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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물결의 화석/허만하

물결의 화석

허만하

1.

금속성 번득임을 머금고 처음으로 형태를 가지는 순간

물은 기절했다. 목숨은 처음으로 목마름을 깨닫는 순간처

럼 아름답게 기절했다.

2.

벌겋게 달아오른 용암은 어쩌다 강을 역류하지만 투명한

시간의 물살은 분명히 낮은 곳으로 흐른다. 육중한 공룡 발

자국이 다음 발을 떼는 틈새를 비집고 산벚나무 꽃잎처럼

낭자하게 떨어진 새 발자국. 태어남과 같은 숫자의 소멸이

지구에 있다.

3.

물은 소멸에 굴하지 않는다. 물은 목숨의 필연을 사랑한

다. 물살을 차고 뛰어오르는 연어의 낙차를. 인류가 없는

지구의 시간 속에서 일제히 눈부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꽃들의 탄생을 보라. 목숨의 혈통은 끊임없이 흐르는 투명

한 물이다.

4.

물을 실은 강물이 원시의 들판을 흐르고 공룡이 마지막

울음소리가 저무는 지평으로 멀어져가는 때 묻은 뿌리에

돌아가고 싶었다. 지구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의 순결한

한 계절이 남강 기슭 야산에서 모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순

간, 조팝나무 흰 꽃처럼 청순하게 물결치기 시작하는 1억

5천만 년의 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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