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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시와 등단시

2009신춘문예시당선작25편모음



<한겨울 한파 속에서도 쇼윈도는 빛나고>

2009신춘문예시당선작25편모음

1)조선일보 2)동아일보 3)대전일보 4)매일신문 5)부산일보

6)전북일보 7)국제신문 8)경남일보 9)서울신문 10)한국일보

11)문화일보 12)경인 일보 13)영남일보 14)광주일보 15)강원일보

16)불교신문 17경향신문 18)경남신문 19)경상일보 20)한라일보

21)무등일보 22)전남일보 23)농민신문24)동양일보 25)뉴스제주영주 ------ <무순>

1.[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오늘은 달이 다 닳고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2.[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술빵 냄새의 시간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3.[2009 대전일보 신춘문예]

비 온 뒤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4.[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5.[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담쟁이 넝쿨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6.[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입춘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7.[2009 국제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도미솔(도순태)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명왕성은 남편의 별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8.<2009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등산 오르기

박정이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어린 시절의 우리 아버지의 등이거나

할아버지의 등이다

밖으로 나가 일하시다가 돌아 온 아버지는

언제나 그 등을 내게다 허락 하시고

나는 세상을 나가지 못했지만 그 등을 타면서

세상은 따뜻하고 든든 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방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재떨이에

담뱃대 톡톡 터시고 기침 몇 번 하시고 난 뒤

담뱃대 높이만한 굽은 등을 내게 주셨다

등에서 내려와 본 세상은 사랑방만 하지만

시시각각 끓는 사랑방 온기로 하여

세상은 아침에서 한밤까지

가득가득 끓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세상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등이

산으로 솟아있고 나는 그 따뜻한 등을 등으로

오른다고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싶을때

산은 억새풀 무더기로 쓸리고 쓸리는 소리

내게다 허락하고

할아버지 기침 소리 듣고 싶을때

산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 아래로 내려 보내고

내려가다 남는 소리 내게로 허락한다

아,세상은 나날이 가파르고 언덕배기 작은 골에도

숨이 막히는데 숨이 차고 차서 넘칠때

나는 등을 오른다 등에서 세상은 들녘처럼 편안하고

등에서 세상은 제일 낮은 사람의 목소리

대샆을 돌아 겨우 겨우 돌아 나오는 바람소리를 낸다

그 바람소리

눈물이 나는 소리 같지만 내 어머니의 치마

치맛자락에 얼려있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이거나

우리 가문이 키워내는 가풍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등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등 아래 사는 사람들의 눈 높이로 흐르거나

그 높이로 흐르는 굽 낮은 하늘 바라보는 자리,

무언의 자리이리

하늘에 구름이 무리지어 흐르고

무등은 그 자리

한 번도 어디론가 떠나가지 않고

우리집 종손이신 아버지처럼

또 할아지처럼 등으로 말하고 등으로 살고 있다.

9.<서울신문 2009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녁의 황사

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10.<한국일보>

무럭무럭 구덩이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11<문화일보>

즐거운 장례식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12.<경인일보>

글에서 온 풍경

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떼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람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이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날들은 불안한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알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싸

그 옛날 그 땅에 고엽제를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의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기어 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힘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13.<영남일보>

나무의 공양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14.<광주일보>

증명사진

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15.<강원일보>

관계 1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한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16.<불교신문>

가게 세 줍니다

유금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가게에 봄이 한창일 때는 산들바람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주 고객 이였는데요 창업에 성공한 사례였어요.

참새들은 날개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요. 가위로 꽃대를 자르다 서로 눈이 부딪치면 재재거리며 웃었어요. 앗! 그때 여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어요.

가을이 이삿짐 트럭을 타고 지나간 다음 날 나는 보았죠. 양은냄비 브래지어 구두 숟가락들이 낙엽이 되다니 아스팔트 바닥에 나 뒹굴다니

비 내리던 가을 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꽃방은 다시 문을 닫았어요. 가랑잎 한 장만한 쪽지를 붙여 놓았지만 겨울 내내 가게는 나가질 않았어요. 가게 세 줍니다.

17.<경향신문>

맆 피쉬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18.<2009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내압

이병승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옥상 바닥

시원한 물을 뿌려주려고

잠가 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거침없이 몸을 흔드는 고무호스

긴 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시뻘건 각혈과 마른기침이 노래로 변하고

늘어졌던 마음의 통로에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른다

사방에 뿌려대는 열정의 땀방울들

더 이상 짓눌린 눈물이 아니다

무지개를 띄워라 거침없이 신나는 춤사위

꼼짝 말라고 두 발로 밟아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딴딴해지는 오기의 몸짓

그 정도 힘으론 날 못 누르지

흐물흐물 늘어진 생은 끝났다는 저 팽창의 힘

자기를 채워 흘러넘치는 나눔의 통로

채워라, 터질 듯이 채워라

내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려 솟구쳐

신명나게 춤추는 고무호스

건너 집 옥상 화단, 벽에 매달린 넝쿨까지 살리고

스스로 뜨거워 목마

19.<2009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童話)

