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리고 책

빛과 소리로 시쓰기/주경림시인 계간평

<自由文學 2009 봄호 계간평>

빛과 소리로 시쓰기

주경림(시인)

최룡관 ‘꿈새’ (自由文學 ‘08년 겨울호)

고미숙 ‘새장속의 새(’우리시‘ ’09 7월호)

박찬선 ‘바늘길을 베고’ (유심 ‘09 7-8월호)

황경순 ‘소리가 맛이 되고, 맛이 소리가 되고’ (‘미네르바 ’09 여름호)

김길애 ‘가재’((自由文學 ‘08년 가을호)

金進中 ‘모를 일이러니’(自由文學 ‘08년 겨울호)

1.들어가며

여름에 접어들며 自由文學 2008년 겨울호를 받았다. 타 문학잡지 2009년 여름호와 함께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일찍 내나 늦게 내나 그게 그거란 이치를 터득했다기보다는 판짠이가 한국 현대 시인 협회 이사장 일을 맡아 국제 회의를 여느라 손쓸 틈이 없었기 때문에 본지 편집일이 밀려나와 그렇다’는 申世薰 선생의 솔직한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일흔 호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었는데, 선생에게 합병호를 내는 편이 어떻겠냐고 권했던 필자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그다음이 필자에게는 문제였다.

계간평 원고 청탁을 구두로 받고 수락했는데, 원고 마감날짜나 분량, 내용에 관한 어떤 주문도 없었다. 마감날짜가 코앞에 닥쳐야만 써지던 습성 때문에 그 자유스러움이 도리어 짐이 되었다고나 해야할까. 그 자유스러움을 문학적 역량으로 십분 발산해내기에는 필자의 붓이 짧았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단지, 한 편의 시를 대했을 때, 언어와 행간, 그 여백의 숨을 뜻까지 일어내는 충실한 독자가 되고자 했다. 우리는 요즈음, 길거리나 혹은 지하철속에서 휴대폰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와 주파수를 맞추어 끊임없이 소통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시인의 시쓰기도 결국 가슴속에 무언가 주체할 수 없도록 차오를 때 감정을 여과시켜 언어를 빌어 소통하고자 함일 것이다.

2.메타퍼로서의 새의 궤적

꿈새가 포르릉 날아가면 푸른그물을 늘인다 그물 속으로 해가 날아들고, 달이 날아들고, 별이 날아든다 바람이 산이며 들이며 강이며 호수를 등에 지고 그물속으로 들어온다 그물속에 들어온 만물들이 저마다 빛을 뿌린다 시인이 호각을 불면 황홀한 빛들이 줄을 서서 행진을 한다 채색깃발을 날리는 행진 대오는 한 편 한 편의 시로 살아서 우리들 앞을 지나간다

-최룡관(중국 조선족 시인), ‘꿈새’

‘自由文學’을 펼쳐들자 시인이며 民調詩人 겸 문학평론가인 최룡관의 ‘시열편 特選’이 눈길을 끌었다. 열 편 모두 이미지의 화려한 변주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눈에 보이지않는 삶과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시적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펼쳐 보여주었다. 1차원에 머물렀던 필자의 시야도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꿈새’가 실존하는 새인가 아닌가는 문제될 것이 없어보인다. 생물학적인 새일 수도 있지만, 꿈을 가진 자는 모두 꿈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새’와 셋째 행에 등장하는 ‘시인’을 동격으로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필자는 꿈새가 포르릉 날아가며 늘인 ‘푸른그물’을 주의깊게 살펴보려고 한다. 그물속에는 해와 달, 별이 날아들고, 산․들․강이며 호수를 등에 진 바람이 들어온다고 했다. 곧 그물속은 갇혀 닫혀있는 세상이 아니다. 무한으로 펼쳐지는 우주와 대자연이 질서 정연하게 펼쳐지는 시공을 초월한 시적 대상이다. 거기에 ‘바람’은 ‘氣’로서 살아숨쉬는 역동적인 공간을 연출해 낸다. 이제 전체를 조망하던 사생적 풍경에서 카메라의 렌즈가 피사체에 접근하듯 그물속에 들어온 물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물속에 들어온 만물들이 저마다 빛을 뿌린다.’는 구절에서 그빛은 시인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시적 대상이 된다. 그빛을 받아 언어로 옮길 수 있는 자가 바로 최룡관 시인이다. ‘저마다의 빛’은 우주 운행 질서에 조화로운 섭리의 빛이며, 영성이며 낱낱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빛들은 ‘시인의 호각’으로 ‘채색깃발을 날리는 행진’을 하게 되는데, 결국 시인의 부름으로 ‘한 편 한 편’의 시로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다.

