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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바닷가 민박집/이생진 바닷가 민박집 이생진 바닷가 민박집 여기다 배낭을 내려놓고 라면 상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커피 한잔 옆에 놨다 오른 쪽 창문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면 됐어’ 이건 거창하게도 내 인생 철학이다 철학이 없어도 되는데 80이 넘도록 철학도 없이 산다고 할까 봐 체면상 내건 현수막이다 ‘바다가 보이면 됐어’ 인사동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낙원호프집에서 부르는 구호도 이거다 그런데 이 민박집에서는 진짜 바다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호프집보다 이 민박집이 좋다 바다는 누가 보든 말든 제 열정에 취해 여기까지 뛰어든다 그 모습이 나만 보고 달려오는 것 같아 반갑다 다시 돌아갈 때는 모든 이별을 한꺼번에 당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바다가 창 밖에 있으니 보호자 옆에 있는 것 같아 든든하다 *** .. 더보기
바다 때문에 술을 마신다/이생진 바다 때문에 술을 마신다 이생진 그러나 나는 외돌개*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굳게 다문 입을 열어 술을 마신다 아무리 마셔도 메워지지 않는 공백 그 공백을 메워주는 바다가 있어 나는 바다 앞에서 술을 마신다 끊었던 술을 왜 다시 마시느냐 바닷가에서는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진다는 속설(俗說)에 속아 술을 마신다 *외돌개:서귀포시 천지동에 있는 바위섬. 높이 20m로 삼매봉 남쪽 기슭에 있음. **며칠 전 다녀온 제주도 올레길 7번코스 하이라이트... 27년만에 본 외돌개는 더욱 아름다워졌다면, 지나친 미화일까? 이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생진 시인의 시가 문득 떠올라 적어본다. 더보기
침향沈香 매향埋香 외 /정호정 침향沈香 매향埋香 정호정하늘을 봐도 구름을 봐도숲을 봐도 물을 봐도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서향瑞香나무는 베어놨는데하늘에 묻어야 하나구름에 묻어야 하나숲속 물속 어디에 묻어야 하나생각의 실마리를 찾아가는데문득 가슴이 저려왔다 아리고 아리다순정한 시절의 아름다운 생각들눈물이 났다향기의 서향나무들천년을 바라 내 안에 묻어두기로 했다.이중섭의 아이들벌거벗은 아이들이엎어지며 자빠지며다섯 개의 동그란 발가락들을발딱발딱 들어 보이는데,물고기를 낚으며물고기를 안아보며물고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게와 나비와 꽃들과도 어울려 노는데잘 노는 아이들 중에 어느 한 아이도진짜 이중섭의 아이가 아니라수군대는 사람들틈에서나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와한참을 걷고 걸어도아이들 뒹구는 모습 아물아물오래도록 눈에 삼삼하였.. 더보기
부처님 소나무 외 4편/이영신 부처님 소나무 목포에서도 멀리 더 멀리 나가 앉은 홍도 단옷섬 절벽엔 소금 바람소리에 키가 자라지 않는 소나무 한 그루 살고 있다. 발아래엔 풍란 한 포기 키우질 않는다. 빠돌 하나도 거느리지 않는다. 혼자 살고 있다. 친구도 먼 친척도 하나 없다.저녁때면 이장을 맡은 낙조가 불그름해진 채로 한 번 휘익 돌아보고 갈 뿐 검푸른 바다 들판에 돔, 농어네 가족 희희낙락하는 것 물끄러미 바라보고, 시간이 들여다보고 물러나면솔잎 옷 어쩌다 갈아입고… 한 번도 ‘호젓하다’ 말하지 않는다.입이 무겁다.차마고도 , 캐러밴자칫 헛디디기만 해봐라수심 600미터의 호수,어디 어림짐작이라도 해봐라나의 살나의 머리카락나의 뼈나의 정수리 백회혈짙푸른 호수 속에는정결한 제사상이 하나 놓여있네. 묵묘墨墓 쑥부쟁이 칡덩굴 가시여뀌 .. 