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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서유럽(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영국)

[유럽기행 6] 제6일 풍요와 예술의 도시 파리

[유럽기행 6] 제6일 풍요와 예술의 도시 파리

  1999년 12월 29일

 

늦으막히 기상했다. 파리는 9시부터 관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침 메뉴는 여태까지 먹어본 중 제일 나았다. 빵도 질이 좋았고 커피와 주스, 우유도 먹을 만 했다. 현지 가이드는 여자 분인데 불어를 전공하고 프랑스인과 결혼한 사람이다. 가이드 중에선 매우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소상히 설명을 잘 해 주었다.

 

 

먼저 현재 파리의 실정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었다. 며칠 전에 50년만에 홍수와 폭풍이 몰아쳐서 파리의 모든 것들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농경지도 많이 침수되어 복구 작업이 한창이고, 세느 강 유람선은 뜨지 않고, 거리도 아직 뒤숭숭한 곳이 많다고 한다. 또 새 천년을 맞이하기 위해서 큰 이벤트를 준비하려고 샹제리제 거리가 통제되어 교통이 혼잡할 거라고 한다. 프랑스 인구는 6천만으로 풍요로운 들판이 말해주던 것처럼 유럽 최대의 농업과 축산국으로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더불어 철도, 항공 등 최첨단 산업과 오래 전부터 뛰어난 예술까지 겸비된 나라이다. 특히 파리는 단일 도시로는 세계 제일의 관광도시이다. 자동차 박람회, 국제 에어쇼, 세계 건축전, 패션쇼, 각종 직물 전시회 등으로 연일 세계 각국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그야말로 자존심 강한 도시인 것이다.

 

 

파리는 크게 외곽까지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성 내부만 뜻하는데 중심부에서 100KM의 사방을 말하며 내부에 230만 정도의 인구가 살고, 외곽에 750만 정도가 살아서 수도권이 1000만 명이 산다고 한다. 우리 나라 서울과 수도권보다는 규모가 작은 셈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우기인데 부슬부슬 비가 자주 내려서 해가 나는 날은 거의 보기 힘들어서 햇살이 쏟아지면 사람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곳곳에서 무조건 일광욕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호텔에서부터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콩코드 광장, 샹제리제 거리, 세느 강을 따라 유유히 들어선 도로들, 그리고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앞에서 멈추었다. 바로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이었던 곳이 공원이 되었는데 에펠탑이 바로 잘 보이는 위치였다. 에펠탑 전신이 나오게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에펠탑은 저녁에 야간관광을 할 예정이므로, 멀리서 그 높이와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면서 나폴레옹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사관학교 건물 뒤편에 돔형의 지붕이 보였는데 번쩍번쩍하고 특이했는데 바로 나폴레옹의 무덤이라고 한다. 누가 뭐래도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의 무덤인데, 6개의 관에 재를 나누어 죽은지 21년만에 여기에 안치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천천히 달리는데, 세느 강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을 보노라니 많은 다리들이 보였다. 작품 속에서 많이 듣고 보았던 미라보 다리가 보여서 잔잔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알렉산더3세 다리도 보였는데 4개의 기둥에 금장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다리 중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고, 다리 너머에는 큰 궁전이 보였는데 세계만국박람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왼쪽 다리 건너에는 콩코드 광장이 보였다. 바로 '대혁명의 광장' 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뜨 왕비,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곳이다. 오른쪽은 큰 시계가 보이는 ‘오르세이 박물관’으로 ‘19세기 박물관’이라고도 하는데, 자연파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강 반대편엔 세계 제일의 박물관으로, 소장품이 최다라는 프랑스의 자존심, ‘루브르 박물관’이 보였는데, 이 곳은 처음에는 군사요새였다고 하며 300년 동안 증축하였다고 한다.

 

 

파리 시내는 곳곳이 역사의 현장이고, 도시 전체가 고풍스런 인상을 주었다. 상가 건물들의 벽까지도 예술성을 무시하지 않고 철저한 조화와 계획 아래 지어진 듯 하였다. 고전미를 살리면서 현대적인 편리성을 적당히 조절하는 지혜가 보인다고나 할까?

 

 

다음 일정은 '노틀담 성당' 이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틀담의 곱추' 로 더 유명한 이 성당은 시떼섬 위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백미라는 건축물이다. 이태리의 두오모 성당이 고딕 자체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면, 이 노틀담은 고딕의 백미만 취하고 건축물의 미를 최대한 고려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보아도 세련미가 돋보이는 모양이었다. 특히 스테인드 글라스가 멋있고, 잔다르크의 명예 복권식,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드골의 영결식이 거행될 만큼 프랑스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라고 한다.

 

 

성당 측면의 동물 조각 중에 욕심 많은 주교의 모습만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여 풍자를 하였다고 한다. 정면에 세 개의 문이 있는데 , 왼쪽은 성모마리아의 문, 가운데는 최후 승천의 문, 오른쪽은 '성안나의 문'으로 마리아 어머니의 문이며, 문마다 각각의 의미를 담은 조각들이 아름다웠다. 성당 내부에도 조각과 그림이 다양하고, '장미의 창' 이라는 스테인드 글래스는 특히 아름다웠고,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인상적이었다. 웅장함과 경건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숙연해지는 곳이었다.

