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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서유럽(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영국)

[유럽기행 8] 제7일 낯선 나라, 고독한 병실에서

[유럽기행 8] 제7일 낯선 나라, 고독한 병실에서

1999년 12월 30일~31일

 

얼마 동안 잠을 잤을까?

누가 와서 깨우기에 봤더니 남자 간호사였다. 교대를 했는지 다른 사람이었다. 소지품을 챙겨주고 어디로 이동을 하려는가 보았다. 침대는 그대로 쓰고, 옷과 가방을 침대 밑에 놓은 채 밀려서 밀려서 어디론가 갔다. 3층이었는데, 조용하고 깨끗한 병실이었다. 창 밖으로 멀리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 방이었다. 여긴 다인 병실은 없는 것 같다. 샤워실도 바로 딸려 있고, 꽤 넓고 쾌적한 곳이었다.

잠시 후, 빵 하나와 요구르트, 우유로 아침 식사를 했다. 별로 입맛이 없어서 조금씩만 먹고, 양치질을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시계도 없었으므로 시간도 모르고 그냥 10시쯤이려니 하는 시간이었는데, 여행사에서 주선한 가이드라고 했다. 병의 경과를 봐서 절차를 밟고 몸이 좋아지면 오후엔 파리 안내를 더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를 만난 결과는 어림도 없었다. 오늘은 퇴원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나는 숨 가쁘던 것이 좋아졌기 때문에, 가려운 것은 약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밤 9시에 일행과 합류하겠다고 말했지만,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밤에 더 심해질 수 있고, 더구나 비행기를 타는 것은 생명이 위험할 수 있으므로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의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가이드는 그러겠다고 하면서 비행기 티켓 등을 알아보러 다시 나갔다.

 

 

점심 시간이 되자, 여러 가지 음식이 나왔다. 옥수수를 통째로 삶아서 소스를 끼얹은 듯한 음식이 특이했는데 씁쓸한 맛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 나라 계란찜 비슷하게 생긴 것을 끼얹은 것은 좀 먹고, 요플레와 빵만 먹었다. 가짓수는 많은데 식성이 달라서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시집을 펼쳐 들었다. 조용한 시간에 시를 읽는 것도 오랜만이다. 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순간순간 우리에게 생각을 심어주고 인생을 깊이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런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가 나오는 영화 '일 포스티노' 장면이 떠오르면서 한적한 바닷가가 한없이 그리워졌다.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가슴 속에 찾아들 듯이, 시도 어느 순간, 나에게 찾아들어 쓰여지지 않는 모습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랑의 구속처럼…….

두 시쯤 가이드가 다시 왔다.현지여행사 사장이 담당의사와 직접 통화를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밤에 호흡 곤란이 왔기 때문에 밤이 위험하고, 비행기를 타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내 의사를 분명히 전했지만 의사의 진단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별 수 없지. 마침 가이드 있을 때 의사들의 회진이 있었다. 몸의 상태를 보고 몇 가지 물은 그들은 같은 입장의 얘기를 계속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비행기는 이틀 뒤인 1월 1일 저녁에 영국 런던 발 서울행 논스톱이 있다고 했다. 그 전에는 비행기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비용을 최소한 줄이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티켓을 구해 오겠다고 하였다. 전화하기가 힘들므로 가이드의 핸드폰으로 수신자부담의 전화를 남편에게 걸었다. 이틀 더 체류해야 된다고 연락을 했다. 평소엔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몸이 약해지니 항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돌아가면 더 잘 대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가이드와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게 다시 그는 일을 보기 위해 병원을 나갔다. 또다시 혼자 된 시간, 계속 주사액이 투여되니 잠이 쏟아졌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깊은 나락에 빠진 꿈나라에선 우리 딸들의 얼굴이 보이고, 걱정하고 있을 식구들의 모습이 오락가락했다. 낯선 나라, 고독한 병실에서 잠을 청한 나!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얼마를 잤을까?

저절로 깨어보니 창가엔 저녁 햇살이 조용히 동쪽 하늘을 물들이며 빛이 바래어 가고 있었다. 건물들 꼭대기에 머문 기운은 점점 옅어져 밤을 재촉하였는데, 병원 정원으로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우아한 자태로 세상을 비추는 저녁 노을이 외로움을 더욱 깊게 하였다.

 

 

저녁 식사도 잘 나왔지만 역시 내가 먹기엔 맞지 않아서 빵과 요구르트만 먹고, 물만 잔뜩 마셨다. 티비를 켜보고 싶었지만, 동전을 넣는 것인지 간호사가 뭐라고 하는데 안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조용히 사색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혈압이나 체온 측정은 수시로 계속 되었고, 저녁엔 약도 한 알 먹었다. 잠이 오질 않아서 시를 더 읽었고, 파리 외곽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빠지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병실은 무척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다. 옷장, 의자 등이 잘 비치되어 있고, 간호사가 내 소지품도 잘 챙겨 주었다. 땀이 난 것을 샤워기로 말끔히 씻어내고, 조용히 이국에서의 밤을 맞이했다.

 

 

출처  http://ggmg.egloos.com/286811

 

파리 시청앞이란다. 퍼 온 사진이라 그다지 감흥은 없지만, 아쉬운 파리여행을 생각하며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