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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시와 등단시

2013 신춘문예 당선 시 모음 (조선/동아/한국/경향/매일/세계/한경/부산)

    <조선일보>
    손톱 깎는 날

                                             김재현



    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김재현
    1989년 경남 거창 출생. 경희대 국문과 재학 중.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31/2012123100991.html



     

      <동아일보>

         

      가난한 오늘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출처 -

      시 -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77750/1

      심사평 -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77798/1

      당선소감 -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77772/1

         

       

      ***  

         

         

      <한국일보>

       

      쏘가리, 호랑이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출처 -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212/h2012123118353184210.htm&ver=v002

         

         ***  

       

      <경향신문>

         

      녹번동

      이해존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312158565&code=960100

         

      ***

       

      <매일신문>

         

      쇼펜하우어 필경사

         

      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 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출처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8078&yy=2012

         

       ***

         

      <세계일보>

         

      히말라야시다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출처 -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21231022558&subctg1=&subctg2=&OutUrl=nate

       

       ***

       

      <한국경제>

         

      화병

      김기주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한 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출처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123173901

       

       ***

       

      <부산일보>

         

      네팔상회

         

      정와연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출처

      시 -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101000010

      당선소감 -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101000012

      심사평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