꿈새의 꿈이 시인의 언어라는 새질서를 얻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마치 동영상을 보고있는 듯 생생했다. 추상적인 내용을 무리없이 거뜬히 구체화시키는 시인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새장속의 새는

새장밖으로 고개를 쑤욱 내밀어

하늘을 쪼아다,

새장안에 쌓는다

하늘이 쌓이면

훨훨 날아가려고

-고미숙, ‘새장속의 새’

최룡관 시인의 '꿈새‘의 시적 대상이 우주 운행 전체였다면, 고미숙 시인의 ’새장속의 새‘는 제목 그대로 한정된 영역인 ’새장‘으로 좁혀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새장‘을 타의에 의해 갇혀 자유가 없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고미숙 시인에게 ’새장‘은 자유가 빼앗겨 탈출을 꿈꾸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훨훨 날아가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하는 능동적인 공간이다.

새장속의 새가 새장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은 자유가 그리워서가 아니다. 당장 하늘로 날 수 없으니, 하늘을 조금씩 쪼아다 쌓는 것이라고 발상 전환을 한다. 요즈음 시가 산문화하는 경향인데, ‘새장 속의 새’는 우선 재미있고 가볍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시인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어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 일상에서 ‘하늘을 쪼아다,’새장안에 쌓는다‘는 범상치 않은 초월적인 의미를 발견해냄으로써 문학적 낯설게 하기에 성공하고 있다. 시인의 心眼으로 본 선명한 이미지가 독자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고미숙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싯귀, ‘하늘이 쌓이면’이 눈길을 끈다. 소재는 자연이나 결국 인간 세상과 시인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우리 몸이 머물고 있는 지상은 비루하지만 예술․종교 혹은 학문을 닦음으로써 정신 세계만큼은 하늘의 본성을 닮아 훨훨 날아가고싶은 것이다.

3.마음 속 풍경이 빚어낸 敍景

비둘기소리 후줄근히 젖는

진종일 비오는 날이면

엄마는 반짇고리 난전처럼 펼쳐놓으시고

베갯모를 만드셨습니다.

쓰다남은 색색가지자투리천으로

모자이크하듯 베갯모를 만드셨습니다.

호박꽃이 담장을 밝게 비추면

어울려피는 엄마의 여름꽃밭

뒤웅벌이 윙윙거리며 화답을 합니다.

작은 조각이 어울려그려낸

머리맡의 아름다운 세상

티벳 스님의 만다라같은

無念의 공간이 자리잡습니다.

이쪽과 저쪽이 다른색천으로 마주한

가지런히 오고간 바늘길을 베고

나는 꿈을 꿉니다.

향기로운 꽃속에 포근히 잠자다가

길속에서 길찾는 꿈을

먼길 헤매다가

돌아오는 꿈을.

-박찬선 ‘바늘길을 베고’

‘2007 대한 민국 향토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박찬선 시인의 ‘바늘길을 베고’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삶의 정서가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다. 엄마의 반짇고리속에는 아직 눈뜨지 못한 꿈의 씨앗들로 난전이다. 엄마는 반짇고리 난전에서 시인이 언어를 찾아내듯 색색가지자투리천들을 골라낸다. 엄마의 바늘끝 손길따라 모자이크하듯 베갯모가 만들어진다. 시인은 그 베갯모에서 호박꽃과 뒤웅벌이 서로 화답하는 조화로운 상생의 여름꽃밭을 보아낸다. 시인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지않고 좀 더 깊어져 無念의 공간, 만다라까지 생각해낸다. 시인의 마음속 풍경을 그려낸 것이리라.

