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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수십 년 만의 해후/겨울에 만날 사람들 후편

수십 년 만의 해후/겨울에 만날 사람들 후편

1.언제 봐도 추억이 새록새록

서울에서 13시 15분발 KTX를 타니, 15시 02분에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저녁에 먼저 올라올 친구가 표

를 사야해서 얼른 표를 사고 택시승강장 쪽으로 나가니, 얼마 전 다리 수술을 해서 회복기라 목발 한

쪽을 짚어야 한다던 친구가 승용차를 끌고 마중을 나왔다. 나와 서울에서 간 우리 반 친구와 모두 절친

한 소꿉친구이다. 언제 만나도 반갑고,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잠시 후

망우당 공원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맨 먼저 30여년 만에 만난 친구는 참 예쁜 친구ㅎ이었다. 눈이 동그랗고 키는 자그만하지만 예쁜 친구가

반겨주었다. 사이버카페에서 서로 얼굴은 확인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여서 얼싸안고 포옹을

했다. 나로선 자세한 모습은 기억이 안났지만 그 땡그란 눈은 기억이 났다. 예쁘게 관리한 듯 젊어 보이

고 너무 반가웠다. 나를 보더니, 대뜸 '넌 공부 너무 잘 해서 너무 부러웠어!' 라고 했다. 나는 '너, 눈 동

그랗던 것만 기억난다.' 라고 응수했다. 그 친구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하던 친구였다. 세월은 모습을 조금

씩 변하게 해도 자세히 쳐다보면 그 모습이 모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른 친구들은 다 만난 적이 있어서 모두 반갑게 인사를 하고 모임결성 6주년 정기총회를 화기애애하

게 마쳤다. 언제 만나도 든든한 가장마음 편한친구들이다.

2.아, 머리는빠지고 백발 만발해도 마음만은 13세 그대로!

오후 6시, 동기회장으로 들어서자, 다 앉아 있는데 입구에 서서 친구들을 맞는 친구가 있었다. 바로

내가 제일 궁금해하던 친구 중 한 명 ㅅ이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악수와 더불어 가벼운 포옹까지 했

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 같은 교회에서 연극을 같이 했던 친구였다. 그림도 잘 그리고, 남자이지

만 참 섬세하던 친구,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일일이 손수 그린 카드를 일일이 돌리던 바로 그 친구

였다. 여자들이야 당연히 카드를 그려서 돌리곤 했지만 남자들로선 꽤 섬세한 쪽이었던 셈, 아무리

세월이 더 흘러도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할 것 같은.....나이는 보였지만 역시 멋진 친구였다. 농협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내가

들은 기억과 다른 점은, 옛날 그 교회의 목사님 조카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의 독실한 신

도였던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 조카와 결혼을 한 사람은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선생님

이셨는데 내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친구는 그 날 내게 나를 위해 계속 기도하겠다는

말을하면서,교회에 다시 다니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다음 저 건너편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친구가 있었다. 남자치곤 쌍거풀이 유난히 예쁘던

친구, 재학 시 전교어린이회장은 아니었지만, 졸업 후 제 1 대 동기회장을 하던 친구 ㅈ이었다. 고

1 때 발표회를 주관하여 함께 운영했던 친구였다. 얼굴이 온화하고 성격도 꼭 그대로 온화하고도

참 적극적이고 덕이 있는 친구, 모 보험사의 본부장을 하고 있다던가? 암튼 그 얼굴 그대로였고,

변했다면 머리가 많이 빠졌다는 점이었는데 그닥 보기 싫지는 않고 연륜이 느껴졌다.

