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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시와 등단시

2010신춘문예 당선작 시와시조 2 12편

14.2010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

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밤,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15.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바람의 산란

배경희

모든 것이 사라져도 바람은 존재한다

수천 년 살아있는 혼들의 화석처럼

떠돌며 우리의 삶 속에 잔뿌리를 내린다

당신은 허공 속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힘들고 지친 자들의 울음을 파먹으며

온몸을 먹구름 속에 수없이 휘어가며

밤새 비 쏟아지고 나무를 두드렸던

바람 새들 불러 모아 한바탕 쓸고 간

마당엔 햇살 물고기 푸륵푸륵 뛰논다

16. 201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유병록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털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함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뚱이었던 물체를

불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날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씩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17. 2010 신춘문예 동아일보 시조

새, 혹은 목련

박해성

앙가슴 하얀 새가 허공 한 끝 끌고 가다

문득 멈춘 자리

매듭 스롯 풀린 고요

콕 콕 콕

잔가지마다 제 입김 불어넣는

그 눈빛 낯이 익어 한참 바라봤지만

난시가 깊어졌나,

이름도 잘 모르겠다

시간의 녹슨 파편이 낮달로 걸린 오후

은밀하게 징거맸던 앞섶 이냥 풀어놓고

곱하고 나누다가

소수점만 남은 봄 날

화르르!

깃 터는 목련, 빈손이 사뿐하다

18. 2010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시조

뼈의 기원

안병호

1.

문득, 뼈가 시려오면

내 뼈의 아득한 시원을 찾아

눈과 바람의 길을 걸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이

대체로 나의 문명이지만

그것은 비석에 판각되거나 정의되어진 것만이 아닌

단단한 그 무엇이 내 속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말 속에도 뼈가 있다하고

문중의 아재 한 분은

바람조차 투명한 뼈를 지니고 있다하므로

뼈는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모든 족속은 그 조상으로부터

몇 개의 맑고 흰 뼈를 물려받아 사는 동안

또 한 생이 고요히 마감되는 것이다

“뼈가 시릴 적엔 몇 모금 음복술로 덥히면서 오백년 전, 통정대부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삼십대에 무슨 사화로 졸(卒)하신 당신, 처자식은 관노가 되고 그 때 당신의 눈물은 눈발이 되어 사방 백리까지 날렸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뼈마디마다 수수눈꽃을 피우면서 아버지와 저의 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발 속에도 맑은 뼈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가 졸(卒)하시던 그 때처럼”

2.

아버지는 신발공장 공원에서 출발하여

생의 마지막 즈음 공사판 반장직에 올랐는데

젊은 나이에 병으로 졸(卒)하셨다

그 때 아버지는 뼈만 남은 문양으로

어린 내 손을 꼭 잡은 채, 흐린 물기를 보였는데

물기는 뼈를 타고 흐르다 서서히 결빙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앙상한 뼈의 모습이

너무 무섭고도 생경해 입관 하던 날조차

차거운 뼈를 따습게 데우지 못했다

그 날에도 먼 곳에서부터 눈발이 날려 왔고

오래지 않아 강아지처럼 여린뼈를 가진

내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 오늘 밤 수북이 눈이 내립니다. 눈송이 송이마다엔 당신의 눈물이 담겨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북편에서 날리는 눈발에는 종가에 계자로 와 당신 집안은 절손 된 9대조 조부님의 눈물도 보입니다. 저와 아이는 오늘 같은 밤이면 뼈를 살포시 맞대고 세상을 꿈꿉니다. 그래서 눈 오시는 밤은 참으로 마음 따습습니다.”

3.

뼈가 잘 맞물려서 사계절을 보냈다

펼쳐진 시간 속에서

나의 뼈는 좀 더 유연해지고

아이의 뼈는 좀 더 옹골차졌다

몸속의 뼈들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순하게 낮추는 오늘,

뼈마다 하얀 풀꽃이 피어난다

향불을 피우는데 음력 시월 을해(乙亥)

이른 눈이 축문과 함께 투명하게 날린다

기서유역氣序流易

상로기강霜露旣降

첨소봉영瞻掃封塋

불승감모不勝感慕

근이謹以

청작서수淸酌庶羞

지천세사祗薦歲事 상尙,

향饗

“당신들께서는 하얗게 뿌려지는 눈으로 혹은 투명한 축문의 곡조로 살아오십니다. 맑은 눈발 속 나폴 나폴 떠다니는 어린 것이 또 다른 뼈의 기원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뼈를 추스르며 어린 뼈를 돌보려합니다. 아이를 가만히 껴안아봅니다.”