시의 중반부 이상까지 퍼즐 맞추기와도 같은 베갯모에 관한 설명이 계속된다. 그러다 초점이 그런 베갯모를 베고 시적 화자 쪽으로 자연스럽게 맞추어진다. ‘이 쪽과 저 쪽이 다른색천으로 마주한/가지런히 오고간 바늘길’이란 어떤 길일까. 읽는 이 나름대로 상상력을 펼쳐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마주한 길, 꿈과 현실이 오고가는 길,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길 등으로 자유롭게 상상하다보면 읽는 이도 절로 꿈길에 들게 된다. 박찬선 시인의 ‘바늘길을 베고’의 시읽기 매력은 바로 이런 흡인력에 있다. 엄마의 정성이 한 땀 한 땀 깃든 베개를 베고 자는 시인의 꿈길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길속에서 길 찾는 꿈’이며 ‘먼길 헤매다가/ 돌아오는 꿈’으로 편안한 잠자리가 될 것이다. ‘바늘길을 베고’는 결국 엄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평화로움과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각박한 세상에 읽을수록 행복해진다.

물봉선이 핀

숲에서는

모든 것이 맛있다

계곡물소리, 개미 발자국소리, 꽃잎의 떨림까지

소리가 온몸을 그러당기고

달콤쌉싸름한 냄새를 풍겨

분홍 물봉선꽃잎들

작은 입술을 열고 입맛을 다신다

물봉선이 핀

숲에서는

모든 것이 음악소리로 변한다

나뭇잎냄새, 벌레들의 냄새까지

분홍귀속으로 속속 빨려들어와

모든 것이 음악소리에 실려 하나가 된다

분홍빛 아득함속에서,

보이지않는, 욕심들까지 음악속으로 묻고

세상을 거꾸로 돌린다

숲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소리가 맛이 되고, 맛이 소리가 된다.

- 황경순, ‘소리가 맛이 되고, 맛이 소리가 되고’

박찬선 시인이 엄마의 바늘길 따라 이어지는 자투리천에서 여름꽃밭의 풍경화와 만다라까지 보아냈다면, 황경순 시인은 물봉선이 핀 숲에서 내면의 풍경화를 그려냈다. 모든 사물은 빛을 통하여 제모습을 드러낼 때 시인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맛과 소리고서 숲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과 세계가 독자앞에 펼쳐질 때 낯익은 풍경도 새로운 세상처럼 신비감을 느끼게 된다.

시의 소재가 된 물봉선은, 봉선화와 모양이 비슷하고 물가에 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꽃잎 3개 중 아래쪽 한 개에는 끝이 동그랗게 말리 긴꿀주머니가 달려있다. 황경순 시인은 분홍꽃잎을 입술에, 동그랗게 말린 긴꿀주머니를 귀에 비유하고 있다. 물봉선의 귀를 소리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빨려들게하는 강한 생명력 있는 존재로 그려낸다.

시인의 예리한 눈이 생태적인 특징을 잘 잡아낸 점이 돋보인다. ‘소리가 맛이 되고, 맛이 소리가 되고’를 읽다보면 계곡물소리․개미발자국소리․나뭇잎냄새․벌레들의 냄새가 가득한 숲에 와 물봉선의 자리에 서있는 듯하다. 즉, 시적 화자며 독자가 물봉선이 되어 자연과 교감하며 ‘숲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체험이다.

살아있는 것들과 나누는 이 눈부신 교감이야말로 시인의 특권일 것이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보이지않는 욕심들까지 음악속으로 묻고/세상을 거꾸로 돌린다’는 자기 淨化로까지 발전한다. 시의 소재는 자연이나 그것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결국 인간 세상인 삶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4.육신의 허물벗기

살 수 있을까

염려하며 플래스틱

물통속에 넣어두었다

가끔씩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줄 때면

나와 눈맞추곤 했다

며칠 전 가재는

제온껍질 허물벗었다

밤새도록 물통벽을 친 후였다

멍으로 온몸이 새파래진 가재

기진 맥진 물렁해진 가재

허물벗지 못하는 날 보며 웃는다

-김길애, ‘가재’