한 바퀴 돌며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30여명이 와 있었는데 아주 낯선 얼굴은 많지는 않았다. 좀

생소하게느껴지는 친구가 있다 싶어서 자세히 쳐다보면 예전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 거였다. 그러

나, 아주 늦게 전학 온 친구 몇 명은 아주 낯설어 보였다. 그런데도 나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있

었다. 전교어린이회장 했던 우리 반 친구와 우리 반 총무가 동기회를 결성하는 주 멤버였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얼굴은 보여주지 않아도 워낙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했을 터였다. 또한 어린

시절 학교에서 중요 행사 및 대회 행사에 많이 참가하여 상을 많이 받곤 해서 나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좋은 생각들을 갖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와중에 몇몇친구가 '전교 1등 000'하며 나를 거론해서 다들 한바탕 웃었다. '공부 잘 하면 뭐

하나? '울 남동생 말마따나'선생 밖에 더하나?' 라던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교 때는 선생

님이라는 직업이 단연 장래희망 1위이다. 선생님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보이는지....그 만큼 생활

을 많이 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암튼 중등교사를 하는 친구도 몇 명 있었지만, 초등학교교사인 나

를 아이들은 무척 부러워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더 그랬겠지?

한 여자친구는 나와 한 반은 안 했는데, 키가 무척 컸었다. 졸업앨범 사진을 보면 다른 아이들 보

다 얼굴 전체가 쑥 올라온 친구였다. 그런데 지금은 나보다 키가 작았다. 너무 빨리 커버리고 더 이

상 안 큰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 쑥쑥 자란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또 4학년 때 한 반을 했던 남자친

구인데, 그 친구는 정말 키가 삐쭉하게 컸었는데, 지금도 180이 넘을 정도로 아주 커 있었다.

또 내가 제일 보고 싶어하던 친구 ㅅㅎ이 조금 늦게 나타났다. 합천에서 산다는데, 그 전에 올라오

는 중이라고 이따가 보자고 통화를 했었는데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얼굴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는

데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친구는 얼굴에 점과 주근깨가 많았고, 덧니도 심했었

는데 이제 그것이 좋아져서 아주 예뻐져 있었다. 그리고 마음도 편한지 아주 유연해 보였고, 너무

반가웠다. 바로 옆반이어서임원활동을같이 많이 했고, 고전읽기도 같이 했던 친구여서 함께 한

시간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고전읽기 대회란 것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특별한 기회였던 것 같다. '불교설화, 성

경이야기, 여러 위인전들, 중국의 고사성어, 동양과 서양의 철학서적들을 초등학교 고학년에 맞게

풀어서 쓴 책들이었는데, 주석까지 달려서 그런 것을 다 외우면서 정독을 해야했다. 학교 마다 대

표들을 뽑아서, 책을 읽고 그 어려운 사상들,사람들을 달달 외우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

한사업인 듯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은연중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상도 많이 받고 학교곳곳에 그 후 십여년 동안 게시물로 얼굴이 알려

져서 내 동생들은 내 그늘에 가려져 은근히 피해를 입기도 했다는...

또 한 친구도 한 차례 돌고 나니 자리에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 바로 우리 집 골목에 살던 친구

K였다. 내가 보고 싶던 친구 중 한 명이다. 장교 출신이라 그런지, 얼굴이 뺀질하고 윤기가 나서 뺀

질거린다고 했더니, 공부 안하고 개긴다는 줄 알고, 원래 그랬잖아? 라면서 응수를 했다. 그게 아니

라 피부가 좋고 다른 친구들 보다 젊어보인다고 했더니, 즐겁게 웃었다.

중학교 때는 연합고사를 대비해서 나와 함께 공부를 했던,정확히 말하면 내가공부를 가르쳤던 친

구였다. 고 1 때까지 좀 봐주었는데, 그 뒤론 그 녀석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나를 자꾸 피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많이 못 했지만, 나에게는 무척 관심이 많았던 친구....그 집 사정이나 우리 집 사정이나 좋

지가 않았다. 아, 그 친구 집은 아들만 삼형제였는데, 우리 골목에서는 부모님 연세도 많고 그 동네

서 오래 살아서 반장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무척 적극적이셨던 분이다. 그런데 아버지