점심은 프랑스식으로 달팽이 정식을 먹었다.

 

 

몸도 웬만하여 달팽이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달팽이 요리는 소스가 아주 특이했다. 우리 나라의 우렁이 같은 것을 잘 쪄서 푸른 빛이 나는 소스에 찍어 먹었는데 맛이 그만이었다. 음식은 소스 맛이라더니 우리 나라 골뱅이 무침 맛도 기막히지만 미식가라는 프랑스 사람들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후엔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가려다가 우범지역이라는 말에 관두었는데 역시 낮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마르트는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서기 210년 프랑스에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종교박해 때 생드니가 이 언덕에서 참수되었는데, 목이 짤려도 끊어지지 않아서 머리를 품에 안고 동북쪽으로 기어가, 어떤 여인이 묻어주어 생드니 성당, 생드니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이 몽마르트 언덕은 예술의 도시, 특히 미술가들이 많이 기거하던 곳으로 피카소, 샤갈 등 유명한 화가들이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곳이다. 지금도 낮에는 무명 화가들이 나와서 그림을 그리며 관광객을 상대로 해서 초상화도 그려주고, 그 밖의 그림들도 팔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는 성심성당(싸크레꾀르)이 있는데, 하얀 건물로 지붕이 돔 형식 비슷한데 신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묵상을 하는 성당이라 안에서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 성당은 보불전쟁 때 파리가 패하게 되어 파리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애국심과 항전의식, 단결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이 언덕은 꽤 가파르기 때문에 경치가 좋아서 지금도 영화 촬영을 가장 많이 하는 장소라고 한다.

 

 

여기서 자유 시간이 좀 주어졌다. 카톨릭 신자이신 큰언니는 성당에 다녀오시고, 일부는 몽마르트의 가게 구경을 하고, 나와 막내는 그림 구경을 먼저 하기로 하였다. 막내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지만,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화가들의 신기한 손놀림을 마냥 바라보며 기념 사진도 찍고, 예술의 향기를 마음껏 느끼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수염을 길게 기른 화가는 유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림 사이사이에서 내가 그린 그림인 양 사진 찍는 일도 어린 아이처럼 마냥 즐거웠다.

 

 

스위스 프랑이 많이 남아서 환전을 해 오신 언니가 있어서, 나도 공금과 내 돈을 바꾸었다. 손해를 본 듯 했지만 유용하게 쓰기로 하고 말이다. 공금이란 뭐냐하면, 회비를 한 사람이 관리하면 자금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릴 염려가 있으므로, 한 사람이 한 나라씩 맡기로 하였었다. 내가 맡은 돈이 스위스 프랑이었는데, 스위스에선 커피 마신 것과 포도주 산 것 외에는 쓴 것이 별로 없었다. 회비가 그대로 많이 남아 있어서 프랑스 프랑으로 바꾼 것이다. 스위스 프랑이 780원 정도이고, 프랑스 프랑이 190원 정도여서 갑자기 부자가 된 듯 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glee0726?Redirect=Log&logNo=80170466654

몽마르뜨 언덕

 

 

작은 까페에서 몽마르트의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내려오는 길에는 즐겁게 쇼핑을 했다. 거리에는 싼 물건들이 무척 많았다. 작은 열쇠고리부터 티셔츠, 에펠탑 모형 등 특이한 것이 많아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었다. 파리의 사진과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인쇄된 컵 받침을 두어 세트씩 샀고, 특이한 열쇠고리, 엽서들을 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작은 자유를 만끽하고, 세계 속에 내가 있다는 생각도 하며…….

 

 

버스 안에서 현지 가이드는 시내 곳곳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해주었다. 몽마르트에서 조금 지나니, 현란하고 야한 사진들이 많이 붙은 거리가 나타나서 기분이 묘했다. 나라에서 인정한 환락가, 삐걀이라고 하였다. 음성화되기 쉬운 뒷골목을 양성화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랑루즈도 보았다. 그 유명한 무랑루즈, 내가 보기에 간판은 그저 그런데, 우리 나라에만도 그 이름을 본뜬 업소들이 얼마나 많던가? 대학 다닐 때 무랑루즈란 술집이나 까페도 많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여행 팀은 오전에 야간 투어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을 했는데, 무랑루즈 쇼가 그리 유명하다고 하여 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하룻밤 쇼를 감상하는 비용이 너무 비쌌다. 국내 호텔에서도 유사한 쇼를 볼 수 있으므로 에펠탑과 시내 야경 관광만 하기로 하였다. 세느 강 유람선은 며칠 전 폭우로 운행을 안 한다고 하여서 안타까웠다. 희망하는 사람만 리도쇼우나 무랑루즈 쇼를 보기로 했는데, 우리랑 야행같이 하던 부부는 파리가 처음이 아니라 야경보다는 거길 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쇼핑의 기회가 주어졌다.

