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리고 책

공감각적 심상을 통한 인간미 추구/황경순/이보숙 『목련나무 어린 백로』시집리뷰

이보숙 시집 『목련나무 어린 백로』

공감각적 심상을 통한 인간미 추구


황경순(시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한 상태에서 바쁘게 지내던 중 이보숙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분주한 마음에서인지 시의 내용들이 한눈에 쏙쏙 들어오기 보다는 익숙한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들에 대한 재확인과 탐구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보숙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공감각적 심상(共感覺的心像)이 시인 특유의 표현 방식으로 잔잔하게 표출되어 경이로운 순간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집 전편에 소리와 빛, 모양, 음악, 미술, 건축 등의 다양한 영역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예술의 집합체를 이루었다. 그 속에서 시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치 시인의 마음에 잔잔히 흐르는 샘물을 들여다보는 것같았다. 그 샘물에 어리는 그림과 가락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마음이 그대로 눈에 남는 것같았다. 그때문인가, 시인이 내세우는 음악과 명화들은 대부분 눈과 귀에 익은 작품들이지만 시인을 통해 새롭게 형상화되었다.

더불어 시집에서 새로이 만난 작품들을 찾아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물론 소양이 풍부한 분들은 더욱 손쉽게 작품의 의미와 시인이 발견하는 의미에 더욱 밀도 있게 빠져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1. 천상을 향한 동경과 자아의식 확대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천상을 동경하는 시인의 신앙적 믿음과 세상을 달관하고 싶은 자아반성, 즉 욕망의 절제미가 일품이었다. 1부에서는 특히 천상의 이미지가 가득차 있었다. 일상에서 발견된 성스러운 장면의 추구와 더불어 명화들이 떠올려지고, 하나의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전이시켜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즉 공감각적 심상이 전편을 장식하고 있었다.


중죄를 지은 아버지가 로마 감옥에 갇혔다

아버지에게 내린 벌은 굶어 죽는 것

뼈만 앙상하게 남아 금시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늙은 아버지에게 윗옷을 풀어헤치고

딸은 젖을 물렸다

눈도 못 뜨던 아버지는 날마다 젖을 빨아

기운을 찾아가고 있었다

검은 누더기를 걸친 아버지의

긴 수염이 가리고 있는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고

부끄러움을 잊은 딸은

갈색 머리결이 어깨 너머로 출렁거리고

붉은 옷은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나의 눈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빨며 소생하는 듯

하늘에서 천사의 나팔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

찬란한 천상의 광경이 떠올랐다.

*루벤스의 그림 「젖먹이는 여인」

―「천상의 광경」 전문


아버지는 두 손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감싸안는다/ 아버지의 한쪽 손은 어머니의 손이어서/ 작고 부드럽다 자비한 손이다/ 아버지의 또 한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어서 크고 우람하다/ 용서와 포용의 손이다/ 질시하는 장남의 눈총을 받으며/ 작은 아들을 품에 안는 손/ 하느님만이 가질 수 있는 두 개의 손/ 이럴 때의 아버지는 곧 하나님이다.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의 손」 전문


루벤스의 그림은 익히 보아온 작품이다. 한 여인이 늙은 남자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어서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것으로도 논란이 많은 작품이지만 감옥에 갇혀 굶어 죽는 형벌을 받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의 숭고한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교육자료로도 많이 언급되는 이 작품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었지만, 마무리 부분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라는 루벤스의 다른 작품을 떠올리며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먹으며 부활을 하는 듯 성스러운 장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 한 편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그림을 함께 도입해 작품의 성취도를 한껏 높여놓았다.

개인적으로 렘브란트의 섬세한 빛의 묘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렘브란트의 손」에서는 돌아온 둘째 아들의 등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 속에 엄하면서도 포용력 있는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발견해내는 시각이 놀랍다. 또한 부모님의 사랑을 뛰어넘어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는 더 큰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초월적인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욱 뜻이 깊다.


2. 공감각적 심상을 통한 카타르시스


앞에 소개한 작품들이 명화들을 보고 쓴 시이지만, 2부에서도 역시 명화와 명곡의 행진이 이어진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에 그치지 않고 두 가지가 협연을 이루어 새롭게 쓴 교향시, 음악이 흐르는 섬이 조화를 이루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림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하면서 보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바위와 숲으로 뒤덮여 있는 곳에서

가느다란 첼로의 선율이 길게 뻗어나가고

아주 작은 음색의 팀파니가

둥둥 박자를 맞추어주고 있다

하프 소리로 검은 바다 위를 맴도는

파도소리가 적막하다

햇빛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곳

덩치 큰 바위에는 관이 들어갈 만한 구멍들이

질서 있게 뚫려 있다

바위 앞 쪽으로 흰 비석이 몇 개 보이고

섬은 바다 위에 호젓이 떠 있다

나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를 들으며

어딘가에서 본 듯한 그림에 빠져들고 있다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다

언젠가 내가 살았던 섬이다.