는 바로 뒷골목에 첩실을 들여서 살았고, 그 집에서 난 딸까지 있어서, 그 집은 항상 시끄러웠다. 그

딸도 이제는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도 친정어머니께 듣고 있다. 우리 집은 그 골목과 접한

곳에 새로 지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서 아직 살고 있다. 그 친구네 큰 형은 예전 집에서 그대로 살다

가 최근에 주변으로 이사했다고 하며, 첩실이던 그 어머니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 있다. 친구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실 때도 가족처럼 함께 지냈다고 한다. 미운 정, 고운 정

이 무엇인가? 그 당시 한 동네에 그렇게 본댁과 첩실이 산다는 게 나로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지

만, 그 어머니는 내게 항상 그 친구 공부를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그 녀석과 공부를 하면 맛

있는 것도 해 주시고, 가끔 용돈도 주시고 그랬다. 그래도 고2, 고3 때는 나름대로 공부도 했는지, 4년

제 대학에 붙어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을 했다. 사실 그 학과가 미달이었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사춘기 때 나만 보면 피하던 친구가 대학 졸업 후, RORC로 임관하여 계속 군에서 복무를 했다. 그

소식은 우리 어머니로 부터 가끔 들었는데, 얼마 전에 예편해서 서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우리 반

친구에게서 듣고무척 반갑고 궁금해서 꼭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난 것이다. 자기도 그 때 나를 피

했던 것을 이야기하며 한바탕웃었고, 다른 친구들이 있어서 더 속 깊은 이야기는 못 했지만, 언제

기회가 되면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집 경제사정이 정말 안 좋은 시기

여서 대학을 포기해야할 입장이었을 때니까...그래도 그 어려움을 딛고, 내가 진정 원하던 곳은 아니

었지만, 교육대학에 간 것을 지금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그 친구네 둘째 형이 공부를 잘 했다. K공대에 다녔는데, 어느 날 내가 우리 선배 언니

와 친한 그룹의 사람들과 미팅을 해서 한 동안 만나고 다녔었는데, 우리 집 근처에 바래다 주러 왔다

가 그 형을 만났다. 알고 보니 바로 같은 과 친구였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과 나, 선배 언니 등과 추

억이 무척 많았고, 그룹으로 또는 개인적으로는 꽤 오래 지냈는데, 그 사람이 키가 무척 커서 내가

아주 높은 힐을 신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헤어졌지만, 그 둘째형을 보면 그 사람이 요즘 어

찌 살고 있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기는 하다.

또 한 친구ㅅㅁ이 늦게 나타났다. 지금 울산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반 모임은 시간이 안 되어 못 참

석하고, 저녁 모임만 참가를 한 것이다. 너무 반가웠다.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기억이 나는데, 여전히

그랬고, 산을 좋아해서 동기회 부설 산악회는 가끔 참가해서 그 쪽 팀들과의 유대가 강해 보였다. 나

와는 30여년만에 처음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바로 내 옆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

서 무척 즐거웠다.

또 한 친구, 서울에서 내려온 내 친구와 친했던 친구인데, 독서실 다닐 때 사건을 많이 일으켰던 친구

ㅌ ㅇ였다. 나보다 늦게 도착해서 처음에 모른 척 했더니 저쪽으로 들어가서 나를 보면 손가락질을 하

면서 일어서서 내 쪽으로 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물론 내 친구와도 반갑게 재회를 했음은 물론이다.

ㅈ친구와 무척 친해서 동네를 주름잡던 친구였다. 그 날 늦게까지 우리 서울에서 내려간 친구들과 함께

놀았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밖에 많은 기억은 없지만 현재 동기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친구들이 보기 좋았다. 총무를 맡고

있는 친구, 산악회를 맡고 있는 친구들 모두 보기 좋았다. 특히, 차기 회장 겸 현재 산악회 회장으로 전에

연락처를 알았다고 해서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내가 너무 자주 하지 말라고 했던 친구는 나로서는

