직이 되어 10월에 군산 공장 근무를 위해 내려가게 된다. 그는 군산에서 회사업무를 하면서 더욱더 시작(詩作)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 일간지에 연이어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22살 되던 해 함경남도 이원출신의 신부 김선희를 만나 결혼하고 고향인 개성으로 올라와 몇 달 동안 그 곳에서 신혼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개성에서 서너 달 보낸 이후 그는 다시 아내를 데리고 원근무지인 군산으로 내려가 공장에 복귀하고 더욱 창작활동에 매진한다.

그가 회사로부터 서울 본사 근무를 명 받고 군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여 올라온 것은 1936년 봄의 일이다. 처음 다옥동에서 혼자 하숙을 하다가 어느 정도 기반이 서자 곧 군산에 있던 부인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회사를 퇴근 한 후에 명동일대의 다방과 대폿집으로 향하여 당시 조선 문화 예술계의 젊은 시인, 화가들과의 안면을 넓혀간다.

1938년 초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의 투고작<설야(雪夜)>가 시 부분 당선작으로 선정됨으로써 그는 정식 등단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그는 아버지의 남은 빚을 다 청산하고 계동에 정식으로 집을 마련하여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불러온다. 그리고 남은 돈의 일부는 사업을 하던 동생에게 대주어 가족들을 부양하게 하고 자신은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이후 일제말기와 해방기를 거치는 동안 그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와사등>,<뎃셍>,<은수저>등이 모두 이시기에 발표된 것들이다.

1950년. 6.25의 반발은 그의 불타는 창작열을 꺾어놓게 된다. 전쟁이 나고 서울이 함락된 후 사업을 하던 그의 동생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서대문 감옥에 갇히게 되자 김광균은 9․28서울 수복이 있기까지 가족들을 돌보며 동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동생은 패주(敗走)하는 북한군들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서는 이후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동생의 납북으로 그는 그 후 30여년간 시단(詩壇)에서 떠나 사업가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는 동생이 경영하던 사업체를 물려받아 집안 경제를 책임진다.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서 사업가로서의 변신을 시도한다. 이후 그는 6.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자신의 사업체를 더욱 확장하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서 국제상위 한국위원회 감사와 한일경제특위 상임위원, 그리고 무역협회 부회장 등과 같은 굵직한 직책들을 차례대로 맡게 된다.

1961년 오래도록 병마에 시달리던 그의 모친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친이 사망한 후 줄곧 고생하신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죽음은 대단한 충격과 비탄을 가져오게 된다.

김광균은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이것은 그의 시 <국화>,<수반(水盤)의 시>,<다시 목련>,<목련나무 옆에서>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육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85년에 발표한 문집 제목을 어머니가 묻히신 와우산(臥牛山)으로 정한다.

동생의 납북이후 거의 중간하다시피 했던 문단활동을 1984년 『현대문학』지에 <야반>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재개한다. 그리고 그는 건강을 염려하여 경영하던 사업체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그 이듬해 1985년에 문단의 원로들의 모임인 <회귀>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작활동에 힘을 기울인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인 『추풍귀우』가 발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 후 그는 75세 되던 해 뇌혈전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약 5개월간의 투병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평소 종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항상 종교를 갖는다면 카톨릭에 귀의하겠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카톨릭에 대하여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투병하던 중 천주교 춘천교구장인 ‘장익’주교의 권유에 의해 카톨릭에 입문하게 된고 198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해에 그는 생전의 마지막 시집인 『임진화(壬辰花)』를 출판하게 된다.

그는 결국 악화된 건강을 이기지 못한 태 1993년 11월 23일 결국 80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유해는 평소 그의 뜻을 따라 와우산 자락 어머니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4.나오는 말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수, 신세대의 기수, 가장 성공한 이미지스트라는 숱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모더니스트가 아니다. 굳이 모더니즘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시작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나의 시에는 시각적, 회화적인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거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김광균의 시는 철저한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쓰여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시 세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당대의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창조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스트이다. 어린 시절 갑자기 찾아온 가족의 죽음과 함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런 그에게는 죽은 가족과 유복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내면 깊숙히 자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런 면이 의 시를 감상적으로 만드는 주 요인이 된다. 또한 김기림의 소개를 통해 만나게 된 화가들의 화풍이 그로 하여금 회화적인 시를 쓰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자신도 언급했다시피 김광균은 모더니즘을 의식하고 시를 쓰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회화적이고 도시적인 시를 쓰게 된 작가이다. 낭만적 이미지즘 시인 김광균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참고문헌】

김광균, 『와우산』, 범양사출판부, 1985

김광균, 『추풍귀우』, 범양사출판부, 1986

김광균, 『와사등』, 자유문학사, 1988

이무섭, <김광균론>, 강원대학교, 1990

김만성, <김광균론>, 충남대대학원, 1994

김난숙, <김광균론>, 경기대대학원, 1995

김명옥, 『한국모더니즘시인연구』, 한국문화사, 2000

김유중, 『김광균』,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