*죽음의 섬 : 독일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명화

―「다시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전문


옥색 사기 사발에 담긴 뿌연 액체/ 아줌마, 이 물 마실까요?/ 어머나 얘야 안된다, 그건 양잿물이야 // 그 시절 나의 목숨을 구해내느라/ 신神은 이웃집 아주머니를 보내주셨다 // 박수근의 빨래터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수다가 귓가에 쟁쟁하다.

―「박수근의 빨래터」 부분



별들은 갖가지 악기를 연주한다/ 그 중에도/ 은빛 별은 은빛 피아노 소리를 낸다/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의 작은별 변주곡을 연주한다/ 열두 대의 피아노가 합주를 한다/ 열두 개의 변주곡을 차례로 연주하는 동안/ 별들의 색깔도 차례로 변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을 듣다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다/ 은빛 피아노 소리를 내는 은빛 별을 생각한다/ 은빛은 아름답고 슬픈 소리의 샘이다.

―「작은별 변주곡」 전문


시인은 독일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명화 「죽음의 섬」을 보고 라흐마니노프가 감동하여 작곡을 한 심정으로 돌아가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고, 독자들에게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한다. 그 섬은 바로 시인이 살았던 섬, 또 모든 사람이 살았던 섬, 또 앞으로 가야 할 섬이 아닐까? 그래서 아르놀트 뵈클린도 1점만 그린 것이 아니라 5점을 그렸다고 하니, 나약한 사람들에게는 근원도 되고 미래가 되는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외국 그림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박수근의 「빨래터」 그림을 보며, 그림 속의 여인들의 수다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그림을 보면서 또 다른 그림을 그림과 동시에,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의 말이 귀에 들려오고, 아주머니들 덕분에 살아남은 삶의 고비를 떠올린다. 예술 작품은 객관적으로 공감을 주어야 하지만, 주관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와 클로즈업됨을 잘 보여준다. 삶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작은별 변주곡」은 동요로도 알려져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노래이다. 최근 이 변주곡을 작년 내내 접하며 관현악기와 피아노, 멜로디언, 그리고 타악기 등 오케스트라를 접하며 그 곡의 매력에 빠져 살았는데, 이보숙 시인의 시를 보는 순간 그 진가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별들이 연주하는 악기, 은빛 별이 내는 은빛 피아노 소리, 시인은 열두 대의 피아노가 연주할 때마다 빛깔이 바뀌고 소리가 바뀐다고 했다. 열두 대의 바이올린이 연주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다른 악기도 그럴 것이다. 열두 개의 변주곡이 두 배, 세 배, 악기의 수에 따라 무수히 확장되어 은하수가 되고 은하계가 되어 세상을 모두 별빛으로 가득 채운다. 그런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의 세계에 다다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여! 너, 슬픔이여!”


남프랑스의 흰색 바람은 구름의 방향을 바꾸어 놓고

자작나무 잎새들을 흔든다

희고 노란 숲으로 에워 싸인 크로장 마을에

초록빛 전나무잎이 하늘거린다 초록빛 바람은

세델강가의 붉고 검은 바위들이 말하는

전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세델강가」

―「세델강가에 부는 바람」 부분


이 시는 피카비아 그림의 강렬한 노란색을 다른 색채들과 대비하여 잘 묘사하고 있다. 이 강렬한 노랑은 새로움을 상징할 수도 있고 신세대, 신사조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 전쟁이야기를 들려주는 붉고 검은 바위들, 초록색 나무들, 흰색 바람 등이 또 다른 대조를 이루며 새로운 사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파괴를 뜻하는 전쟁과 노랑, 희망은 공존이 가능하므로,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시인은 소리와 빛, 형체를 형상화한 음악과 그림을 주 매개체로 세상을 재해석하고 인간 삶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3. 무한 공간으로의 자아의식 확대


이보숙 시인의 공감각적 심상은 여기에서 끝나질 않는다. 끊임없이 확장을 거듭하여 무한한 공간으로 확대시키는 매력을 발산한다.

