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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문학과창작 작품상 인터뷰/풀꽃 우주를 감싸는 난초 향기 (주경림시인)

풀꽃 우주를 감싸는 난초 향기


황경순

(시인)


1. 봄날, 유물의 향기 맡으며


3월 넷째주 토요일 오후 2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무료 개관일이라 인파로 북적였다. 현대식 건물의 박물관은 경복궁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하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꽃샘추위 탓인지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경림 시인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박물관 견학을 온 다소곳한 여학생 같았다. 연못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비교적 한적한 창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온몸으로 파고드는 카푸치노 커피향을 맡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시인은 매주 토요일마다 여기 박물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나와 전시해설 안내를 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했을 때 자원봉사를 신청, 소정의 교육을 거쳐 고고관에서 구석기 시대로부터 발해까지 안내하고 있다고 한다. 사학과 출신의 시인인지라 전공을 살리는 셈이다. 그래도 시인은 봉사라기보다 늘 교육과 세미나,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박물관에 오면 시야가 넓어지고 정신세계도 풍요로워지며 숨통이 트이는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단다. 곧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특별기획전이 열린다니 기대가 크다며, 작은 ‘나’로부터 답답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인 셈이라고 웃는다. 시인의 작품 중에 유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문학과창작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석양에게」도 세중돌박물관에 다녀와서 쓴 것이라고 한다.


<문학과창작 작품 수상자 주경림 시인(우)과 필자>

주경림 시인을 알기는 2003년 봄이다. 문학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매주 만나게 되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호리호리한 몸매에 늘 단정한 모습이어서 시인을 볼 때마다 난초가 연상되었다. 어쩌면 저렇게 사물에게서,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시를 척척 뽑아낼 수 있을까 무척 부러워할 만큼 시인의 작품은 능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해 여름, ‘숲속의 시인학교’에서 나는 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접하게 되었다. 2부 캠프파이어 행사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배트맨이 나타났다. 얼굴에 검은 안경과 두건을 쓰고, 온몸에 검은 가운을 두른 사람이 나타나 온 무대를 주름잡으며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이 아닌가. 진행자가 두건을 벗겨 보니 바로 주경림 시인이어서 모두들 놀랍고 당혹스러워했다. 늘 조용한 성품의 시인이었기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인터뷰 중에 ‘배트맨 사건’을 꼭 해명하고 넘어가야겠다고 한다. 사실 그 퍼포먼스는 당시 이라크 사태가 심각할 때 미군에게 고문당하는 이라크 포로들의 실상을 고발하려고 기획한 것이라고 했다. 포로의 얼굴을 가리는 검은 두건과 다리와 팔에 감긴 전깃줄은 전기고문을 받는 고통을 상징한 것으로, 억압된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무지한 관객들은 그것을 배트맨으로 착각하긴 했지만, 그 춤사위는 예사롭지 않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터였다.

춤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춤사위에 얽힌 추억을 들려준다. 어린 시절 시인은 아래로 남동생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 후암동 외갓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조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축음기를 늘 틀어놓았는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시간이 많았다고. 특히 타악기 연주에 매료되어 우리의 풍물놀이, 북소리, 장구소리가 흘러나오면 신들린 듯이 온몸이 떨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북이 축생인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사람의 몸도 가죽이므로 공명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해석을 덧붙인다.

춤은 어렸을 적부터 해오던 일부분이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다는 시인에게 시 역시 이러한 신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초의 곧고 가녀린 잎 속에 숨겨진 뜨거운 열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풀꽃의 눈


