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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입춘날, 운주사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박제천



입춘날, 운주사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박제천




코가 깨진 미륵보살,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문둥이보살, 얼굴마저 지워진 크고 작은 돌부처, 나 몰라라 잠을 자는 기왓장 보살이 모두 모이는 곳

부뚜막귀신, 대들보귀신, 보리뿌리귀신, 동서남북 오방신, 여기서는 모두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곳

햇빛 좋은 입춘날, 눈이 부신 햇빛 거울로, 제 마음속, 무덤속 어둠을 불살라, 보살도 부처도 잿더미가 되고 마는 날.

돌쩌귀를 열고 나오는, 얼음장을 깨고 나오는, 겨우내 내린 눈을 가슴으로 껴안아 녹인 물로 가득가득 속을 채운 냉이며 달래, 움파며 승검초, 죽순이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네.

[시작노트]
이제 입춘이다. 입춘 전야가 해넘이이기에 이날밤 콩알을 뿌려 잡귀들을 좇아낸다고 한다. 입춘부터를 새해로 잡는 해맞이 액땜이다. 입춘이 오면 먼저 동부새가 불어 언 땅을 녹여내면서 땅속에 깊이 잠들었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무렵에는 아직도 눈발이 날린다. 흰 매화빛 눈이 거울같이 반짝일 만큼 햇빛이 좋은 시절이기에 내게는 이 무렵 작품이 많다. 문득 오래 전에 다녀온 운주사가 생각났다. 거기 계신 온갖 부처님들도 햇빛 좋은 날에는 낮잠을 한숨 늘어지게 잘 것같았다. 풀 한포기마저 응신하여 나투시는 부처님이니 냉이며 달래, 움파며 승검초, 죽순과 같은 것들도 하나같이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어 낮잠을 즐길 것 같았다.◑



*[시와 사람] 중에서

<사진은 운주사는 아니고.......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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