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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종이의 집/박제천

종이의 집

박제천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내는 종이에 글씨를 쓰지요

나 역시 40년이나 종이와 함께 살았어요

종이 한 장 펴놓으면, 세상이 다 내세상 같아 뿌듯했지요

이세상의 기쁨은 물론 저세상의 죽음이며 고통도 만났지요


내게 있어, 종이는 내 살이었어요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나는 그 종이의 집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종이마다 내 삶을 써놓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못이 되어 내 삶을 벽에 박아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며 바다를 종이 삼아

새와 물고기, 파도와 비바람으로 글씨를 써보았지만

그것들 역시 덫이 되고 닻이 되었지요


이제 나는 눈으로 종이의 집을 만듭니다

내리는 눈송이, 눈송이마다

눈이 있고, 가슴이 있고, 물과 불로 반짝이는

눈송이 종이를 만들지요

눈송이 종이에 하염없이 써나가는 글씨들은

내가 미처 보기도 전에 물로 사라진답니다

물이 되고, 공기가 되는 그 반짝임,

그 반짝임에다 나는 오늘도 글씨를 쓰고 있어요.


옛사람들도 처음에는 풀잎이나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지요.

아니지요, 그 처음엔 나처럼 마음에다 글씨를 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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