시인은 1956년 4월, 서울 혜화동에서 3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봉급생활을 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부족한 것 없이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버지(79세, 연세대 상과 졸업)는 평범하고 가정적인 회사원, 어머니(78세)는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원, 방송국 합창단원으로 활동하시다가 결혼하셨다. 두 분은 창경궁 잔디밭에서 맞선을 보셨단다… 엘리트였던 부모님들의 영향으로,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자라고 차별 받은 것 없이, 고명딸로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출생지 혜화동은 조부모님이 사시던 디귿자 한옥이었다. 대한통운 창설자였던 할아버지댁은 그 시대 자가용(지프차)이 있었을 정도로 부유했으나, 5·16 군사정권 때 물러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댁에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기 돈암동에 마당 넓은 집을 지어 분가하였다. 걸음마하던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자주 창경궁 나들이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사생대회에 나가 입선하기도 했고 겨울이면 전차 타고 가서 춘당지에서 스케이트를 즐겨 타기도 했다. 대학 시절의 벚꽃 미팅이며 직장(제일은행) 시절의 밤 야유회 등등 추억이 많이 깃든 곳이다. 지금도 울적할 때면 창경궁을 훌쩍 한 바퀴 돌아야 기분 전환이 된다고 한다. 나무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으니 나무에 대해 잘 모르는 시인에게는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지금도 “서둘러 꽃잎을 떨굴 벚나무, 연둣빛 잎사귀를 피워내는 산사나무, 층층나무, 아직 봄이 멀어 잿빛 마른 가지 그대로인 자귀나무 이름을 줄줄이 불러.”보곤 하는 게 아닐까.(「식물인간」, 시집 『눈잣나무』).

시인은 세계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학교(학생수 만명, 한 학년이 20반)였던 숭덕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술학원과 피아노학원을 다녔지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시인에게,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2층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힌 60권짜리 동화책 한 질을 사 주셨다. 선머슴처럼 밖으로 돌며 해질 때까지 뛰어놀던 아이가 그 해 겨울방학은 골방에 처박혀 소공자, 소공녀, 이솝 우화, 안데르센 동화부터 한국 전래동화까지 책읽기에 골몰했다. 이때부터 문학에 대한 자질이 길러졌으리라 생각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사립학교인 돈암동의 성신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규원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는데, 후에 시인의 자녀들이 그 학교를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 되셨다고 한다.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 밤늦게까지 과외를 했는데 6학년 여름쯤에 무시험 입학이 선언되었다. 지금처럼 컴퓨터 추첨이 아니라, 직접 뺑뺑이를 돌려 9번, 동구여중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중 1때 담임으로 김여정 시인을 만났다.

그 후 25년쯤 지나 시를 쓰게 되었다고 장충여중 교감이셨던 김여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주부 시인이 대한민국에 넘쳐나니 주부가 아닌 시인의 이름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다. 선생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겠다는 각오로 돌아온 후, 시인은 김여정 선생님의 교장 퇴임식 기념문집에 제자로서 글을 싣게 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시낭송 때 뵙게 되면 지면에서 작품이며 산문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말씀으로 격려해 주신단다.

중 2때 김초혜 시인께 문법을 배웠다. 이십 대에 등단하여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던 선생님은 문학에 재능을 보인 시인을 무척 사랑해 주셨다. 중 3때 담임은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이셨다. 독서주간에 책읽기를 권장하는 표어를 써내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함께 “한국의 미래는 책 속에 있다”는 내용을 베껴썼다가 날벼락이 떨어졌다. 교무실에서 눈물이 쑥 빠지도록 혼이 났다. 당시 야속하기만 했는데 두고두고 교훈이 되었던 가르침이었다.

한글날 연례행사인 백일장에서 1학년 때 참가하여 시 부문에서 장원을 했다. 3년 내내 시인이 장원을 독차지했는데, 김여정, 김초혜, 조정래 선생님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1학년 때 장원작품 「달」은 우주선 아폴로 11호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아침조회 시간에 운동장에서 상과 상품으로 김소월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받았다. 김활란 선생님의 조카인 김정옥(1913~2004) 교장선생님께서 그 시를 읽어주시며 달에 인간의 발자국이 찍혔어도 신화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라며 칭찬을 해주시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무렵 작품이 궁금하다고 하자, 시인은 중 3때 장원한 작품을 보여준다.


별 조각 모아 이불하고/ 풀벌레 소리 귀에 담기면

설움은 하얗게 부서져/ 이슬 먹은 달빛이다.

