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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고향의 떡

백설기와 고향의 떡 이야기

 

떡 중에서 백설기를 좋아한다. 물론 다른 떡들도 몇 가지 좋아하지만, 어렸을 적 자주 먹던 백설기의 그 쫄깃쫄깃한 맛이 늘 생각이 난다. 올해도 24일날 책걸이를 했는데 백설기를 해서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엄밀히 말하면, 백설기는 아니다. 무지개떡으로 했으니, 색깔을 넣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라 그런지 꿀떡 등 단 것만 좋아할 것 같던 아이들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참 뿌듯했다.

내륙 지방이 고향이고 논농사를 주로 지었던 고향 마을에는 큰일이 있으면 늘 떡을 했다. 설날 흰 가래떡을 큰 가마솥에 쪄 내면, 쳐 내자 말자 할머니와 큰어머니, 우리 어머니, 작은어머니는 그 떡을 만지작거려서 긴 가래떡을 만드셨다. 그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감탄을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손만 대도 뜨거워서 뒤로 물러서야만 했는데, 우리의 어머니들은 뜨겁지도 않은지 잘도 매만지셨다.몇 개만 완성이 되면 어른들부터 시작해서 한 개씩 조청에 찍어 먹고 나서야, 그 구경거리는 멈춰지곤 했다. 배가 불룩해졌으니까.

동시에 우리 고향에서는 또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또 절편이었다. 하얀 절편과 쑥절편을 쪄서 길고 납작하게 매만진 다음 떡살로 무늬를 찍어서 칼로 싹둑싹둑 자르셨다. 그런 다음, 참기름을 발라서 먹는 맛은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조청까지 찍어 먹으면 뭐 금상첨화였다.

그리곤 한 쪽에선 남자어른들이 떡메를 쳤다. 찰떡을만드는 것이었다. 찰떡이 완성이 되면, 고소한 콩고물이나, 거피 팥고물을 묻혀서 또 몇 개씩을 먹고나서야 구경을 멈추곤 했다. 그 고소한 맛! 상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

설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를 정초라 해서, 농삿일을 쉬면서 돌아가면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끼리, 어머니들은 어머니들끼리, 처녀 총각들은 합쳐서, 아이들은 또 또래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윷놀이를 가장 많이들 했다. 모임에 참석하려면 꼭 쌀이나 곡식을 일정량 추렴을 한다. 이긴 팀은 덜 내고, 진 팀은 더 내서 떡을 해서 또 한바탕 놀곤 했다.

단옷날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는 않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까지만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이사를 했으므로, 단오의 시골 풍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예닐곱살 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단오도 아주 큰명절이었다. 쑥절편을 하거나, 쑥버무리를 해서 먹었고, 궁기라고 하는 풀을 물에 담궈 머리를 감았다. 표준말은 창포물인 듯 한데 우리 고향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네뛰기를 어찌 잊으랴? 마을 제일 뒷쪽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수호신 느티나무 한쌍에다 그네를 매었다. 새끼줄을 여러겹 꼬아서 만든 튼튼한 줄과 잘 깎은 나무로 받침대를 만들어 그네를 메고, 동네 여자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옷을 차려입고 그네를 뛰었다. 나도 그네는 참 잘 뛰었다. 어려서 남자들 못지 않게 나무도 잘 타고 재빨랐던 나였기에, 그네가 나뭇가지를 넘도록 높이 뛰어 칭찬을 듣곤 했다. 참 지금 생각해도 당찼던 나였다. 그네를 타면서 바라보는 동네쪽은 너무 정겨웠다. 반대로 뒷쪽을 보면 언덕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해 보였고, 좀더 뒷쪽 왼편으론 내성천이 굽이쳐 흘러내려가고 있었고, 오른쪽은 꽤 험한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산골짜기의 녹음이 코끝으로 한층 다가왔다. 그야말로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산 것이 내 시의 밑바탕을 이루었으면 좋으련만....

동네 반대쪽으로 해가 지는 장면.

산과 강, 골짜기, 실개천이 보이는 언덕에 느티나무가 있다.

퍼 온 사진인데. 이 느티나무들이 600여년 된 느티나무이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에서 가끔 시골의 그 그네가 생각나곤했다. 도시로 이사오곤 나서는 학교 운동장에 쇠로 된 그네는 시골의 그 나무 그네만큼 운치도 없었고 재미도 덜했다. 물론 내가 살던 집 옆에 커다란 수양버드나무가 있었고, 실개천이 흘렀을 때는 거기다 아버지께서 그네를 매 주셔서, 항상 탈 수는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행사를 이루지는 못 했던 듯 하다.

