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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아침을 불러오는 긍정의 힘/황경순 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손옥자 시인

황경순 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문창2011년봄

아침을 불러오는 긍정의 힘

손옥자(시인)

나는 새벽이나 아침을 참 좋아한다. 상쾌하기도 하고, 공기도 신선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하루 중 가장 상쾌한 때는 아침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기분상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일까? 분명한 과학적인 근거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풀잎에 열리는 아침이슬이 증발하면서 마이너스 이온을 방출하는데, 그 마이너스 이온이 아침에 공기 중에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코르티코이드라는 부신 피질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코르티코이드는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는 호르몬인데, 우리 몸에서 이 물질이 가장 많은 분비를 하는 시간이 오전 6시에서 8시경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침에 유독 맑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말만 들어도 상쾌하고 기분이 좋은 이 ‘아침’이, 황경순 시인의 첫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에 편편이 들어 있다. 황경순 시인의 시편들은 모두 아침이었다. 긍정적이었다. 맑고 깨끗했다. 투명했다. 황경순 시인의 시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예쁘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살 만한 세상이라고 느껴질 뿐만 아니라,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것같이 상쾌하다.

강낭콩꽃들을 보면

주홍빛 입술이 생각난다

작은 입술들이

붉은 혀를 빼물고

오종종 모여

둥근 아치를 타고 오른다

가는 팔로 아치를 휘감고

허리도 다리도 길게 늘어뜨리고

발뒤꿈치까지 한껏 들고

눈을 감은 채 자꾸만 오른다

붉은 혀 내밀고

혀끝으로 맛보는

저녁노을, 참 맛있다

―「강낭콩꽃들의 사랑」 전문

참 예쁘다. 눈을 감고, 입술을 뾰죽 내밀고, 둥근 아치를 타고 오르는 예쁜 강낭콩꽃이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진다. 모두 싱그런 아침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되는 것이 ‘노을’이라고 하는 부정적 시어이다. ‘주홍빛 입술’ ‘둥근 아치’ ‘발뒤꿈치까지 한껏 들고’ ‘오른다’ 등의 긍정적 시어들 속에 ‘저녁노을’이라고 하는 부정적 시어를 끼워 넣은 것이다. ‘저녁노을’은 무엇인가? 저녁은 한낮의 끝이요, 노을은 해가 떨어질 때 생기는 현상이다. 절망, 어둠과 가까운 시어이다. 황경순 시인은 이 예쁜 아침들 속에 왜 부정적 시어를 갖다 놓았을까?

황경순 시인은 이 부정적 시어 ‘저녁노을’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노을’이 ‘참 맛있다’고 함으로써 아침의 틀 위에 갖다 놓은 것이다. 그래서 ‘주홍빛 입술’, ‘발뒤꿈치까지 한껏 들고’, ‘오른다’의 긍정적 시어와 한 몸이 되게 만든 것이다. 시인은 ‘노을이 참 맛있다’고 시각의 미각화, 공감각적 심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색채감과 맛깔스러움을 동시에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 대상을 긍정적 대상으로 끌어드리는데 성공했다. 다 끌어안고 가려고 하는 황경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는개비 휘적휘적 내리는 날

제비콩 넝쿨이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아슬아슬한 절벽타기를 한다

고개를 앙증맞게 쳐든 분홍꽃들을 주렁주렁 달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어이 하늘까지라도 올라갈 기세다

줄을 타고 몸을 배배 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위로만 향한다

저런, 젖먹던 힘을 다할 때가 있었던가

눈이 번쩍 뜨인다

하루를 충분히 적시고도 또 내리는 비,

제비콩 넝쿨은 내일 아침이면 분홍꽃잎이 더욱 영롱해지고

짙푸른 잎들은 더욱 선명해지겠지

―「절벽타기」 전문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절벽타기를 했던가? 올라서고 나면 또 다른 절벽, 올라서고 나면 또 다른 절벽이 언제나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화자는 비 오는 날, ‘제비콩’이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아슬아슬한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본다. 그런데 여기서도 황경순 시인의 독특한 시각이 발견된다. 다른 시인들은 보통, 절벽 앞에서 피땀을 흘리거나 수없는 절망을 한다. 그러나 황경순 시인은 그 기막힌 절벽 앞에서도 재밌게 리듬을 타게 만든다. “고개를 앙증맞게 쳐든 분홍꽃들”이라고 했는가 하면, 그 기막힌 절벽을 타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라고 표현함으로써, 절벽이라고 하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거니 뒤서거니”라고 하는 운율적 효과까지 집어넣어, 삶의 발자국을 경쾌한 박자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지까지 발휘하고 있다.

