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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서유럽(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영국)

세기를 넘나든 눈물의 유럽여행기 /[유럽기행1] 제1일, 드디어 유럽으로!

세기를 넘나든 눈물의 유럽여행기 (1999년 12월 24일)

 

[유럽기행1] 제1일, 드디어 유럽으로!

 

 가방 하나씩 탈탈 끌며 한 명씩 공항 대합실로 들어서는 우리 일당…….

 약간의 미안함과 들뜬 기분으로 수학여행 가듯이 설레는 우리들의 얼굴엔 핑크빛 생기가 돌고, 다가오는 일 하나하나에도 자신감이 넘치는 듯 하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나는 처음 나가보는 해외여행이라 사실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지만, 첫경험이란 피의 아픔이 동반되듯이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기대하며 여권을 받아 일단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였다. 4개국이니 돈을 골고루 조금씩 바꾸고, US달러는 어느 나라에나 통용된다니 그것도 좀 바꾸고…….

 연말에 너무 바빠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물건을 공항 내 상점에서 몇 가지 더 사고, 가이드에게 짐을 내어주고 우리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 또다시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출국 시간, 대한항공에 올랐다. 여유 있는 좌석에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뜨거운 햇살이 더 따갑게 내려 쪼이는 건 태양에 더 가까이 다가서서인가?"

하는 바보스런 생각을 하면서 눈부신 태양을 마음껏 쏘아보았다.

 

 비행기는 아무런 요동도 없이 순항을 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잠이 들었다. 대형 화면에서는 상공 30000피드, 대기온도 몇도 등등을 나타내거나 지도에 비행기모형으로 항로를 알리고 있거나,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시간은 자꾸자꾸 흘렀다. 사람이 어디로 떠난다는 건 항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뿌듯함으로 다가오지만, 이렇게 호젓이 가족과 일과 일상을 떠난다는 게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워 가끔 몸을 떨었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평소에 '나'는 없다. 남편의 여보, 아이들의 엄마, 직장에서의 호칭, 사회적인 호칭, 길거리에선 '아줌마', 눈이 약간 어두운 사람에게서 재수 좋으면 들을 수 있는 착각, '아가씨", 이렇게 불리지만, 내 이름을 직접적으로 불릴 일은 거의 없다. 하긴 병원에서 진료 받을 때, 그리고 공식적인 공문을 낼 때, 돈 내라는 것이 대부분인 우편물을 받을 때는 속절없이,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앉아 하회를 기다리는 종처럼 여겨지는 그런 이름은 살아 있었지. 반면에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겠지.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내 머릿속에 흐뭇한 패턴으로 명멸하고 결국에는 눈부신 태양에 못 이겨 창을 닫고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큰언니랑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언니, 요즘도 아저씨 생각나죠? 워낙 잘 해 주셔서 더 그렇죠?"

눈물을 글썽이는 언니,

 "여행 떠나려고 짐 챙기니 무척 생각났어. 있었으면 다 챙겨 주었을 텐데. 워낙   외국을 많이 다녀서 뭐가 필요한지 너무 잘 알아서 말이야."

 

 괜히 물었다 싶었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특히 금실이 좋았던 사람들의 이별이 빠르다는 게 통계적으로 나온다지만, 왜 사람들을 똑 같이 데려가지 않으시는 걸까? 최소한 부부만은 같이 데려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소중한 사람들은 다 같이 데려가시라고 원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지만 남은 자식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또 한 분이라도 살아 계시는 게 낫기도 하다. 평소에 술 많이 드시고 실수를 많이 하시던 아버지, 살아서는 그리 원망도 많이 하였지만 아무리 불러도 꿈에도 나타나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요즘도 눈물짓는 나, 드라마를 보다가 아버지에 대한 것만 나오면 몰래 눈물짓는 내가 아닌가? 살아 계실 때 더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이 늘 한스러워 더 하다. 인간은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므로 더 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행복한 지도 모르지만…. 왜냐하면 한 치 앞까지 걱정하면 너무 복잡하고 바쁜 세상인 것이다.