―「가을」 부분


가을하늘을 인 꽃사슴이 꿈을 꾸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했다. 시어들이 감각적이고 투명하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시어로는 능숙한 맛을 풍기는데, 시인과 소설가를 담임선생님으로 모셨던 특이한 인연과 경험 덕분이 아닌가 한다.

이화여고에 진학하면서 가정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다. 대지가 1백여평이 되던 정릉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수유리 쪽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부유층이 많고 재능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궁핍을 견뎌야 하는 고통이 컸다. 그러나 그때의 어려움이 내면적인 성숙을 가져왔기에 오히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화여고에서는 아동문학가 신지식 선생님으로부터 작문을 배웠다. 정물화처럼 애잔하게 아름다운 분이셨다. 문학적인 향기가 은은히 배어나오는 듯 말씀도 조용하셨다. 시인에게는 수식어가 많아 초점이 흐려지고 문장이 늘어져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해 주셨다. 그때 그 말씀을 잘 새겨들었더라면 시를 쓰는 초기에 덜 고생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일기도 한다고.

이화여대 인문계 사회계열에 입학한 후 전국 방방곡곡으로 답사 다닌다는 데 매력을 느껴 사학과를 택했다. 미술사학자이며 이대 박물관장이셨던 진홍섭 교수님과 옛건축, 불상, 탑 등을 답사다니며 한국적인 미(美)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 졸업 때는 우등상을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남동생들이 줄줄이 대학생들인지라 취업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은행 공채에 합격해 4년여 국제부에서 무역 업무를 담당하다가 1982년에 결혼했다. 5남매의 맏며느리가 되어 성북동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시어머님은 작은어머니 친구분이어서 잘해 주셨지만 딸에서 며느리로 바뀐 역할에는 인내가 필요했다. 남편의 개인 사업을 도우며 연년생으로 낳은 남매를 기르느라 문학에의 꿈은 멀어졌고 틈틈이 독서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서야 겨우 숨을 돌려 박물관 대학 강좌를 들으며 다시 시와 만날 수 있었다.


3. 전통과 불교 지향의 시세계


주경림 시인의 평생 생활 반경은 혜화동-정릉-수유동-성북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혼 후 25년 이상 성북동에서 살고 있으므로, 시인의 말처럼 어찌 보면 개미 쳇바퀴 돌 듯 좁은 세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생활 반경 안에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가 있으며, 한옥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보존된 ‘최순우의 옛집’과 상허 이태준 선생의 고택 ‘수연산방’이 있으며, 우리의 옛그림을 만날 수 있는 ‘간송미술관’이 있다. 만해의 ‘심우장’이 있고 조각가 최종태의 ‘관음석상’이 있는 ‘길상사’가 있다. 성북동은 장안에서 파는 광목을 빨아 햇볕에 표백하던 마전터가 있던 곳이며, 누에치는 것을 처음 시작한 중국의 서릉씨(西陵氏)를 모셔놓은 ‘선잠단(先蠶壇)’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시인의 시 속에 육화되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바람고치」 「햇살이 가사 한 벌을 거두다」 등과 같은 수작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시인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미션스쿨을 다녔지만, 종교가 불교이다. 동양적인 잔잔한 사유에 자신을 늘 채찍질하면서도 항상 성실하게 모든 이들을 대하고 존재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모습이 불교적 정서와 맞닿아 있다.