얼굴이 무척 낯설었다. 정말 별 기억이 없는 친구였다. 그렇지만, 주책맞긴 해도 그런 친구도 있어야 스

스럼없이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친구를 만난 것도 기분이 좋다. 이 친구는 나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데 서울에서 우리 집 가까이

살고 있다. 다른 친구에게서 그 친구 이야기를 들었지만 전혀 기억이 없는 게 이상했는데, 그 친구는 4

학년 때 전학을 와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목동의 KT에 다니고 있어서 우리 집과는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살고 있다. 재경지구 모임을 결성한다고 하니, 주축이 될 친구가 아닐까 싶고, 상대방에 대

한 배려도 잘 하고 참 멋진 친구였다. 골목친구와 함께 모임을 주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존의 우리

서울의 여자친구들 모임과도 잘 연결이 되어 재경지구 모임이 활성화 될 것 같아서 다행이다.

많은 친구를 만났지만, 꼭 보고 싶은 몇몇은 보질 못해서 좀 안타깝다. 내년부터는 참가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속속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위 1, 우리 동네에 살던 우리 반 여자 친구 ㅅㅇ이다. 전화번호도 알려준 친구가 있어서 해 보았더

니 연락이 안된다고 하여 무척 서운하다. 순위 2, 우리 반 여자 친구 ㅎㅈ, 간호사로 근무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못 보았다. 무척 그립다. 순위 3, 예산에서 모모정유회사

에 근무한다는 ㅇㅅ, 3일 일하고 3일 비번이라던가? 일정이 안 맞으면 모임에 참석 못하지만, 서울과 대

구에서 다른 친구들은 한 번씩 만났고, 나는 아직 못 만나서 궁금하다. 순위 4, 동문발표회 때 친했던 팀

으로 ㅎㅂ, ㄱㅎ, ㅇㅇ, 다 그 친구들끼리 모임이라는데 가족모임들이 있어서 못 나타났다는데 무척 궁금

하다. 30년 가까이못 만났으니까....

순위 5, 결혼 전까지 7공주 모임의 멤버였던 ㅈㅇ, 이 인간은 보고 싶지는 않은데 얼마나 뻔뻔하게 변했

는지 궁금하다. 모임에서 기금을 횡령했던...그리고 개인적으론 내 돈을 빌려서 겨우겨우 일부는 받고,

나머지는 먹고 떨어져라 하고 포기했던.....최근에 보니까 동기회에 자주 참가를 하나본데,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는데 자기 버릇 개 못 줄 친구인데 이제는 좀 철 들었을라나? 나머지 6명 중 5명이 서울에

서 지금도 만나고 있고, 대구에 있는 친구는 멀어져서 가끔 연락만 하는데, 그 친구도 보고 싶은데, 모임

에 대해서는 대면대면한 성격이라 만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서울의 5명 중 4명이 이번에 모임에 참가

했다. 다들 자리 잡고 살아서 얼굴이 뺀질뺀질하고, 그 중 셋은 나와 함께 이번에 동기회에 처음 참석했

다.

3. 송년모임에서 빠질 리 없는 노래방에서

매년 송년모임을 호텔을 빌려서 했는데 올해는 동기의 식당에서 해서 좀 협소하고 음식도 서울에서 간

친구들은 마뜩치 않아 했다. 그래도 동기의 집이고, 우리 반 남자 친구의 사촌인 친구가 경영하는 집이라

통째로 다 써서 마음대로 웃고 떠들 수 있어서 좋았다. 테이블끼리, 반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래도

부르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송년모임의 수순은 노래방이다.

