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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리고 책

이상호 시집 『휘발성』

시각적 언어와 체험적 사실 속 해석적 상상력의 세계

 

황경순(시인)

 

이상호 시집 『휘발성』

도서출판 예맥

 

 

 

 

어둠 속

유난히 불빛 화려한 유곽에서

손님을 유혹하는 꽃다운 아가씨들처럼

만발한 온갖 꽃들이 즐비한 화원을 지나다

봄이 와도 봄다운 봄은 오지않는 도회지에서

밤새도록 봄을 팔아도 꽃이 피지 않는 생을 위해

하려하게 차가운 밤을 밝히는 아가씨들을 생각한다

밤새워 사랑해도 사랑이 되지 않는 불임의 나날들처럼

아무리 많은 화분을 들여놓아도 도무지 꽃이 피지 않는

몸집만 뚱뚱한 사람들 속을 모조리 내다팔 수는 없을까

한겨울에도 만발한 꽃들로 가득한 화원을 지나다가

오늘도 꽃보다 화려한 생각만 피워댄다

잎만 무성한

관상수처럼

 

-이상호 「화원을 지나다」

 

 

 

 

 

 

 

 

 

 

이상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휘발성』첫 페이지에 수록된 시다.

먼저 화분 모양의 글자 배열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 겨울, 나뭇잎 하나가, 아니 나무 한 그루, 분(盆) 하나가 시의 집(詩集)을 싱싱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그것도 그냥 나뭇잎이나 나무, 화분이 아니다. 생명의 싹을 품은 나뭇잎, 싱싱한 열매를 가득 달고 있는 나무, 내면이 꽉 차 있는 화분이다. 화원을 지나면서 누구나 그 싱싱하고 풍성함과 생명력에서 삶의 의지와 살아나갈 힘을 얻곤 한다. 그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시를 읽지 않아도 감동을 주고, 시를 얼른 읽고 싶게 만든다. 시각적인 시어인 나뭇잎은 바로 잎만 무성한 관상수의 잎인 동시에 열매는 맺지 않아도 끈끈한 수액을 받아내는 고무나무 같은 관상수이기도 하고, 화원을 탄생시키는 화분을 상징한다고 유추해볼 수도 있다.

이 시에서 또 한 가지 놀라운 표현은 시인은 꽃이 피지 않는 관상수를 보며 유난히 화려한 불빛 비치는 유곽에서 손님들을 유혹하는 아가씨들을 생각해냈다. 시인은 이렇게 화려함 속에서도 소외된 인간의 마음을 읽는 감성이 탁월하다. 밤새도록 봄을 팔지만 봄이 오지 않는 아가씨들, 밤새워 사랑을 해도 사랑이 되지 않는 불임의 나날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겉모습은 화려한 화원에서 꽃이 피지 않는 잎만 무성한 관상수의 처절한 슬픔은 그저 생각의 꽃만 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화분을 많이 들여놓아도 도무지 꽃이 피지 않는 몸집만 뚱뚱한 사람들 속은 무엇이며, 어떻게 내다팔까? 화원의 모든 꽃들은 내다 팔아야 제 몫을 하는 것인데, 잎만 무성한 관상수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꽃이 피지 않아도 좋아하는 현실은 어쩌면 비정상적일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그래서 그것을 내다판다는 것은 꽃에의 강렬한 열망이 담긴 역설적인 의미가 강하다. 시인이 내다팔고 싶어 하는 그 속은, 바로 시인 자신의 소외된 부분이기도 하고, 유곽에서 내다파는 아가씨들의 화려하지만 외로운 마음에 봄을 부르는 열망이 담겨 있다. 또한 화려한 현실 속에 드리운 현대 문명의 그늘, 그 속에 처절하고 무덤덤해지는 모든 사물의 덧없는 고독을 해소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엿보인다. 나아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원초적인 강렬한 꽃에 대한 그리움과 생산적인 희망까지 심어주려는 것이다.

아울러 이번 시집『휘발성』에서 시인 자신이 ‘사족’이라고 이름 붙인 후기를 보면 시적 표현상 체험적 사실과 해석적 상상력의 조합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을 염두에 두었다고 술회하였다. 이것을 ‘팩션’에 대응하는 ‘팩트리(fact+poetry)라고 명명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화원을 지나며 본 체험적 사실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각함과 동시에, 자신을 성찰하는 해석적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런 형식을 많이 보여주어 시인의 항상 변화하려는 의지가 감탄스럽고 다음 시집에서는 어떤 시도를 할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