정원

봄은 아이들 시린 손끝에서 왔다

골목 안은,

어김없이 가위질 소리로 짤랑거리고

덩달아 온 세상 흰 밥풀꽃 가득한 뻥튀기 소리

와아, 골목 안 가득 풀려나오면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이 되는 아이들

달그락달그락 알사탕 같은 꿈들은 호주머니 속 숨겨둔

꽃망울처럼

시린 바람 끝에서도 붉었다

햇살에 투영되는 꽃무늬, 유리알 속엔

알록달록 봄을 틔우는 화원(花園)이 열리고

동네 골목골목 안은 그 화음에

구슬 같은 아이들의 눈빛으로 가득 채워지곤 했다

냄비, 헌 세숫대야, 그렇게 찌글찌글한 “찌글이” 아저씨는

아이들 입에서 동실동실 허연 엿가루의 봄날을 띄우고

봄바람에 갈라 터진 손등, 닳아빠진 소매 깃엔

이따금 춘삼월을 어루는 흰 조팝꽃 같은

이른 봄빛이 마구 피어오르곤 했다

골목 길,

아이들 하나 둘 길 위에 비워지고

전등불 스윽 노란 개나리꽃 한 다발 피워낼 즈음

봄날은 그렇게 장난기 많은 얼굴로

아이들의 긴 그림자 꼬리를 물고 서 있곤 했었다.

20.[200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오래된 잠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21.<2009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윤은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 대구 수성구 파동 664번지에 있는 카페

22.[200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기와 이야기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23.[2009년 13회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당선작]

냄비 속의 여자

강성남

1

화기를 가하는 건 늘 내부 쪽이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불은 두꺼운 바닥을 투과하여

이마까지 달군다

속이 비치는 뚜껑

꽃망울처럼 부푼 목젖과

허파 밑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보인다

방울토마토 같은

레몬 같은

타이레놀 같은

둥근 시간들이 그녀 안을 떠다닌다

정작 그녀 자신은

제 속을 볼 수 없어 바닥을 새까맣게 태울 때가 많다

2

바닥이 다층인 그녀

확 끓어올랐다 파르르 식어버리는 성깔이 아니다

급작스런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함부로 열을 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쪽 창으로 들어온 날 선 빛 한줄기

옆구리에 박힌다

빛 날에 긁힌 기억 속으로

두레박줄을 풀어 내린다

햇살과 바람으로 파도치던 시간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달콤한 시럽약 맛

쓰디쓴 가루약 맛

통증의 맛을 구분하는, 목구멍 씁쓸한 그녀

하얗게 불린 침묵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열에 들뜬 이마 점점 달아오르고

뿌옇게 흐려진 안부, 끓기 시작한다

내장 뜨거운 짐승이 푸른 눈을 뜬다

24.<15회 동양일보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

휠체어 달리기

김 봉 래

신체의 일부가 되기 전에는 단지 고철에 불과 했지만

운명처럼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쇠붙이,

어쩌면 저 두 개의 바퀴는 생전에 불도저였었는지도 몰라

그저 보행 보조기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기에는

넘쳐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어

저렇게 속도를 즐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강력하게 추진하는 좌우의 은빛 휠 위로

터질듯 솟아오른 이두박근이 태양을 향해 꿈틀 거리고

질주하는 전차의 엔진은 무리한 펌프질에 목이 타지만

이 정도의 트랙은 사막도 아니지

치기어린 한 때, 경계 지은 하얀 선을 무심히 넘나들다

과속트럭에게 두 다리를 모두 주고난 후에도

규칙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을 허비 해야만 했어.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져 코너를 돌다

다시 힘차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바퀴들에게

생의 고비가 직선의 레인 일 수는 없는 거라고 위로해 봤자

그것은 아주 궁색하고 초라한 구호품 정도인 게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력을 다하는 나머지 생 앞에

순위는 그저 순위일 뿐 각 주자의 결승점은 각자에게 있는 것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록과의 경쟁이지

신체의 일부가 되어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운명 같은 저 쇠붙이.

25.<2009 뉴스제주 영주신춘문예 시 당선작>

선물

윤이산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 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습니다

몇 년 만에 둥근 상에 모여 앉은 남매는

뒤늦게 당도한 안부처럼 서로가 민망해도

어머니 앞에선 따로 국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엔 밥통이 없어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었지예

어데, 묻어둘 새나 있었나 밥 묵드키 굶겼으이

칠남매가 과수댁 귀지 같은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모으다가

가난을 밥풀처럼 떼먹었던,

양배추처럼 서로 꽉 껴안았던 옛날을 베고

한잠이 푹 들었습니다

문밖에는 흰 눈이 밤새

여덟 켤레 신발을 고봉으로 수북 덮어 놓았네요

하얗게 쏟아진 선물을 어떻게 받아얄지 모르는 어머니

아따, 느그 아부지 댕겨가신 갑따

푸짐한 거 보이, 올핸 야들 안 굶어도 되것구마이

미역국처럼 뜨끈한 묵소리를 싣고

일곱 남매가 또 먼 길을 떠나는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