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리고 책

강영은 시집 `최초의 그늘`

출처 http://cafe.daum.net/Minerva21/OUlO/4

시인의 말

생각해보면,

나는 오랫동안 시의 밥이었다

詩야, 언제

내 밥이 되어줄래

2011년 10월

강영은

■ 표4

상상력의 ‘망막’에 유독 ‘나무’의 형상이 오롯이 맺혀 있는 시편들이 아름답고 절실하다. 그 ‘나무’가 “구름의 흉곽 뒤에 숨

은 새소리로 부풀어/크고 흰 빵”(「슬픔의 미각」)의 형상을 이룰 때, 우리는 초여름의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로 숨어 있

는 새들의 싱그러운 지저귐에 의하여 ‘구름’과 ‘흰 빵’의 풍요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나무’의 마술에 넋을 뺏길 수도 있으

리라. 하지만 ‘젖은 봉투’가 찢어지는 소리로 ‘나무의 내면’을 그려내는 상상력의 마술은 그보다 압권이다. 그 소리가 '숲

의 미간에서/새어나오는 비명' 이며 “내면의, 간절한 그 무엇이, 소리를 젖게 했는지”를 읽어내는 솜씨를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경호(문학평론가)

殺靑이라는 낱말이 있다. 애초 竹簡을 훈증할 때 섰지만, 지금은 찻잎을 덖어내는 산화효소의 활성을 더디게 하는 작업

을 듯한다. 이 시집은 슬픔의 모음을 덖어내는 전 경로에 바쳐진다. 그녀에게 지상의 모든 문장은 "꽃차례 없는 봄"처럼

황막하고," 발레리노마저 사라진 슬픈 체공"처럼 허허로운 " 마침내 읽을 수 없는 바람의 벼랑"일 분이다. 어찌 할 것인가,

이 모든걸 가마솥에 채곡채곡 쟁여놓고 슬픈 흉노족처럼 불을 지펴 덖어내는 광경은 고요하면서 쓸쓸하고, 쓸쓸하면서

아름답다.'붉은 달의 禁書'처럼. 하여 그녀의 '살청빛'은 종당 '수평선 밖의 썰물을 기다리는 폐염전'의 참을 수 없는 그늘

이다. 이것이 앞으로 강영은이 시를 놓지 못할 오롯한 이유다

-오태환(시인)

차례

제 1부 젖은 봉투


쏙 ㅡ 13

슬픔의 미각 ㅡ 15

환상방황 ㅡ 17

젖은 봉투 ㅡ 19

無花果ㅡ 21

살별에 대한 함의서 ㅡ 23

장미 탁본 ㅡ 25

쇠소깍, 남쪽ㅡ 27

죽음을 연구하는 나의 일주일 ㅡ 29

울음의 행방 ㅡ 31

벚꽃열차 ㅡ33


제 2부 바람의 금지구역


바람의 금지구역 ㅡ 37

우는 화살 ㅡ 39

침묵의 벽 ㅡ 41

피아노 ㅡ 43

핀다는 것 ㅡ 45

혼돈에 대하여 ㅡ 47

여름궁전 ㅡ 50

낭가파르밧에게 질문함 ㅡ 52

개기일식 ㅡ 54

유리사막 ㅡ 56

谷氷河 ㅡ 58

천 개의 門 ㅡ 60

에베레스트 ㅡ 62

말의 후손 ㅡ 64

破壁의 사원 ㅡ 66

엘슨타사르하이 ㅡ 68

나무를 사랑하는 법 ㅡ 70


제3부 거미의 수사학修辭學


병산 수묵화 ㅡ 75

백조의 호수 ㅡ 76

라르고 풍으로 ㅡ 78

먼지 화엄경 ㅡ 80

키스의 남방 한계선 ㅡ 81

나비, 날다 ㅡ 83

지붕과 바닥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 ㅡ 85

마흐의 띠 ㅡ 87

거미의 修辭學 ㅡ 89

안티고네를 읽는 새벽 ㅡ 91

무리수를 읽는 법 ㅡ 93

바실리스크ㅡ 95

악어가 인간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ㅡ 97

드럼세탁기에 관한 보고서 ㅡ 99

凹凸의 방식 ㅡ 101

아무르 강가의 멧노랑나비떼 ㅡ 103

자본주의에 대한 담론 ㅡ 105




제 4부 방의 연대기



방의 연대기 ㅡ 109

새로운 토템 ㅡ111

기하학적인 풍경 ㅡ 113

옷의 진화 ㅡ 115

이빨 ㅡ 116

전위적인 딸에게 보내는 편지 ㅡ118

으악새 ㅡ 121

왕소금 바다 ㅡ122

그랑자드 섬의 일요일 오후 ㅡ124

이상 기온에 대한 모놀로그 ㅡ126

달콤한 그늘 ㅡ 127

그를 훔치다 ㅡ129

詩人 ㅡ131

無花果/ 강영은

무화과는 당신이 좋아하는 열매

책장을 넘기며 무화과나무가 들어찬 숲을 상상한다

유래되지 않은 수유방식에 대해

농익은 향기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궁금해한다

암술과 수술이 교접하는 꽃방을 보여주지 않는 습속은

꽃자루가 비대한 무화과나무의 허와 실

아무도 몰래 꽃을 삼킨 둥글고 달콤한 생각의 뿌리에는

사슴뿔을 단 늑대가 서식한다

뿌리가 극단의 열매라면,

열매의 속살을 비집고 나온 본성을 바람이 먼저 흔든 것이다

바람의 혀끝이 부드럽게 닿았을 뿐인데 흘러내린 과즙은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긴 피의 맛

