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시

예수를 리메이크하다/문세정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문세정

그는 늘 트로트 찬송가를 부르며 나타난다

목에 걸린 소형 녹음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지하철 호선 구간을 뱅뱅 돈다

칸칸마다 음표처럼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하루 종일 연속 재생되는 그의 노래

언젠가,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변하고

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약해지고부터

그의 찬송가는 트로트 버전이 되었다

<샤론의 꽃 예수>를 4분의 4박자로 꺾었고

흥겨운 대목에선 바이브레이션을 넣기도 했다

한 소절 한 소절 깜깜한 세상을 귀로 읽으며

새 음표를 붙이고 장조를 바꾸다 보면

아주 가끔씩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는

동전소리도 그의 귀엔 취타악기음으로 들렸다

퇴근길 풀죽은 몸들을 싣고

지루한 음보로 달리고 있는 객차 안

아주 느린 몸동작으로 악보를 넘기듯

다음 칸을 향해 그가 나를 지나쳐가고

중간 중간 박자를 놓친

지하철이 황급히 허리를 틀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 문세정 첫시집,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문학세계사, 2008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마디/정재록  (12) 2008.02.23
내 마음의 연약지반구역 /문세정  (1) 2008.02.23
비의 집/박제천  (3) 2008.01.14
눈의 집/박제천  (7) 2008.01.01
종이의 집/박제천  (3) 2008.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