샹제리제 거리와 에펠탑 등을 낮에 볼 경우엔 시간이 나지 않지만, 야간투어를 하기로 했으므로 면세점과 쁘렝땅 백화점을 들러 보기로 하였다. 면세점은 15%를 할인해주므로 기념품을 사기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도 비싼 것은 엄청 비쌌지만 말이다. 스위스에서 알람 시계를 하나 사고 싶었는데, 사질 못했다. 여기서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서 우리 딸들 손목 시계만 하나씩 샀다. 매일 잘 잃어버린다고 싼 것만 사주었는데 이제 둘째까지 중학생이 되니 얄팍하고 캐주얼한 것으로 하나씩 샀다. 디자인은 같고 큰 아이는 파란 색, 작은 아이 것은 흰 색으로……. 그리고 친척들 줄 머플러 몇 개와 화장품 몇 개를 골랐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한 듯 하였다. 돈 신경 안 쓰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막 쓰겠지만 빠듯한 우리는 그럴 수도 없고, 아무튼 처음 나온 여행이니 여기저기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가까운 사람들만 챙기기로 했다. 그래도 마땅치 않은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결국 쁘렝땅 백화점은 시간이 부족해 가지 못 하고 멀리서 눈요기만 하고 돌아나왔다. 오후의 주요 일정은 바로 '루브르 박물관' 관람인데 예약한 시간에 맞추려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프랑스인의 자존심이라는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섰다.

원래 루브르는 군사용어 루파르(방어성 방어진지)란 뜻으로 1200년경 축조된 세느 강 군사 요새였다고 한다. 그 후, 1500년경 궁궐로 바뀌었는데 땅 속에 기초를 둔 상태에서 정원을 짓고, 1984년에는 피라미드를 만들어 지금의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지상으로 솟아오른 유리 건물로 중심에서 각 주제관으로 통하는 길을 나아가게 하여 미로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역사적인 가치에 현대적인 편리함이 가미된 대단한 박물관으로 생각되었다. 고대 유물들의 보존에 대해서는 이태리 로마가 조각 예술의 극치를 자랑한다면, 대영 박물관은 이집트 유물이 잘 보관되어 있고, 루브르는 ‘그림의 보고’ 라고 하는데, 과연 대단하였다.

 

 

처음으로 간 곳이 데농(Denon)관. 이탈리아, 스페인 조각 방을 관람하였는데 미켈란젤로의 모졸레 등을 몇 개 보았고, 그림 방은 고대부터 1800년 초기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드라크르와의 사실적인 작품들, ‘민중을 이끄는 자유(쟌다르크)’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프랑스 시민 민주정치의 시작을 잘 표현했다고 한다. 대각선 구도의 사실적인 그림으로 드라크르와 자신도 그림 속에 그려져 있다고 한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은 삼각구도의 박진감이 넘치는 작품이었고, 베로네에즈가 그린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작품은 당시의 베니스의 유명인사들을 다 그린 대작으로, 복원하는데 3년이 걸렸고, 9백만 프랑(우리 돈 약 18억)이 들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의 예술 작품에 대한 관심과 자존심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다음은 그 유명한 '모나리자' 진품을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 사진 찍히느라 바래지 않게 특수 유리에 포장된 채로 우릴 맞은 모나리자. 진짜 볼 때마다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는 듯한 그 미소, 정말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그림은 16세기 프랑스의 왕이 모나리자를 보고 반해서 레오나르도에게 살아있는 동안에는 가지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는 자신이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빈치가 그 그림은 절대로 내 놓지 않았으므로…….

 

그 다음은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그림으로, 이 그림은 두 번 그려졌다고 하는데, 화가가 나폴레옹의 세 번째 여동생 폴린느를 사랑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17년 뒤에 모델 없이 다시 그렸기 때문에 폴린느의 드레스 색깔이 바뀌었다고 한다.

 

 

유명한 그림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 곳만 하루 종일 보아도 부족할 정도였지만, 우리는 선별해서 몇 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조각을 보았다. '사모트라스 섬의 승리' 라는 조각은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조각이며, 여성미와 남성미를 겸비한 조각이라고 한다. '밀로의 비너스'도 보았는데, 역시 대단하다! 완벽한 미의 여신을 표현한 이 조각은 800년경 어떤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리스 시대의 척도에 맞는 미인 상이라고 볼 수 있다. 허리가 굵고 엉덩이가 큰 건강미로 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루브르 박물관에는 우리 문화재도 보존이 되어 있다. 세계 최초의 인쇄물인 '직지심경', ‘왕오천축국전’ 등이 있는데 다각적인 교섭을 통하여 우리 박물관에 보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직지심경’은 대통령은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박물관 측의 반대에 보류된 실정이라고 하니 빨리 실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이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날이다. 그 뛰어난 기량도 대단하지만, 보존하려는 프랑스인들의 노력과 관심에 감명을 받았다. '예술의 나라'라는 칭호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