바쁜 사람들은 일부 빠지고, 2차로 노래방에 간 사람만도 60여명이라 근처에서 제일 큰 노래방으로 가서

가장 큰 홀 2개를 빌려서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교회 권사님이라는 ㅅ가 술을 권하니 어찌나 웃기던지, 그

리고 술도 약해서 너무 웃겼다. 나를 만나서 정말 반갑다고, 나 역시 너무너무 반갑다고, 수십 번이나 인사

를 주고 받았다. 교사면 꼬장꼬장할 줄 알았더니, 놀기도 잘 한다고 또 연신 칭찬이다. 우리 반은 주로 2번

방에서 놀고, 1번 방은 주최측에서 주로 놀았다. 여기저기 번갈아가며 친구들과 지난 이야기, 현재 이야기,

미래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제 50줄에 들어서니 다들 철이 들었고, 아웅다웅 살기 보다

는 건강하게 남은 시간들을 알차게 보내자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10년 전 쯤 만났다면, 어쩌면

사건도 나고 그랬겠지만, 이제 원숙미로 성숙되어 좋은 관계가 형성되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한시간 쯤이나 지났을 까? 바깥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우리 한 해 선배님들도 그 날 송년회를 하고, 바로

그 노래방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방을 우리가 다 차지했으니, 마냥 기다리고 있어서, 우리가 방 하

나를 빼고 하나로 합쳤다. 그 때는 이미 바쁜 친구들은 빠진 상태이기도 했으니까....시간이 12시가 가까워

지자 주최측에서는 서울팀의 숙소를 걱정했고, 나는 친정어머니댁에 가면 되지만,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거

나 서울로 다 솔가한 친구들은 함께 지내기를 원해서 미리 잡아 놓은 숙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예전

동문회 주최팀에서 서울팀과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회장단은 마무리를 더 해야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있지

않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파할 때 이동을 했다. 우리 반 모임은 미리 했으니까 서운해 하지 말라고 미리 친구

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3. 추억의 한 장면 속으로

우릴 초대한 친구들은 초대 회장 팀이었는데, ㅌ ㅇ친구가 경영한다는 노래방으로 가려고 하다가, 연말이

라 방이 다 찬 듯 했다. 그 친구는 방을 비운다고 했지만, 다른 곳으로 갔다. 우리가 묵을 호텔 근처의 단란

주점으로 가서 처음에는 시끄러워서 이야기하기는 그랬지만 가장 먼 곳에 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좀 빠지자 앞쪽으로 옮겨서 스테이지에서 밴드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

냈다.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다 모여서, 앞으로의 일도 의논하고, 다음에 초대한 친구들을 서울로 오라고

초대하기도 했다. 몇십 년만에 만나도, 추억을 이야기하고, 그 때 그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

은가? 이제 지천명에 다다랐거나 다다를 친구들이 앞으로 더욱 좋은 인연으로 함께 하기를 바래본다. 모두

건강하게 하는 일들이 아무 풍파없이 잘 이루어져, 남은 인생을 보람있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4.호텔에서

서울의 남자팀들은 친척집으로 향하고, 대구친구들은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우리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

며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침대방을 예약해서 좁아서 걱정했는데, 마침 방금 온돌방이 나왔다고 해서

우리는 다행이라는 쾌재를 부르며 방으로 올라갔다. 서울에 사는 우리들은 모임은 해도 함께 여행을 할

시간을 잘 내질 못했는데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 동안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모여서 실컷 수다를 떠는데도 뭔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요즘의 주제는 주로 건강과 자녀 문제이다. 다들 안정되게 살고 있고, 너무 바쁘게 살아서 이제 여유를

가지고 여행도 다니고, 우리들만의 시간을 많이 갖자는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스르르 잠이 들

었다. 비록 여러 번 잠을 깨기는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합천에서 올라온 ㅅㅎ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산이나 경남쪽에서 온 친구들끼리 찜질방

에서 잤고 주최측도 시간이 되는 친구들은 함께 했다고 한다. 나는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런데

서울의 친구들은 나만 빼고는 다 찜질방을 너무 싫어하는 쪽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나도 하룻밤쯤

은 잘 수도 있었겠지만, 찜질방에서 밤을 지샜다면, 다음날 출근하기가 더 불편했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잠은 제대로 자야한다는 생각은 우리들 모두 비슷했으니까......