외계인도 사랑하다 연인을 잃고/ 얼어붙은 연못 하나 가득/ 시들은 연잎으로 기하학 무늬를 풀어놓고/ 아직 덜 떨어진 연밥으로 쓴 방정식을 펼쳐 놓고/ 혼신을 다해/ 생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 애쓴 흔적을/ 볼 수 있다


덜 얼은 물가에선 오리도 물숲을 헤쳐 가며/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남기며 놀고/ 원앙도 메마른 연줄기가 그려 놓은/ 추상화 위에 입맞춤을 한다

―「오부실 마을의 외계인」 부분


푸른 섬 저 멀리 내다보면 보일까/ 나도 목을 빼어 보지만/ 보이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꿩 울음만 간간이 들리고/ 뻐꾸기가 얄밉게 박자를 맞춘다.

―「산굼부리 가는 길」 부분


오부실 마을의 호수에 외계인이 내려와서 사랑의 방정식을 풀다 갔단다. 추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아름답다는 호수의 풍경이 세밀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몰하게 되지만, 아름다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외계인의 도입은 시인의 의식 속에 무한히 확대되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어 발상이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다.

「산굼부리 가는 길」에서도 사물을 보면서 시각에서 청각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 신선하고 재미있다. ‘푸른 섬’은 우리 모두의 이상향이기도 하지만, 인류 모두가 추구하는 것보다는 “보이라는 사람”이 개인에게는 더욱 중요할 뿐이다. “뻐꾸기 소리가 얄밉게 박자를 맞춘다”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인생을 관조하면서도 적당히 포기하지 않고, 인간적인 냄새가 풍겨서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나의 삶에도 감추어졌던 빙산의 보석들이/ 둥실 떠오를 때가 있다 //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냉정한 물속에 떠돌면서/ 내 안에 생긴 빙산의 무리들이/ 새벽별처럼 빛을 낼 때가 있다.

―「나의 바다에 떠도는 빙산」 부분


월계수 잎은 나이를 먹어도/ 은은한 향기만은 잃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내 노년의 모습이다 // 온 세상이 더러워지고 먼지로 가득 찬다 해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아비뇽의 월계수 더미에 달려 있는/ 청동허파로 숨을 쉬기 때문이다.

―「청동허파로 숨을 쉬다」 부분


먼 나라, 먼 지방으로

소금과 차를 팔러간 남정네를 기다리는 마음이

소금처럼 졸아 든다

해만 뜨면 등이 휘도록 물지게를 져 나르는 처녀애는

수억 년 전 먼 옛날

파도가 밀려왔을 바닷가에 서서

가물가물한 지평선 너머로

행여나 들려올까

말발자국 소리에 귀를 모은다.

―「차마고도茶馬古道 ―염전」 부분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무덤덤하게 또는 적당히 포기하고 사는 때가 많다. “감추어졌던 빙산의 보석들이 둥실 떠오를 때”가 있으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고 산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이 가는 시다. 매일 냉정한 물 속에서 떠돌며 사는 우리가 아닌가? 그러다 문득 반짝이는 새벽별을 발견하고 또 살아갈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청동허파로 숨을 쉬다」라는 시는 아비뇽의 어떤 조각가의 작품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월계수 잎처럼 나이를 먹어도 은은한 향기를 잃지 않는” 노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세에도 마음은 이십대라고 한다. ‘청동허파’는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지우제페 페노네’가 표현한 작품도 대단하지만, 그 작품과 함께 영원히 숨을 쉬는 시인의 시선이 얼마나 대단한가?

‘차마고도’ 연작시리즈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들 또한 인간적인 따뜻함이 감동적이다. 특히 「차마고도―염전」에서는 수억 년 전부터 형성된 소금을 만들면서 물지게를 져 나르는 여인네들의 한이 느껴진다. 이렇게 시인은 사물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확대하여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감동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한다.


이보숙 시인은 1992년 『문예사조』에 당선되어 시집 『새들이 사는 세상』 『코코넛 게』를 출간하였고, 이번에 세 번째 시집 『목련나무 어린백로』를 상재하게 되었다. 2010년에는 「별을 만드는 여자」외 4편으로 『문학과창작』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평소의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을 모임에서 가끔 뵙다가 시집 리뷰를 하고 보니, 음악과 미술에 대한 소양이 놀라웠고, 다양한 여행지에서 본 것들을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표현해 낸 역량이 돋보여서 더욱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