19. 2010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제비꽃 향기

김 은 아

생선뼈만 남은 개 밥그릇에

개미가 아우성이다

시간이 지나자, 삶의 살을 뼈만 남긴 채

말라가는 빈 밥그릇에서

시간을 붙잡고 보시를 하는 중이다

한 때

거친 바다를 헤엄쳐

푸른 꿈을 키웠을 너

어쩌자고 사람들 입 속까지 들어와

피와 살이 되고 마침내 개 입에서

생을 마감하는 너에게서

제비꽃 향기가 난다

햇볕이 개 밥그릇을 헤집는데

생선뼈는 온 몸으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

비워라, 그릇

20. 201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황종권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사리 : 달은 음력 한 달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보름과 그믐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 위에 있게 되는데 이때는 태양의 인력이 합쳐지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되며 ‘사리’라고 한다.

21. 201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5월, 누에고치

이상선

넉 잠 든 잠실에 들면 반투명 누에드이

큰스님 넉넉한 손처럼 가진 것 죄 내줄 때.

이따금 명주실 같은 부드러운 바람결이

자디단 물비늘을 은어 떼로 풀어놓고,

풀벌레 달빛 속에서 반짝반짝 울고 있다.

지는 꽃의 뒷등마냥 적막한 누에고치

길을 버린 누에들은 곡기마저 물리친다,

폭폭한 제 속울음도 다 퍼내지 못하고.

마분지 빛 흐린 날의 장막 한 겹 걷어낸다.

얼음 박힌 동치미국, 할머니 손맛 되새기며

시렁 위 채반에 올라 가만가만 숨 고름다.

호박벌은 귓전에서 풀무 소리 잉잉대고

가느스름 눈 뜬 채 장엄 열반 꽃 둥지 엮는,

한 살이 터억 매조지한 울 할머니 뒤태 같다.

22. 2010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찔레의 방

오영민

병원 문을 나서다 하늘 올려다 본다

아기인 듯 품에 안긴 찔레 같은 어머니

기억의 매듭을 풀며 꽃잎 툭툭, 떨어지고

잔가시 오래도록 명치끝 겨누면서

수액 빠진 몸뚱이로 물구나무 서보라며

먼 바다 어느 끝으로 내몰리는 나를 본다

파도 끝 수평선은 붉은 줄 내리 긋고

굽 닳은 하루해가 출렁이다 멈춰 선 곳

익명의 불빛이 와서 꽃잎으로 흔들린다

23. 2010 부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해토머리 강가에서

김환수

갯버들 가장귀에 물구나무선 눈먼 햇살

풋잠 든 하얀 잎눈 이따금 들여다본다.

도톰한 봄의 실핏줄, 돋을새김 불거지고.

물비늘 풀어헤친 낯익은 수면 위로

명지바람 건듯 일어 빗살무늬 그려내고

웅크린 이른 봄날을 종종걸음 재우친다.

귓가에 기웃거리는 자갈밭 여울물 소리

백일 남짓 어린애가 옹알이하듯 재잘대고

산그늘 조금씩 끌어당겨 정수리를 덮고 있다.

몇 겹의 물굽이가 수만 번 날을 세워야

딱지 앉은 상처처럼 푸른 문신 새겨낼까

겨우내 숨죽인 강물, 접힌 허리 쭉쭉 편다.

24. 2010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아버지와 바다

조춘희

아버지,

수면을 두드리지 마세요

수평의 긴장을

간신히 지탱하는

해저의 섬과 섬 사이

안간힘을 보세요

아버지,

낚싯줄을 던지지 마세요

거멀못 박아둔 자리

새물이 차올라

파도는

푸른 비린내

바다를 토막내어요

아가야,

염려말고 바다를 보아라

달을 안고 뒤척이는

바다의 설렘을

지금 막

사랑을 품고

마음 붉어지는 찰나란다

25. 2010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숯의 노래 외 5편

조미선

일어서면

어김없이 뼈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우두둑 소리 높여 노래한다며

텔레비전에서

채용박람회 72세 할아버지

‘일자리만 주신다면 젊은 사람 보다

더 잘 할 자신이 있다오’