김길애 시인의 ‘가재’는, 시인은 사물들과 말을 나누고 그말들을 옮겨 적는 존재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일상적 소재를 바라보는 유머러스한 시선속에 뼈아픈 自省의 목소리를 담고 있어 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가재’는 단순한 형식으로 가볍고 쉽게 읽혀지는 시이다. 그러나 외형적 단순함은 보석같은 시정신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시인이 오랫동안 쌓은 내공의 결과이며 기교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시가 결코 쉽게 쓰여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첫연은 시인의 가재의 생명성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시작된다. ‘살 수 있을까’에 는 꼭 살려내고 싶다는 시인의 의지가 조심스럽게 담겨있다. 둘째 연에서는 가재에게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구체적으로 사육하는 장면이 드러나있다. 가재와 시인이 서로 눈맞추곤 하는 주관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시인이 가재를 돌보며 염려해주는 상황은 셋째 연, 起承轉結의 ‘轉’에 해당되는 가재의 허물벗기로 역전된다. 가재는 성장과 상처 회복을 위하여 여러 차례의 탈피를 한다고 한다. ‘밤새도록 물통벽을 친’다는 것은 몸도 커지고 새로워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이 아닐까.

‘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며 적절한 비유로 전체를 마무리한다. 시인의 바램이 또한 독자들의 바램이기도 한 공감을 나누기에 성공한 작품이다. 시인의 첫시집에 실린 표제작의 구절이 들어있기도 한 ‘무의도’를 다시 읽으며 충일한 詩情을 나누고자 한다.

뻘바깥으로 밀려나온

바지락이 해를 물고 있다

가슴이 훈훈해지길 기다리고 있다.

-김길애, ‘무의도’ 전문

여러 차례 껍질을 벗는 가재와 다르게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1회성의 허물벗기가 있다. 民調詩人 金進中의 ‘모를 일일러니’를 읽어본다.

눈부신 가을나절

빛살속으로 몸바꿔버린

그의 영혼은

어느 하늘가 풀꽃송이로

되살아날른지.

뜨락에 붉게 익는

동이감배꼽

숨 한 파람에

머무는 연기야.

흰옷과 고무신

쌀 한 홉의 눈빛영정,

흐르는 것이

바람만 아니라,

물만이 아니라,

모를 일일러니,

모를 일일러니.

-金進中의 ‘모를 일일러니’

金進中 시인은 民調詩의 리듬에 맞추어 죽음 또한 삶의 한 모습임을 노래하고 있다. 불가에서는 삶의 무상을 직시할 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닥쳐와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시인은 첫수에서 몸은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어느 하늘가 풀꽃송이로/ 되살아날른지.’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 의문은 긍정적인 위로의 말처럼 들린다. 인간은 죽어도 영원히 죽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주 만물의 소멸과 죽음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불가해질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숨 한 파람에/머무는 연기’처럼 곧 스러질 찰나에 불과한 생명의 덧없음을, 셋째 수 3․4조에서는 흰옷과 고무신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툭툭 던져 준다. 셋째 수 5․6조에 이르면 흐르는 것은 바람이나 물뿐이 아니라 우리 목숨도 흘러가고 있는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속뜻을 감추고 있어 그의미가 더욱 강조되는 효과를 갖는다.

우주의 질서, 자연의 운행이 그러하거늘 누구나 죽음앞에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주의 생명과 내 생명이 본래 하나이므로 ‘삶’과 ‘죽음’이 한그물로 엮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 수 6조에서 ‘모를 일이러니.’를 되풀이하면서 시를 끝맺는다. 생명은 우리의 얄팍한 앎의 알이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그무엇이기에 다시 숙연해질 수밖에. 마지막 6調의 거듭은 미완의 장으로 그 완성은 눈밝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金進中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法句經’ ‘華香品’을 인용해본다.

몸이 병들면 곧 시드는 것이

마치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같고

죽는 목숨 차츰 다가오는 것은

치물결이 세차게 달리는 것같네

- ‘法句經’ ‘華香品’에서

5. 끝맺으며

겨울호 계간평을 쓰는데 장마비가 쏟아진다. 번개와 천둥을 치며 하늘과 땅이 요란하게 소래내어 울고 있다.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문장가 韓 兪는 ‘만물이 平衡을 얻지 못하면 소리가 난다.’(‘不平卽鳴’)고 했다. 그가 어렸던 세 살 때 부모를 잃고 형수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불우한 환경이 그를 훌륭한 문장가로 길러낸 것이다.

우리도 안팎으로 정치적 경제적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다. 不平한 시기일수록 시인들이 독창적인 울음소리를 한껏 낼 수 있지 않을까. 한눈에 감탄하기보다는 음미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그여운이 오래가는 시가 그립다. 흑백 사진이 낡아갈수록 의미가 깊어지듯 담담한 감동을 주는 시를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