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 그리고 책

영육을 탁본하다/김세영 시집 '물구나무 서다'

<문학과창작 2013 봄호 게재>

 

 

영육靈肉을 탁본하다

황경순(시인)

 

김세영 시집 물구나무서다

문학세계사

 

 

 

오랜 강직성 직립으로 체증이 생겨서

머리통이 건기의 물탱크처럼 말라갈 때

알갱이 가라앉은 과즙병을

뒤집어 놓듯 물구나무선다

 

오줌통을 위로 올리고

염통을 아래로 내리니,

머리통의 물이 시원해지고

눈이 맑아진다

단전의 피가 따뜻해지고

하초가 충만해진다

 

사막의 미어캣처럼 불안한

직립을 하느라 잊고 있던

아기 팔뚝 같은 새순이 솟아올라

입술 속으로 천연가스를 불어넣는다

 

물구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목어들이

굳었던 지느러미가 우화하는 날개처럼

다시 부풀어 올라 파닥거린다

 

물구나무는

물푸레나무처럼 싱그럽고

수초처럼 부드러워진다.

―「물구나무서다전문

 

김세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물구나무서다의 대표적인 시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유형의 시가 많았는데, 이 시가 시인의 의식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특이하게 시집의 영역을 탁본으로 나누었는데, ‘탁본 1, 2, 3……이런 식으로 붙였다. ‘인간 본연의 마음을 탁본한다는 것일까?’ 그런 호기심으로 시들을 읽게 되었다. ‘탁본(拓本)’이란 같은 원판을 그대로 베끼지만 사람마다 다른 작품이 나온다. 비석을 탁본해도, 나뭇잎을 탁본해도 사람, 매개물체, 매개종이, 그리고 힘의 세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몸을 탁본하는 듯한 물구나무서다는 예사롭지가 않다.

 

시인은 사람을 참 사랑한다는 느낌이 든다. 시집 한 편 한 편마다 육체와 정신의 연결고리를 어디에선가 꼭 찾아내기 때문에, 시인을 잘 모르는 독자라도 시인의 직업을 짐작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의 육체를 보는 관점에는 늘 인간에 대한 배려가 우선으로 보인다. ()란 사물을 이미지화하여 정신을 추구하는 예술이므로, 시인은 자신 특유의 육체, 또는 물체라는 오브제를 통해 내면화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인간의 몸이 이렇게 혹사를 당하는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오랜 강직성 직립으로 체증이 생겨머리가 말라갈 때 머리에 물이 오르게 하는 물구나무, ‘물구나무서다라는 행위에서 물구나무만 취해 온 것이 대단하다. ‘물구나무서다라는 행위와 물구나무와의 연관성도 절묘하다. 물이 많은 나무, 물을 구하는 나무, 이 단어가 주는 물활론(物活論)의 이미지가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물체는 물이 근원이고 사람 역시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물이 있으면 모든 사물이 생명력을 얻게 된다. 시인의 물구나무는 특히 생명력이 충만하다.

물구나무서다와 함께하면 우리 몸의 곳곳을 돌아보게 된다. ‘머리통, 오줌통, 염통, , 단전, 하초, 팔뚝, 입술……평소에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던 내 몸 곳곳을 생각하며 사랑하게 한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해치는 계기는 바로 내 몸을 돌아보지 않아서 생기게 된다. 특히 시인이 제시한 단어인 머리통, 오줌통, 염통이 건강하다는 것은 소통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으로까지 비약을 할 수 있다. ‘우리 몸은 정말 소우주로구나!’ 통하면 단전과 하초가 튼튼해지고, 시인의 물구나무는 말라비틀어져 있다가 새로 부활을 한다. 세상을 구제할 부처님의 목어를 매달고, 싱싱하게 살아난다.

 

시인의 상상력 또한 무척 풍부하다. 과즙병처럼, 사막의 미어캣처럼 등 물구나무로 물을 만난 시인의 몸은 그야말로 우주를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단점이 있으나 사막을 가져와도, 목어를 가져와도, 물푸레나무처럼 싱싱하게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정신을 탁본하고 싶어 한다. 시인의 다음 관찰 대상은 무엇일지, 다음은 탁본이 아닌 무엇으로 시세계를 새롭게 할지 궁금해진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해 보았던 물구나무서기, 피폐해진 마음을 그저 물구나무서다로 되살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여러 번 넘어지더라도, 오늘 밤에는 물구나무를 서 봐야겠다. 현실에 지친 내 나무에 물을 가득 머금을 수 있도록!

 

-------------------------------------------------------------------------------------------

김세영 시인의 시집『물구나무서다』가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은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7년『미네르바』로 등단했다. 시집『강물은 속으로 흐른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인권위원, 시산맥시회 부회장, 성균관 의대 외래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