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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꽃등신불 외 2편/정재록

꽃등신불

정재록

선암사 대웅전 뒤란에서 철쭉을 본다

진분홍 색 하나로 법열이 철철 넘치고 있다

그렇지, 색은 몸으로 터득하는 도가 아니던가

色자 화두 하나 받들고 동안거에 들었던 것이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독경소리에도

오직 色자 하나만 귀에 꼭꼭 들어와 박히던 거였다

색을 끊으려 하면 할수록 색은 단전을 거쳐

심장을 지나 정수리까지 차오르던 거였다

저 단전에서부터 색을 밀어 올리는 것이다

밀리고 밀려서 왈칵 넘쳐버린 색의 이 고인 물

깨달음이 어찌 저 혼자만이 누리는 화엄세계일 것인가

네 안에서 박차고 나온 색을 남김없이 비워

그 농염한 진분홍으로 세상을 가득 채워라

네 몸을 진분홍 꽃잎으로 터뜨려

중생의 허랑한 영혼을 색으로 가득 메워라

사람마다 진분홍의 황홀경을 눈뜨게 하라

절집의 뒤란에 철쭉을 심어 색을 밝히는 뜻

내 몸에 너의 색을 받아들여

내 무명빛 영혼을 짙게 물들이고 싶다.

붉고 향기로운 실탄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진된 다크레드의 탄환들

그 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 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 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잔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은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기로운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따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쏘아대는 해설피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열매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네 손을 꼭 잡는다

사르트르의 죽순

고향집 대밭에서 따온 죽순을 깐다

껍질을 벗겨낸 자취가 층츷이 마디를 이루면서

죽순의 알맹이는 통대를 닮아간다

껍질을 벗은 상아빛 알몸의 죽순을 반으로 가르자

와! 이 칸칸이 살을 지른 마디들

차츰차츰 보폭을 좁혀가다가 소실점으로 사라져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나는 이 생의 밑그림에서

가없이 이어지는 음보의 내재율을 본다

죽순은 이미

칸칸이 공명통이 들어찬 하나의 악기였다

제가 평생 골격을 세워가는 모금죽毛金竹

죽순은 아직 연골질의 생이지만

차츰 제 안의 칸살마다 골기를 채워갈 것이다

모태로부터 받은 206개의 뼈마다 골수를 채운

내 몸에도 이미그만큼의 나를 담는 그릇이 있는 거라고

굽혔던 허리 통대처럼 쭉 한 번 펴본다.

-시집 ‘꽃등신불’ 현대시세계 시인선 019-

정재록 시인

본명 정재영.

2007년 부산일보,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현재 국세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