수성호수가 보이는 이 호텔은 무척 오래된 호텔이다. 나중에 남동생에게 들으니, 대구 시내에서도 중요 행

사나 세미나를 거기서 많이연다고 한다. 주변경관이 좋아서 외국인들까지 무척 만족해한다고 한다. 객실은

내가 생각했을 때, 시설이 너무 낡았고, 외풍까지 있었지만, 홀들은 경관이 좋아서 아주 인기가 좋은 모양이

었다.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아침에 걸어나오는데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겨울 날씨 치고는 아주 포근해서

걷기에도 좋았고, 상큼한 아침 공기, 나무의 상큼한 향기를 맡으며 걷가가 택시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향했

다. 올라갈 표를 끊고 아침을 먹었다. 평소에는 좀 얌체스럽게 굴던 한 친구가 그날 따라 이것저걱 다 계산

을 하겠다고 해서 잘 얻어 먹었다.

5. 그리운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뵙고 가기 위해서 친정으로 갔다. 여동생은 시댁 이사 때문에 못 오고, 큰동생은 출근을

했고, 나머지 식구들은 다 와서 나를 반겨주었다. 막내동생의 딸도 그 사이 더 커서 재롱을 많이 피웠다.

막내동생은 체육관 운영하랴, 박사과정 밟으랴, 대학 출강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한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정말 대견하다. 그 전날인 토요일에도 서울로 세미나 다녀왔고, 그 다음날인 월요일

날도 또 서울로 세미나를 온다고 했다. 참 바쁘게도 산다. 몸이 어찌 그리 버티는지 정말 용하다. 내년이

면 논문이 마무리 되고 박사과정이 끝난다니, 그러면 좀 편안해지겠지. 모쪼록 건강하게 잘 해내길 바랄

뿐이다. 아이 키우느라 전공을 잠시 쉬던 올케도 오케스트라 객원으로 연주행사에 자주 출연하고, 과외

교습하랴 바쁘다고 해서 나중에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재능을 썩히지 않고 더욱 열심히 매진하길

바란다.

신종플루에 걸려서 응급실까지 가셨던 어머니는 얼굴이 많이 축이 나셔서 가슴이 아팠다. 전체적인 균

형이 깨지셨는지, 입병까지 오래 갔었다면서 입가에 아직도 시커먼 자국이 남아 있고, 얼굴이 너무 안돼

보이셔서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젊었을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이제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으신지, 여기저기 아픈 곳 투성이시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제 좀더 자주 찾아뵙고 마음의 위

로를 해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인지? 그래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니 그나마 견디시지, 집에 가만히 계시는

분이시라면 아마 누워서 일어나시지도 못할 것이다. 부디 편찮으시지 말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해서, 오후에 일찍 표를 끊었다. 3시부터 7시 정도까지는 표가 매진이었기에 3시

에 가장 근접한 표를 끊었다. 어머니를 서너시간 밖에 뵐 수가 없어서 죄송했지만, 어머니는 다른 일도

있으시다고 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상경을 했다.

6. 살아갈 시간들을 설계하며

산다는 것은 무수한 만남의 연속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 퇴색된 필름들이 잘도 돌아간다. 인간의 영상 필름은 정말 오묘하고 신비롭다. 누군

가 한 번 자극을 주기만 하면 생생하게 잘도 돌아가니 말이다. 내가 잊고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일깨

워주는 친구들을 다시 만나서 감회가 정말 새로웠다. 그 영상들이 이제 더욱 활발히 돌아가리라 믿는다.

퇴색된 것은 된 채로, 생생한 것은 생생한 대로 모두 하나같이 보석들이다. 전 같으면 50대는 아주 황혼처

럼 느껴졌는데, 삶의 안정과 여유, 건강상도 이제 피치를 올릴 때가 아닌가 싶다. 안 좋은 세포를 가진 부

분은 다 돌출되어 수술도 하고, 이제 잘 건사하여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부디 모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잘 설계하여, 더불어 알차게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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