더보기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 외 3편/손옥자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손옥자유난히 재능이 많던 내 친구가 파산 신청을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서울역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 지하도를 간가바짝 웅크린, 동그랗게 몸을 만 늙고 어린생들이저마다 몸에 봉오리 하나씩 달고 누워있다작년 봄이 흘리고 간 물오른 가지처럼볼록볼록 봄을 품었다저들이 철쭉이 만발한,며칠 지난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지만저들은 지상으로 나오기 위해활화산처럼 허리를 세우고숨 죽여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지하도로 낮게 들어오는 바람이 신문지를 들썩거리며 검은 활자들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격자무늬 소리를 내면서따각따각 따가닥따가닥 모나게 떨어진다 따가닥따가닥 말밥굽 소리 어설프게 들린다 계단을 오르며 내리며 바쁘게 아침을 몰고 가는 소리 몰고 오는 소리 차가운 소리들 어지럽게 들린다.. 더보기
아를르의 별이 빛나는 밤 외 3편/최가림 아를르의 별이 빛나는 밤 최가림 의자는 빈센트 반 고흐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듣는 소리가 궁금한 것이다 이 세상엔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게 거기에 놓여 있는 황갈색 침대 하나, 그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그가 밤이면 꾸는 꿈이 궁금한 것이다 떠나고 돌아오고 또 다시 떠나는 열차처럼 침대는 차 있음과 비어 있음의 반복이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는 별이 빛나는 밤 속에 묻어둔다 아를르의 쓸쓸한 풍경을 묻어둔다 이 세상에는 갈 수 없는 곳, 끝내 닿을 수 없는 곳도 있다 그는, 기다려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그것들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있다. 일출 조개들은 화롯불 위에 나란히 눕는다 점점 뜨거워지는 불길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뒤챈다 죽을힘을 다해 여미고 있던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더 이상 견딜 수 .. 더보기
자전거 안장을 누가 뽑아갔나 외 4편/박순덕 자전거 안장을 누가 뽑아갔나 박순덕 이 동네에서만 벌써 세 번째다 가볍게 몸을 얹고 중심을 잡아 달릴 수 있던 자리 두 다리가 맘 놓고 걸터앉아 폐달을 돌리던 곳 집에서 회사까지 오가는 동안 내 가늘고 보푸라기 진 길을 둥글고 보드랍게 감아주던 길패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출근해 보니 책상 치워져 있던 그 어느 날 같다 나는 하릴없이 주저앉아 폐달을 돌려본다 체인만 돌 뿐 바퀴는 그 큰 눈만 멍하니 뜨고 멈춰서 있다 안장이 뽑힌 자전거의 목에서는 녹슨 피가 엉긴 듯 흐르고 있다 참수형을 당한 듯한 이 안장 없는 자전거를 나는 또다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집에까지 끌고 갈 것인가 새 안장을 씌워 또 한 번 삶의 길을 둥글게 감아 볼 것인가 아예 이번 기회에 그를 버리고 맨발로 혼자 걸어가 볼 것인가 손잡이를.. 더보기
제논의 화살 외 3편/강영은 제논의 화살 외 3편시애틀의 배션 아일랜드에서 자전거나무를 본다허공에 매달려 있는 자전거의 두 바퀴가커다란 꽃 같다녹슨 바퀴 꽃 살대마다 지나가는 햇빌,내 눈에는 자전거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나무가 껴안은 시간 속에서 자전거가 계속 달리고 있는데도우리 눈이 멈춰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모른다유심히 살펴보니허공 길을 수직으로 달리는 나무와둥근 길을 나이테 속에 내려놓은 자전거가서로의 속도를 껴안고 있다달려오던 속도와 뿌리박힌 속도 중 어떤 속도가페달을 내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한 영혼이 또 다른 혼에 머문 것처럼서로의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속도가 속도를 껴안는 순간, 저, 자전거나무더 이상의 과녁이 필요 없다는 듯딱, 멈춰 섰을 것이다통과할 수 없는 시간이 각막에 달라붙은거기서부터내 눈먼 사랑도 벌겋.. 더보기