성도재일 새벽,

삼천 배를 마치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빛들이 얼음 조각으로 카랑카랑 부서진다

철야정진으로 다리가 휘청이는데

그때, 네란자라아강 기슭에서 부처님을 유혹했던,

악마 나무치가 허옇게 입김을 뿜으며 속삭인다

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며

절을 할 때 마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 했지만

삼천 배는 산의 정상처럼 아득했다

그렇게 기필코 정복해야한다는

我相의 집요함으로 내내 헉헉거려야 했다

―「금성, 눈물 흘리다」


삼천배를 하며 마음을 비워냈다고 하는 자신의 아상(我相)이 거짓이었다고 참회하는 시인의 모습은 마치 구도자의 그것에 가깝다. 세상을 향해 삼천배를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삶의 내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경림 시인은 인터뷰 내내 운이 좋은 편이라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 운이 좋아서 모든 것이 풀렸다고 말할 수 있으랴! 시인은 누군가가 시집을 보내오면 꼭 독후감을 써서 답장을 보낸다. 타인을 배려하는 따듯한 마음과 성실함, 그리고 세상을 향해 항상 낮게 업드려 절하는 시인의 자세가 이렇게 좋은 인연들을 맺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주경림 시인의 시가 대부분 전통적이며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적 영향과 종교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작품상을 받은 「풀꽃 우주」 역시 지난해 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김정희의 특별전에 전시된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불이선란도」는 ‘난초를 그렸으나 실제 난초를 그리려고 하지 않으며 그린 그림’을 말하며, ‘부작란도(不作蘭圖)’로 불린다고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세계가 전통과 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가 유물, 그림, 생선, 나물, 그릇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작은 식물과 풀뿌리에서조차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무생물에게도 생명을 부여하며 그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유비쿼터스란 말이 보편화되기 전부터 연작시 「유비쿼터스」를 써서 자극을 주기도 했다.



4. 장인 정신으로 마음을 닦으며


시인은 1992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신세훈 선생님의 심사였다. 곧바로 1993년에 첫시집 『씨줄과 날줄』을 발간했지만 습작기의 작품 모음에 불과하다고 겸손해 한다. 그 이후 김여정 선생님의 소개로 문학아카데미 워크숍에서 수련을 쌓았으며, 2000년 6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문예진흥기금 지원으로 두번째 시집 『눈잣나무』를 발간했다. 새 시집을 낼 때가 지나지 않았냐는 질문에 지금 계속 퇴고를 하면서 준비중이라고 한다. 작품은 모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을 내놓기가 두렵다고 한다.

“시를 쓰면서 제일 힘드실 때가 언제인가요?” 필자의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역시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문제겠지요?”라고 재차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시집은 두 권 냈지만, 한 편 한 편이 두렵고, 글이 나를 배반할까 봐 두렵고, 다시는 시를 못 쓸 것 같아 더욱 두렵다고 한다.

그럴 때는 어떻게 극복하셨냐는 질문에 잘못 구워진 도자기는 깨뜨려버리는 단호함으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죽을 때까지 ‘글쟁이’로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시가 잘 씌어지지 않으면 주제를 가지고 연작시를 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잘못 하면 매너리즘에 빠져 몇 작품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또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스스로에게 원고청탁을 해보라고 한다. 어떤 문학잡지에서 청탁이 올까 막연히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기한을 정해서 꾸준히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명절이 돌아오면 시나 산문을 미리 써놓고 장을 보러 간다고 한다. 그러면 명절 음식 준비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자기 통제력이 아닐 수 없다.

“제가 알기로는 동인활동은 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에 “시간에 자유롭지 못할 뿐더러 어차피 문학은 혼자 해야 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어야 자신의 내부를 잘 들여다볼 수 있겠지요. 실은, 아무도 어떤 동인에도 끼워주질 않더군요.” 하고 농담까지 곁들이며 웃어보인다. 가끔 성북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시낭송 모임에는 참석한다고 한다. 북한산 입구, 정릉, 심우장 등 낭송 장소가 추억이 깃든 곳이라서 참가를 하게 된다고.

시간이 어찌 빨리 흘렀는지 벌써 4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시인은 박물관 안내를 해주지 못해 너무나 미안해 하며 일어선다. 총총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따뜻해져왔다. 혼자서 박물관을 돌아보다가 마주친 봉수형(鳳首刑) 유리병, 이른 봄 햇살에 물 오른 듯한 그 버드나무빛이 주경림 시인의 얼굴과 겹쳐져 아른거렸다.

-문학과창작 2008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