초등학교 때까지 나는 방학이면 늘 시골에 가서 살다가 왔다. 1학년과 2학년 때는 엄마와 함께 시골에 갔다가 나 혼자 남겨져서 큰 집에서 살았다. 보름을 살다가 할아버지께서 외갓집에 데려다 주시면 또 보름 정도를 살다가, 엄마가 데리러 오시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시골의 생활을 잘 누리며 살았다. 사촌들과 같이, 또는 또래의 동네아이들과 함께 소풀 뜯기러 산으로 가기도 하고, 냇가에서 멱도 감으며 즐겁게 지냈다.

겨울에는 삼촌이 만들어주신 썰매, 그 때는 그 썰매를 시케터(스케이트)고 불렀다. 논이나 얕은 못에 얼음이 얼면, 네모 모양으로 만든 판의 아래쪽에 두 쪽으로 받침나무를 대고, 거기에다가 굵은 철사를 박아 썰매를 만들고, 여린 나뭇가지 두 개를 반질반질하게 깎아 한쪽 끝에 대못을 박아서 어찌 된 건 지 모르지만, 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송곳처럼 해서 얼음을 찍으며 신나게 달렸다. 여름에는 깜둥이가 되었고, 겨울에는 밖에서 하도 놀아서 볼이 얼어 벌겋게 될 때까지 놀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리고 도시로 오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하긴 그 때는 도시 아이들도 겨울에는 다 그렇게 놀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였지만 말이다.




또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제삿날이다. 4대 독자셨던 할아버지셨기에 집안의 제사가 많았다. 그 때는 몇 대까지 지내셨는지 모르지만, 여름과 겨울에 꼭 제사가 끼어 있었다. 그러면 떡이 필수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 먹는 재미에 제삿날만 기다렸으니까. 그리곤 물건너 라는 곳으로 성묘를 가기도 했다. 강을 건너는 곳이었는데, 집안의 사촌의 팔촌까지 맡아서 성묘를 하곤 하셨던 듯 하다. 그 곳에 따라 가면 떡을 많이 먹을 수 있었기에 나는 꼭 따라붙었다. 도시에서 온 나였기에 할아버지의 편애가 심했던지, 할아버지께서도 나를 꼭 데리고 가 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동무도 잘 해드렸었다고 한다. 모든 사물에 호기심이 많고, 한 번 들은 것을 잘 기억을 해 내서그 동네에선 내가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 아빠와 할아버지의 지나친 자부심이셨는지도 모르지만...그 당시로선 할아버지께서는 구장을 하셨고, 한학을 하신 분이라 동네일을 다 보셨다고 한다. 나는 그래서 한자를 방학 때마다 배워서 그 후로 중학교 때부터 한자에 대해서는 우리 또래들이 거의 따라오질 못했다.

그러나, 서예 만큼은 정말 싫었다. 조용히 앉아서 글씨 쓰는 것은 정말 싫어서, 먹을 갈아 놓고 기다리라고 하면 도망을 치곤 해서 선머슴아 같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동적인 것은 어려서부터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 때 진득히 그걸 배웠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극전작가 등으로 이름을 날릴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무튼 천자문부터 명심보감, 동몽선습 등등 줄줄 외고 다니긴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걸 외는 것도 좋아했지만, 유행가 가사를 그리 잘 따라해서 틈만 나면 공연을 했다고 한다. 외갓집에 가서도 그랬고.....

가을에는 시사를 지냈다. 시제라고도 하는데 우리 마을에서 시사라고 했다. 그 때는 꼭 아버지와함께 시골에 내려갔다. 여기저기 돌면서 제물을 놓고 돌면서 절을 하곤 했다. 주로 남자아이들만 따라 다녔는데, 나는 여자지만 꼭 따라다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나의 총기를 이뻐하셔서그 산소의 주인공에 대해서 몇대조 어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니, 또는 몇 촌 누구니 하는 것을 다 알려주셨는데, 신통하게도 다 기억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방학 때의 시골 방문은 짧아졌다. 겨우 한 5일-일주일 정도만 머물고 돌아왔다. 보충수업 같은 것도 있었고, 공부를 많이 해야 했으니까. 시골에 가서도 나는 놀 때는 열심히 놀았지만 공부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목표했던 공부는 꼭 한 밤중에라도 다 하고 자곤 했으니까 어른들은 감탄을 하셨다.

아무튼 떡과 고향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다. 고향에서 할머니께서 주시던 떡, 그리고 할아버지 따라 절에 가서 먹던 떡, 추석날 식구들이 시골로 모두 내려가서 먹던 갖가지 속이 든 송편의 그 쫄깃함...송편은 수도권처럼 반달모양이 아니라 원형을 만들어서 손가락 무늬를 넣어 만든 모양이었다. 나는 서울로 오기까지 송편은 꼭 그렇게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시집 와서 보니까 울 시어머님은 꼭 반달 모양을 만드셔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우리 시골식으로 만들었더니 시댁 식구들도 무척 신기해했다.

떡을 생각하다 보니 벼라별 유년의 추억이 다 떠올라서 고향마을로 달려가고 싶다. 지금은 연세드신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주로 사시는 썰렁한 동네,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