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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봄/윤정구, 이수영, 황경순 시인의 작품/권현수 시인

윤정구, 이수영, 황경순 시인의 작품

권현수

(시인)

봄은 생명이며 희망이고 젊음이며 이상이다. 어김없이 당연히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 예사로움도 죽은 땅에서 쑤욱솟아오르는 새 순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로움을 막을 수 없고, 새벽잠을 깨우는 뜻밖의 새소리에 문득 일어나 창문을 열 때의 설레는 마음을 달랠 수는 없다. 바로 많은 시인들이 기다리는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넘쳐남이라는 워즈워스의 말 그 자체이다.

그러니 남보다 더 밝은 눈과 귀를 갖고 더 많이 교감하는 예술가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면서 봄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시인들은 고수들과의 소비적인 경쟁으로 자신의 예술혼을 시험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짐짓 이라는 오브제를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난 여름호 문학과창작에 유난히도 그 만물이 소생하는봄이라는 평범한 오브제에 정면 도전한 시를 세 편이나 읽을 수 있어서 여간 놀란 것이 아니다. 요즘 알 수 없는 슬럼프에 빠져 허덕이느라 마음고생이 심한 내게 어깨를 후려치는 죽비소리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 제대로 가고 있는 프로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날마다 끓이는 된장국도 생전 처음 끓이는 것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프로 주부의 마음 자세인 것처럼 흔하디 흔하고 세대를 이어가며 빛나는 작품들이 쌓여 있는 오브제라 하더라도 처음 보는 신선한 오브제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잡아 앉힐 수 있는 여유, 그 자신감이 바로 프로 시인으로서의 책무이고 특전일 것이다.

, , 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모든 것이 끝났다

고 생각하는 순간

어머니의 봄이 온다

읽지 않은 책처럼

두툼한 얼음장이

뒤란 응달에

황소처럼 누웠는데

양달에는 검은 흙이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가슴을 드러냈다

엄마다! 하고

뾰족한 송곳같은

비비추 잎새말이가

쏘옥! 손을 내민다

성냥불처럼 켜진

작은 잎새 하나로

어머니 웃으신다

우주가 다 환해졌다.

윤정구, 어머니의 부활절(문학과창작2011년 여름호)

윤정구 시인에게 있어 봄은 어머니다. 부활하신 어머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고 생각하는 순간믿을 수 없는 손짓으로 쏘옥! 손을 내미는다시 살아나신 어머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그 어디에도 기댈 언덕이 없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 응달의 얼음장. 그 얼음장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한 여유만만한 시인은 읽지 않은 책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시인과 자주 만나고 함께 어울리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서 어쩌다 한번쯤 먼발치에서 보게 될 때면 조선 사대부 기상이 엿보이는 선비 같다라는 느낌을 받곤 하였다. 그것은 많은 시인들이 북적대는 모임에서 가까이에 있는 책 한 권 뽑아 들고 초연하게 앉아 읽고 있던 어느 날의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읽지 않은 책이라는 구절을 보면서 나도 몰래 역시!’라는 감탄사가 나온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시는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나왔으리라.

그러나 선비 같은 시인도 응달이 아닌 양달, 다 읽어버린 책을 던져버리고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가슴을 드러낸양달의 뾰족한 송곳 같은 비비추 잎새말이를 보고는 엄마다!” 하고 어린아이같이 환호성을 지른다. 봄인 것이다. 봄이 마악 눈비비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한 걸음 나래를 펼 때 쯤, 그리고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에 주눅이 든 산야에 첫 붓질을 쓰윽 할 때쯤, 그 여린 연둣빛 눈웃음을 본 사람은 정말 봄이 왔구나!’라고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그 소리가 바로 어머니의 기척을 고대하던 아이가 멀리서 들리는 어머니의 발소리에 엄마다!” 하고 외치는 탄성과 꼭 같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윤정구 시인의 봄은 그래서 성냥불처럼 켜진 작은 잎새 하나로” “우주가 다 환해진것이다. 그 봄에 활짝 웃으시는 부활하신 어머니이다.

봄은 한 마리

입이 큰 짐승

겨우내 웅크려 껴안고 있던

새끼를 토해 놓는다

비틀거리며 눈도 바로 못뜨는

겨울을, 봄은

하염없이 핥아주고 있다.

이수영, 우수절(문학과창작2011년 여름호)

여기 또 한 사람, 봄이 어머니의 숨결이라고 느끼고 지켜본 시인이 있다. 이수영 시인에게 있어 길고 추운 인고의 겨울은 방금 갓 태어난 비틀거리며 눈도 바로 못 뜨는한 마리 짐승의 새끼다. 그리고 기다리던 봄은 그 갓난새끼를 하염없이 핥아주는어미다. “입이 큰 짐승이다

이수영 시인은 그녀가 시인인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사람도 시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하는 천성의 시인이다. 이미 금빛 해를 마중할 때』 『어머니께 말씀드리죠등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시력 20년을 바라보는 시인은 마치 은화를 연상시키는 감성으로 은화의 광채와 가치도 값지지만 은화의 양면인 겉그림과 뒷그림을 포개서 화해의 감동에 잠길 수 있게 하는 서정시인이다.”(박제천 시인)