긍정적 사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기막힌 절벽을 탄 “제비콩 넝쿨은 내일 아침이면” 지쳐서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분홍꽃잎이 더욱 영롱해지고/ 짙푸른 잎들은 더욱 선명해”지게 만듦으로써 시 전체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명쾌하게 절벽 타기에 성공하게 만든다.

샛노란 유정란

바다로 뚝 떨어진다

금방

붉은 빛

화색이 돈다

새 생명이 탄생한다

끝없이 넓고 붉은 바다

포근하고 따뜻한

어미의 품에서

―「노을 속 탄생」 전문

제목뿐만 아니라, 시 전체가 역설이다. ‘죽음’의 이미지를 ‘탄생’의 이미지로 바꿔버린 「노을 속 탄생」은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샛노란 유정란’이라고 표현한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해가 바다로 떨어져 곧 닥쳐올 막막한 어둠 앞에서 화자는 천연덕스럽게 바다가 “화색이 돈다”고 표현을 한다. 기막힌 역설이다. 화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낮 뜨거웠던 해를 먹어치운, 깨끗이 꿀꺽 삼켜버린 부정적 바다를 화자는 “포근하고 따뜻한 어미의 품”이라고 한다. “포근하고 따뜻한 어미의 품”은 어디인가? 양수, 자궁이 아니던가? 자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의 근원, 탄생의 의미가 아니던가?

바로 그것이다. 화자는 다 끝나버린, 절망적인 어둠, 폐쇄된 공간을,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희망으로, 열린 공간으로 전환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황경순 시인이 만들어 내고 있는 아침인 것이다.

3월초 샛강에 별이 뜬다

꽃샘 추위에 별자리 하나 새로 생겼다

꽃밭자리, 사계절을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얼음밭에 뜬다

수레바퀴처럼

동그랗게 방사선으로 뻗어

매화, 무궁화, 코스모스, 동백이 하얗게 피고, 얼어붙은 내 마음에도

방사선에 이끌려 별 하나 뜨고 있다

매화꽃 점점이 뿌려진 매화마을,

무궁화 동산,

코스모스 꽃길,

동백꽃 핀 바닷가 한꺼번에 모셔와

언 강에

꽃밭자리

뚜뚜뚜뚜

봄을 부른다

―「해빙기」 전문

위에서도 말한 바가 있지만, 황경순 시인 시의 특징은 한 시편 안에 긍정적 시어와 부정적 시어가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빙기」에서도 마찬가지다. 3월초라고 하는 긍정적 계절(봄) 앞에 얼어붙은 겨울강을 등장시킨다. 흘러야 마땅할 그 강이 다 얼어붙어 있다. 강만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세상도, 화자도,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런데 얼어붙은 화자가 그 얼어붙은 강을 내려다보니, “동그랗게 방사선으로” 금이 가 있다. ‘아하, 봄이 오고 있구나’ 화자는 생각한다. 닫힌 공간을 열 기회가 왔다. 그 금이 간 자리마다 화자는 “매화, 무궁화, 코스모스, 동백”을 그려 넣는다. 그것들이 꽁꽁 언 세상에, 화자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화자의 마음이 녹고, 세상이 녹고, ‘해빙기’다. 그러자 “얼어붙은 내 마음에도” “별 하나 뜨고”, 빛나는 “별 하나” 내 마음에 띄우고 나니, “매화꽃 점점이 뿌려”져 “매화마을”이 되고, “무궁화동산”이 되고, “코스모스 꽃길”이 되어, “언 강에” 단번에 “꽃밭자리”를 만들어 버린다. 긍정의 힘이다.

일본의 가와무라 노리유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흑백 돌로 게임을 하는 오델로 게임과 같다. 이 게임은, 검은 돌이 압도적으로 많아도, 흰 알 몇 개만 있으면 전세를 뒤바꿀 수 있다”

긍정의 힘, 황경순 시인의 첫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를 읽으면서, 얼음 깨지는 소리를, 봄을 부르는 기상나팔 소리로 둔갑시키는, “뚜뚜뚜뚜” ‘해빙기’의 의성어가 독자여러분 가슴에도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이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