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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채수영 시집 『오는 향기를 가로막지 말라』 중 「그림자」

그림자 속에 투영된 자아성찰과 도전

황경순(시인)


채수영 시집 『오는 향기를 가로막지 말라』

새미  출판사



일어나면 그림자 하나가 나를 따른다

나가면 따라오는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충실함으로

나와 동반의 길을 걷는 일상

어둠이 오면 촛불 하나를 켠다. 하면

하나의 그림자가 내 행동을 모방하고

또 둘의 촛불을 켜면 두 개의 그림자

다시 셋의 촛불을 켜면 어김없이

세 개의 영상이 서로 따로 논다

심심하여 하나를 더 첨가하면 넷

다시 다섯, 여섯, 일곱… 열까지를 셈하고 돌아보면

열 개가 각기 행동하는 나는

신이 된다

이 오랜 꿈의 달성에서 마침내

내일 아침이면 나는 천수관음의 손끝처럼

기도가 신도를 모을 것이다. 드디어 내 소망은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고 끝모를 주문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무슨 사도(목사나 승려)라는 이름을 붙여 탑을 쌓고

신비를 조장하는 드디어 신이 되었다. 맹목이 맹목을 부르는

합창에서 벗어날 수없는 그림자의 요술 그러나

내 어버이의 그림자를 보고 싶은 오늘은

나무 끝에 걸린 바람을 보고 울고 있다. 나는

울고만 있을 뿐이다

                ―채수영, 「그림자」


앞만 보고 살다 보면 그림자를 쳐다 볼일이 거의 없고,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빛만 보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림자를 쳐다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를 느낄 때는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을 때, 뭔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을 때이거나, 혹은 불안함을 느낄 때 돌아다보게 된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문득 느껴보는 그림자의 크기 때문에 놀라고, 길을 걷다가도 문득 무서움증에 빠져 내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심리학자 융(C. J. Yung)은 그림자란 “의식의 뒷면에서 미분화된 채 무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개인의 분신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그림자의 존재를 늘 느끼며 살고 있다. 일어나면 따라다니는 그림자, 집에 들어오나 밖으로 나가나 충실함으로 나와 동반의 길을 걷는 일상이므로 시인은 이미 매우 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다. 그림자를 늘 바라본다는 것은 인생의 깊이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생의 후반기를 살면서 삶에 대한 불안함과 허무함을 매일 느끼면서 산다.

시인은 그 자아와 허무 속을 매일 드나들면서 급기야 즐기는 놀이를 한다. 어둠 속에서 인생을 데리고 놀이를 한다. 촛불 하나 켜면 생기는 그림자 하나, 둘 켜면 생기는 그림자 둘, 그리고 또 하나씩하나씩 촛불을 더 켜 나가면서, 열 개가 제각기 행동하는 것을 보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있을 듯, 신이 된다고 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움직이는 모양이 다른 그림자를 보며 다른 누군가를 통제하는 신이 된다고 했다. 무슨 사도(목사나 승려)가 되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며 맹목이 맹목을 부르는 합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들이 무수히 그를 따르는 환상에 빠진다. 외형상으로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도로 우쭐해지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만, 어쩌면 젊은 날의 패기일 수도 있고, 그가 꿈꾸었던 인생에 대한 회환에 빠지는지도 모르겠다.

자유자재로 그림자와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지만 그림자는 결국 그리움으로 귀결된다. “내 어버이의 그림자를 보고 싶은 오늘은/ 나무 끝에 걸린 바람을 보고 울고 있다.” 어찌 어버이의 그림자 뿐일까? 첫사랑의 그림자, 보고 싶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특히 찬란했던 젊은 날 스스로의 그림자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바로 자아성찰에의 깊은 내면이 느껴지는 것이다.

융(C. J. Yung)은 “인간의 자아의식 이면에 놓여있는 무의식적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며 인정하는 것이 성숙의 기본이 된다”고 하였다. 시인은 주변의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가장 성숙한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를 보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이 그림자를 더 만들면서 더 높은 내면의 세계로 자기 자신을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