그 힘 자랑에

시간의 허물 벗은 숯

얕은 잠결에 문 틈 열고 들어오며

탁, 탁 튀는 노래 부른다

그 소리에

아직 하얗게 태워야 할 몸

많이 남아있다고

할아버지

타박타박 숯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2) 달맞이꽃

게으른 사진작가

견우와 직녀 만남의 순간포착 위해

지구 한 가운데 벌써 몇 시간째

바짝 엎드려 숨결 조율한다

메모리 카드에서 살아온 날들 되돌려

생의 뒷길 스리슬쩍 지워버리는

디지털 카메라

그 보다 수동카메라 들고 온몸이 기억하는

차디찬 상처들을 툭툭 건드리며

틈만 나면 늘였다 줄였다

스스로 딱지를 밀어내다가

가만가만 속살을 다독여

절대로 가볍게 지지 않을

한 송이 꽃이길 고집한다

3)가시연꽃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김씨는 세상길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온 마음에 촘촘히 박혀있는 가시를 매번 초심으로 읽는다 바싹 마른 기억들이 경련을 일으킨다 세월의 저편에서 건져 올린 둘둘 말린 젖은 시간에 눈빛이 흐려진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십 삼세 때부터 자장면 배달과 공장으로 돌았지만 호주머니는 늘 먼지만 쌓였다 공사장에 친구 보러 갔다가 작업복이 발목을 잡았다 그날부터 십이 년을 내 시계추는 집과 현장을 오가며 청약저축통장, 적금통장의 배를 채우는 맛으로 성질이 불같은 미장이 따라 다녔다 시간의 가지를 똑똑 꺾었다 온갖 잡일과 뒤치다꺼리 이년 만에 서투른 미장이 ?다

일이 끝나고 바람이 슬쩍 어깨를 치면 온몸이 무너져 내린다 밤마다 파스는 내 몸을 재구성 하며 어둠에 꼭꼭 숨어 있는 별을 찾는다 아무리 창문을 닫아도 창 밖으로 불빛 솔솔 새어나오는 앞집 엿본다 언제쯤 이 눅눅한 방을 저 따뜻한 빛으로 채울 수 있을까 헐거워진 삶을 조이듯 오래도록 눈을 감고도 잠들지 않는다

4) 수틀에 끼우다

오십 넷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

첫 밤꽃이 생을 데우는 밀서 수시로 보내자

온 몸이 스멀스멀 숱한 말 싸잡아 구절양장 마음 길 밝히며

여느 때와 같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인데

베갯머리에 바다가 수놓아지자

질퍽한 비린내 찰랑찰랑

그 소리 잡아 수틀에 끼우다

은장도 품은 달빛 쉴새없이 굽이치는 것인데

빈 백지 꿈은 방안을 헤매 다니다

잠든 아이들 등대 빛으로 눈에 확 들어오자

싹뚝 거물을 자른 것인데

은빛 물고기 한 마리 영역 넓히며

물속으로 자맥질 하는 것인데

야금야금 축낸 마음 내려놓은 듯

초행길 돌고 돌아 돌아도 그 자리

불면의 밤이 얇아진 어둠 알 톡 떨어트리자

창밖으로 몸살 무심히 흩어지는 것인데

5)동백꽃 지다

밤마다 핏물 몽올몽올 맺히는가

가슴속 얼마나 끓어오르기에 후벼 파놓은 상처

이미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 대신 아내가 털실로 떠준 검정 모자 잠결에도 귀밑까지 내려쓴다 낯선 발걸음에 작은 손거울로 거무스름한 얼굴 슬쩍 엿보며 꼼꼼히 넣어둔 적금통장 아내의 까슬까슬한 모시 손에 꽉 쥐어 주곤 눈길 한번 맞추지 않는다 괜스레 오래 참았던 가시돋힌 말들만 종종 게워낸다

결국 진통제 한 알 약효 믿지 못하고

항암 치료 1007호 그 남자

새하얀 침대커버 찢어 만든 끈 화장실 문에 걸고

숨 줄 스위치 딸깍 내린다

머리맡에 놓인 가습기 센서가

수조에 물이 없다는 붉은 신호를 길게길게 보내고 있다

창 바깥에선

늦은 봄날이 동백꽃 한 송이 툭, 떨어뜨리고

6)감나무에 가을 숨어들다

콩 다 털어낸 쭉정이 모아

군불 지피던 부지갱이가 가마솥 이마를 두드린다

늙은 창 한 가락이 젖어든다

그새 골다공증 앓는 다리뼈가 찬 바람 길인

구멍 사이 사이로 훈기를 집어넣고 있다

“여보, 상사 눈치 요리조리 살피며 어쩌다

쨍하니 추임새 들어도 꽝꽝 얼어 버리는

자식들 발가락, 손가락 데울

아랫목 따뜻한지 소식 한번 넣어볼까”

툇마루에 걸터앉아 무말랭이를 말리던 어머니

“홍시 다 떨어지자 까치도 오지 않는

빈 감나무 그늘에 또 가을이 숨어들었군요”

서걱서걱 바람에 여윈 불빛이 떨린다

목화솜 이불 어깨에 두르고 앉아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꼭꼭 눌러 쓴다

그 편지 속 거친 손끝이 닦아놓은

허공 길 등뼈로

아버지 낮은 허리가 또 한번 땅 끝까지 꺾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