중심은 사랑이다 외 3편/박남주 중심은 사랑이다박남주배를 타 보았다 무심히 뱃바닥을 들여다 보았다패어진 홈에 널빤지들이사개를 박고 단단히 맞물려 있다서로의 몸 속 깊숙이 제 몸을 밀어 넣고 있다물 한 방울 바람 한 줄기 햇빛 한 오라기 새어들틈 없이몸을 맞대로 상대방 몸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다뱃속에 모아둔 정기,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고 있다온몸을 내리누르는 하중은 주제할 수 없는 사랑의 무게로가뿐하게본시 제자리였기에처음부터 한 몸이었기에한 치의 오차도 없이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한눈을 팔거나 중심을 잃지 않기중심은 사랑이었다문경 관음리 조선요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 그 속은 맑고 깊고 고요하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흙, 물, 바람과 뒤엉키는 그 어울림의 흔적을 내보이지 않는다 고요히 흙 속으로 스며들어 제 빛깔과 숨소리를 불어넣는다 .. 더보기
꽃등신불 외 2편/정재록 꽃등신불 정재록 선암사 대웅전 뒤란에서 철쭉을 본다진분홍 색 하나로 법열이 철철 넘치고 있다그렇지, 색은 몸으로 터득하는 도가 아니던가色자 화두 하나 받들고 동안거에 들었던 것이다법당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독경소리에도오직 色자 하나만 귀에 꼭꼭 들어와 박히던 거였다색을 끊으려 하면 할수록 색은 단전을 거쳐심장을 지나 정수리까지 차오르던 거였다저 단전에서부터 색을 밀어 올리는 것이다밀리고 밀려서 왈칵 넘쳐버린 색의 이 고인 물깨달음이 어찌 저 혼자만이 누리는 화엄세계일 것인가네 안에서 박차고 나온 색을 남김없이 비워그 농염한 진분홍으로 세상을 가득 채워라네 몸을 진분홍 꽃잎으로 터뜨려중생의 허랑한 영혼을 색으로 가득 메워라사람마다 진분홍의 황홀경을 눈뜨게 하라절집의 뒤란에 철쭉을 심어 색을 밝히는 뜻내 몸.. 더보기
풀꽃들의 나라/고정애 풀꽃들의 나라 고정애아파트 외벽은 아득한 낭떠러지실금으로 갈라진 콘크리트그 틈새에 깃들어 살고 있는 삶을 본다설마 하면서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볼 수 있는작디작은 생명의 조촐한 잔치여리고 가난한 연두빛 풀들이 유연하게 흔들린다천둥번개 내리치고 비바람 세차게 휘몰아쳐도칠팔월 불사르는 땡볕에 초죽음 다 되어도맞서지 않고 꺾이지 않는 초연한 네 모습높이 솟고 넓게 자리한 아파트 나라에서콩크리드 외벽 실금으로 갈라진 틈새에서주어진 대로금세의 삶오순도순 보금자리 꾸미고 있어청량한 맥박소리 울린다여섯 장 연분홍 꽃잎 펼친꽃 서너 송이 거느려 살고 있는풀꽃들의 나라, 향기로운 그 나라 --고정애 시집 '사랑 에너지' 중에서 -- 전남 목포시 출생시집 '연필깎기' ,' 튼튼한 집', '사랑에너지'일역 '105한국 시인선.. 더보기
꽃다지와 느티나무/배인환 꽃다지와 느티나무 배인환얼어붙은 땅속 웅크린꽃다지의 실뿌리,잠자는 세계는경계의 저 건너하얀 겨울 넘어 노란 꿈앙증맞은 몸에 별을 달고 있다.겨자씨보다 더 작은느티나무 씨의 세계는백만 배의 몸통과 백만 배의 세월꽃다지의 별의 세계느티나무 잎 하나하나에 빛인 햇빛의 세계산들바람에 나풀거린다.이른 봄꽃다지는 서둘러 씨앗을 퍼트린 후 사라진다느티나무는 갈바람에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듯씨앗을 실어 보낸다.서로가 다른 세계,잠자는 씨앗의 컴컴한 자궁 속,삼세三世가나의 어딘 가에도 숨겨져 있다. -배인환 시집 '꽃다지와 느티나무' 중에서 -충남 금산 출생하여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한국시협, 한국문협 대전지회, 대전.충남수필문학회 회원이며, 공간시낭독회 상임시인이며 전원에서 동인이다.시집으.. 더보기