이렇듯 한국 여성 서정시인의 맥을 잇고 있는 이수영 시인의 봄은 한 마리 입이 큰 짐승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짐승은 죽음의 겨울동안 그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모의 품속에 소중한 새끼 한 마리 웅크려 껴안고있는 사랑과 화해의 겨울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어렵게 태어난 새끼를 하염없이 핥아주고 있는 어미. 봄은 그렇게 입이 큰 짐승이다. 움추린 어깨를 펴지 못하게 하던 긴 겨울을 지나고 어느 날 문득 이마에 내려앉은 봄햇살의 따뜻한 기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숨결임을 느낄 것이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엄한 평원의 한가운데서 뜨거운 고통 속에 갓 낳은 제 새끼를 온 정성을 다해 핥아주는 한 마리 입이 큰 짐승의 혀를 연상하고 있다. 봄 햇살과 어머니와 짐승의 따뜻한 혀. 시인의 연상 작용이 어느 곳을 지향하는지 훤히 보이는 조합이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엄숙한 섭리 속에 봄은 또 오고 어미는 새끼를 낳아 기른다.

이수영 시인은 함께 발표한 또 한 편의 시에서도 연속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새끼를 돌보고 있는 봄의 눈길을 천작하고 있다. “어미의 힘은 예방주사이고” “무릎 꿇는 법을 가르치며” “새끼의 귀를 잡아끌며시인의 봄은 그래서 어머니 그 자체이다.

쑥은 봄웃음이다

겨우내 움추렸던 땅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고

땅을 밟는 사람에게도 활짝 웃어준다

보송보송한 솜털로 땅도 간지럽히고

쑥 뜯는 사람의 손바닥도 간지럽히며

향기로움까지 얹어 봄바람도 웃긴다

누가 쑥대밭이라 했지?

누가 쑥스럽다고 했지?

잡초들도 아직 덜 깨어난 이른 봄

쑥들이 예서제서 웃는 법을 가르친다.

쑥무리로 쑥절편으로 쑥찜으로

수천 년 받들어온 힘을 모아

주는 법을 가르친다

흐뭇한 미소 전수 받고 쪼그리고 앉아

가장 먼저 핀 쑥 밑동을 똑 따도

그저 하얗게 웃고 있는

봄 쑥!

황경순, 봄쑥처럼(문학과창작2011년 여름호)

이제 막 등단 5년을 맞이하는 신인 황경순 시인은 봄이 왔다는 수많은 징조 중에 하나, 자신을 쏘옥 빼닮은 봄쑥에 시선을 멈추고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땅에게도”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고” “가장 먼저 핀 쑥 밑동을 똑 따도그 위를 무심하게 마구 짓밟아도 무조건 그저 하얗게 웃고있다. 그래서 황경순 시인은 쑥은 봄웃음이다라고 정의한다.

사실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는 지금 춘궁기라는 낱말은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우리 역사 속 힘없는 민초들의 대부분은 끔찍한 춘궁기를 해마다 겪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잡초들도 아직 덜 깨어난 이른 봄” “보송보송한 솜털의 쑥을 보물처럼 캐어서 그 허기를 채울 수 있었으니 쑥은 당연히 봄웃음이 될 수밖에 없다.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밑동까지 똑 따도 하얗게 웃으며 다시 피어나 굶주린 서민들의 웃음이 되어주는 쑥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쑥무리로 쑥절편으로 쑥찜으로 수천 년을 받들어올 수밖에 없는 쑥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 쑥은 봄의 웃음소리인 것이다. 굶주린 속에 겹겹이 쌓은 궁기를 활활 벗어버리고 마음껏 큰소리로 웃으며 그 소리 따라 날개를 달기라도 한 듯이 날아가고 싶은 환희의 웃음소리다.

봄은.

그런데 누가 쑥대밭이라고 하지?” “누가 쑥스럽다고 하지?” 웃긴다. 시인은 지금 그런 사치스런 말을 만들어 낸 누군가에게 팔 걷어붙이고 시비라도 걸고 싶다. 가난한 서민들이 춘궁기를 넘길 수 있는 소중한 식량이 될 뿐만 아니라 잘 말려서 두고두고 갖가지 음식의 맛을 더할 뿐만 아니라 아픈 팔다리 허리 고루 쑥뜸으로 다스려 주기도 하는 그 소중한 쑥을 감히 함부로 대하다니 말이다. 커다란 물음표 두 개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어서 못내 아쉬워하는 시인의 속내가 훤히 보인다.

시인의 첫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의 해설을 맡은 박제천 시인은 황경순 시인을 단호한 메시지 속에서 자연과 사물의 속내를 감각적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신선한 눈매며 그 바닥에 숨겨진 비밀을 들추어내는 매력적인 연출과 눈부신 함의에 감탄을 거듭했다고 밝히고 있다. 시인들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봄쑥처럼 환하게 웃는 시인의 그치지 않는 풍성한 시업을 지켜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