남들처럼 잠을 청했다. 벌써 다섯 시간은 족히 지나 있었기 때문에 한 자세로 계속 앉아 있는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이 쑤시고 결려왔다. 잠을 청한다. 코 코는 소리도 조금씩 들려오고, 영화 보기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고…….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잠이 안 와서, 시집을 펼쳐 들었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 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님의 시,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는 말씀이 정말 공감이 갔다. 얼마나 잘 난 척 하고, 아옹다옹하는 우리들인가? 결국 가죽 부대에 담긴 고깃덩이에 불과한 것을……. 흐린 주점에 앉아서 세월을 잊으며 고깃덩이의 비애를 슬퍼하며 흐린 불빛을 바라보는 사람이 우리들 모두인 것이다. 남은 술잔을 걱정하듯이 남은 생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시를 읽으며 시인에게 깊이 빠져있는 듯 하지만, 현실은 또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이런 절실한 시를 언제쯤 쓸 수 있을까? 마음만 늘 허전하고 슬프고 그것은 곧 아름다움이라고 가끔씩 메아리 되지도 않는 말을 읊조리기도 하지만 끝은 결국 어디인가? 아름답기 보다 절실한 시가 가슴을 후벼판다. 답답하여 견딜 수 없음에 창을 열었다.

 "아! 저럴 수가?"

 저것이 바로 '우주의 바다'로다! 파란 바다 수평선 위에 황홀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비단을 깔아놓은 듯 일정한 면적으로 부드럽게 부드럽게 펼쳐진 저녁 노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을 잃었다. 천국의 빛이 저럴까?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만 하는 그 빛! 아,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그 빛에 잠은 더욱 달아나고, 그 감격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비행기는 계속 지구를 따라 그 빛깔을 내 시야에 쏟아 주었다. 그러나 몇 시간이 되어도 그 빛은 똑같지 않았다. 얇은 구름 한 덩이에 머무르면 산란한 무지개, 빼곡이 들어찬 구름 위에선 찬란한 황금빛 대지, 맑은 허공의 바다 위에선 묵묵히 떠 가는 한 척의 단감빛 항공 모함, 그 바다 위에 구름 잔잔히 떠 있으면 태초의 빛으로 부서져 황홀감과 경외감을 자아내었다. 그 뿐인가? 시간이 갈수록 어둠의 세력이 커져 가면 그는 더욱 온화한 부처님의 미소처럼 마음을 편히 쉬게 해주었고, 그 수혜 영역을 더욱 넓혀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천국의 미소처럼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듯 조용히 별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캄캄한 어둠이 세상을 감싸안고, 잠의 여신이 나마저 덮쳐 왔다. 그러나 그녀의 세력은 30분을 채 넘지 못 하였고, 이젠 영화를 감상하였다. 007 영화, 박진감 넘치는 영화에 두 시간을 투자한 다음 우린 서서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취리히.

 자그마한 국제 공항답게 깨끗하고 개성이 있었다.

 드디어 외국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갈아 탈 비행기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여독을 조금씩 풀어나갔다.

 이제 로마행 비행기를 탈 차례, 아까 탔던 비행기인데 다시 로마 경유해서 서울로 간다는 것이다. 시간은 빨리 흐르고 저녁을 간단히 먹은 후 우린 포도주로 건배를 하고, 맥주까지 곁들여 기쁨을 나누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다.

 우리 나라처럼 공항버스가 아니라 공항 내 전철이 운행되고 있었다. 잠시 후에 대합실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기사는 이탈리안, 니콜라였다.

 "챠오!"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이제 이국에서의 밤이 시작된 것이다. 여긴 아직도 24일 저녁, 한국은 25일일텐데, 크리스마스 이브를 두 번이나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시차는 8시간인데 여기가 늦게 가기 때문이다.

들뜬 마음들이 드디어 발동을 했다.

"이국에서의 첫밤을 그냥 잠만 잘 수는 없다."

 당연한 말씀, 가이드를 찾았더니 안보여서 다른 팀 가이드에게 물어서 멋있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한 친구가 이태리서 살다 온 친구에게서 수집해온 정보에 의해 젊은이들의 거리인 '나보나 광장'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한 부부 팀과 합세하여 택시 두 대를 불러 거리로 출동했다. 택시비가 엄청 비쌌지만, 첫날이니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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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이브, 젊은이의 거리는 예상보다 한가로웠다. 유럽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한다고 하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래도 역시 젊은이들이 좀 보였고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고, 카페에서 생맥주를 한 잔씩 하고 흑맥주 맛까지 보았다. 본 고장인지는 모르지만 유럽에서 마시는 그 맛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밤은 깊어가고 성탄의 종소리가 울리고, 그렇게 우린 자정을 맞았고, 새벽 2시쯤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택시 팀은 오고 갈 때 택시비를 다 바가지를 썼지만 말이다. 난 잠을 자지 않은 덕분에 금방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로마의 유적들이 꿈속에서 먼저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