흔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이정노 흔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이정노나는 흔들리며 왔다버스에서 전철에서, 사무실에서는아래위로 때론 옆으로 흔들렸고예전엔 아들이 흔들렸다한때는 밥상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견고한 아파트에서 아버지가 흔들리고요즈음엔 남편이 흔들린다흔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 하지만내가 버즈두바이 초고층 빌딩처럼내면이 불안하게 흔들려도식구들이나 나를 보는사람들은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그들이 나의 흔들림을 보는 날 나는순간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시집 .'흔들리면 불안하다'중에서-- 이정노 시인2005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중앙대학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중앙대에서 예대인상 수상시집 '흔들리지 않으면 불안하다'(2009, 푸른 시인들) 더보기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고영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고영너.....라는 말 속에는 슬픔도 따뜻해지는 밥상이 살고너.....라는 말 속에는 눈곱 낀 그믐달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밤마다 새 떼를 불러 모으는 창초지 문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물구나무 선 채 창밖을 몰래 기웃거리는 나팔꽃도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등 떠밀어 희미해지는 바람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도 살고너.....라는 벼락을 맞은 뼈만 남은 그림자도 살고 ----시집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중에서 1966년 경기 안양 출생. .. 더보기
아름다운 것은 길을 낸다/이정자 아름다운 것은 길을 낸다 이정자산을 오르면서 산은 내게 인내를 가르치고산을 내려오면서 산은 내게 겸손을 가르친다강가를 거닐면서강은 내게 홀로 깊어지는 법을 가르치고그 어떤 기쁨이나 아픔도 흘러가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숲을 산책하면서숲은 내게 생존경쟁의 자연법칙을 알게 하고다양한 나무와 꽃과 새소리가 어우러진조화와 포옹의 아름다움도 알게 한다나의 뿌리이고 중심이고 우주인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산과 호수와 숲은아름다워 길을 낸다, 내고야 만다 ****************************************************************** '아름다운 것은 길을 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아름다운 것은 저절로 길을 만드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긍정적인 시인의 마음.. 더보기
자화상/최금녀 자화상 최금녀 기생이 되려다 못된 년들이글을 쓴다는김동리 선생님의 말씀으로화끈 달아오르는 내 얼굴,그 말씀에 줄을 달아준 분은더운 차 한 잔을 밀어놓고 사라지며"끼가 있다는 뜻"이란다그렇다 느지막하게 내린 신끼로 굿을 치고 다니는데선무당 사람잡는 소리가 등을 훑어내리고옷 속으로 식은 땀 쭉 쭉 흐른다애무당 하루라도 날춤을 추지 않으면아쟁이, 대금소리에 삭신이 아프고 저려서색색이 옷 차려입고 신바람을 맞으며동서남북 발길 안 닿는 데 없다세상만사 굿 한방이면 끝나는 듯작두날 위에서 물구나무 서며신끼 휘두르니 위태 위태하다소리도 배워 사설도 익혀한거리 제끼면 구경꾼도 모여들어 신기한 듯늦게 배운 도둑질이 가여운 듯 박수도 쳐주어신명 끓어 넘치는기생 못된 선무당이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