가지가 무르기 전에 여름이 왔다

내가 이미뿌리에 놓였으니 당신은 꽃을 보려고 하지 마라

꽃턱이 자란 열매는 꽃을 보여주느니 꽃 보다 먼저

자진할 것이다

하지 마, 하지 마, 두 마리의 짐승이 잎사귀를 흔드는 저녁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는 극단을 가린

최초의 그늘 혹은

벌거벗은 서녘이 사슴뿔에 걸릴 때

당신이라는 페이지 속에서 무화과나무열매가

툭, 터졌다

유리사막 / 강영은

온몸에 사막을 지닌 여자들은 바다를 숭배했다

낙타 한 마리 없이 알몸으로 건너는 사막은

발끝에서 시작된다

사막의 기원을 더듬으면 만 개의 천문이 열리고

붉은 달을 새긴 금서들이 흘러내린다

모래를 읽는 일은 어제의 찌든 잠을 깨우는 일,

가슴 한쪽을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 수천톤의 모래가

흉부에서 쏟아진다

한 뼘 자란 귀 속으로 스며드는 뜨겁디뜨거운 서사

흰 타월을 머리에 감은 여자는 방금파라오와 헤어졌다

뜨거운 몸을 열고 홍해를 건넌 그녀는 유리관 속

누워 잇는 알몸을 드러낸 습속은 며칠 동안

한증의 전설로 떠돌 것이다

매몰된 모래무덤에서 지평선이 없는 오늘이 흘러나간다

모래 알갱이들이 물소리를 낸다는 건

이 도시에선 흔한 일, 누군가 모래무덤을 거꾸로 세운다

습벽의 도시가 오 분만에 사막의 건기로반복된다

땀방울에 젖은 여자가 반짝인다

제 몸의 물기란 물기를 죄다 유리관 속에 버리고

한증막문을 나서는 네페르티티*

당신이 손을 댄다면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한

그녀는 부서지거나 쏟아질 것이다

울음의 행방 / 강영은

구름이 흘림체로 지나간다 언덕 위 버드나무가 해

서체의 체위를 반복한다 은신처럼 찾는 휴먼, 둥근 해

드라인체의 비가 내린다

투명 화살촉이 내려꽂힌 곳마다 강이 둑을 쌓는 저

녁, 바탕체로 번식하는 글자는 서사를 맨 처음 기록한

술사의 눈빛에 감겨든다 전위적인 소나무는 가지끝에

서 기울어진다

진화의 끝을 매듭짓듯 빗방울을 흡수한 비알밭에는

번식하는 복숭아, 오이, 가지, 딸기 체의 시간들, 궁서

체의 울음을 판독한 일몰의 눈, 코, 입은 희비쌍곡선

으로 봉인된다

북방에서 기원된 몽고반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울

음의 선사시대는 내 엉치뼈에 새겨져 있다 오래 유전

된 흉부에 종족의 낙인이 찍혔을 때 울지 않은 양들은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쇠소깍

쇠소깍, 남쪽 / 강영은

소가 드러누운 것처럼

각이 뚜렷한 너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남쪽은

날마다 흔들린다

창을 열면 그리운 남쪽

살청 빛 물결을 건너는 것을 남쪽의

남쪽이라 부른다면

네 발목에 주저앉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움보다 깊은 색, 살이 녹아내린

남쪽은 건널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너도 두 손을 가리고 울겠지

눈 내리는 날의 너를 생각하다가

북쪽도 남쪽도 아닌 가슴팍에 글썽이는 눈을 묻은

젊은 남자의 비애를 떠 올린다

흑해의 지류 같은 여자를 건너는 것은

신분이 다른 북쪽의 일

구실밤잣나무의 발목 아래 고인 너는 따뜻해서

용천수가 솟아나온 너는 더 따뜻해서

비루한 아랫도리, 하구로만 흐르는

물의 노래 흘러간 노래로 반짝이는 물의 살결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검푸른 혈흔이 남아 있는 마음이

무르팍에 이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독한 사랑처럼

먼 바다로 떠나가는 남쪽

누구에게나 전설은 있지, 중얼거려 보는

내 얼굴의 남쪽

슬픔의 미각 / 강영은

오늘 밤, 나무는 유정하게 부풀어 크고 흰 빵이다

두 사람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빵이 된 것처럼

죽음의 달콤한 풍미마저 풍긴다

나무를 집어 삼키는

허공의,

저토록 깊은 허기가

이별을 나누는 이 별의 방식이라면 채워지지 않는 나의 허기는 빵을 굽는 일, 화장터의 연기처럼 새어나오는 빵 냄새를

맡으며 이 별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이별을 배부르게 한 입 베어 먹는 일일 것이다

유리창의 미각이 딱딱하게 굳은 밤의 풍경을 꺼내 먹는 동안 하얀 덩어리가 부풀어 오른다 뜨거운 빵틀에서 구워지는

빵, 잘 익은 슬픔 속으로 허기를 밀어 넣는 이 모반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모양도 빛도 없는 어둠 속으로 불쑥불쑥 미각이 찾아오고 슬픔을 모르는 나라에 다다른 이파리처럼 새가 떠나간 나무

를 새로 읽는다

나무의 살과 뼈를 배불리 먹여온 건 허공에 몰입하는 새의 부리였을까

깊이 모를 창자 속으로 떠나보낸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는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잿빛 눈구름이 지상을 먹이는 밤

구름의 흉곽 뒤에 숨은 새소리로 부풀어

나무는 크고 흰 빵이다

강영은

제주 출생.

제주여고, 제주교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등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서울과학기술대학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