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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제논의 화살 외 3편/강영은

제논의 화살 외 3편

시애틀의 배션 아일랜드에서 자전거나무를 본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자전거의 두 바퀴가

커다란 꽃 같다

녹슨 바퀴 꽃 살대마다 지나가는 햇빌,

내 눈에는 자전거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껴안은 시간 속에서 자전거가

계속 달리고 있는데도

우리 눈이 멈춰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유심히 살펴보니

허공 길을 수직으로 달리는 나무와

둥근 길을 나이테 속에 내려놓은 자전거가

서로의 속도를 껴안고 있다

달려오던 속도와 뿌리박힌 속도 중 어떤 속도가

페달을 내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 영혼이 또 다른 혼에 머문 것처럼

서로의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

속도가 속도를 껴안는 순간, 저, 자전거나무

더 이상의 과녁이 필요 없다는 듯

딱, 멈춰 섰을 것이다

통과할 수 없는 시간이 각막에 달라붙은

거기서부터

내 눈먼 사랑도 벌겋게 녹물 번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투명 개구리

경칩 날 아침, 이슬비 내린다

방울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와, 개구리 알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둥글고 말간 알들이 송알송알 내린다

동그라미가 툭 툭 터지는 것이

올챙이 투명꼬리 터지는 것 같다

바람이 헤적일 때마다

꼬리를 살랑이는 투명 올챙이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쑥,

땅바닥을 넙죽 네 다리 벌린다

하늘과 땅이 포개어진다

경칩 날 아침, 어디서 개구리가 운다

개구리 한 마리 보이지 않는데

봄이 온다, 봄이 온다, 내가 운다

천지가 연못이다

양파론

몇 겹의 비닐로 이루어진 몸이 있다

겹겹이 덮인 내력으로 지탱되는 몸

흙보다 더욱 캄캄한 시간으로

제 안을 감싸는 무덤처럼

지상의 모든 길들 돌아와

하얀 어둠의 옷 하나씩 벗을 때마다

더욱 작고 단단해지는

그, 눈부신 부재의 중심에서

나는 더 이상

만져지지 않는 옷으로 남는다.

녹색비단구렁이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

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

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

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

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

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 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

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

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

기 물길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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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강영은시인, 내가 좋아하는 언니 중 한 분이시다. 항상 보면 나를 보고 웃어주는 얼굴,

시를 랩으로 바꿔서 암송하는 재치와 끼가 넘치시는 분이다. 시집을 받고는 자세히 정

독을 제대로 못 했는데, 요즘 읽으면 읽을수록 그 표현과 기치에 감탄사가 나온다. 그

활발한 성격보다도, 시는 더욱 사려깊고 동서양의 철학을 아우르며, 음악, 미술 들 예

술 전 분야를 아우르는 작품들이 많다.

특히 위의 네 편이 내 맘에 깊이 들어왔다.

첫번 째 '제논의 화살'의 제논은그리스 고대 철학자인데, 변증법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제논의 '날아가는 화살'에 대한 변증법은 유명한데, 날아가는 화살은 순간순간 정지되

어 있기 때문에 화살은 절대로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화살은 어딘가에 꽂히

니까 말도 안될 수도 있지만, 그는 반대의 의견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변증법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무튼 세상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의미로, 강영은 시인은 자전거나무에서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

을까?

.....

둥근 길을 나이테 속에 내려놓은 자전거가

서로의 속도를 껴안고 있다

달려오던 속도와 뿌리박힌 속도 중 어떤 속도가

페달을 내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 영혼이 또 다른 혼에 머문 것처럼

서로의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

속도가 속도를 껴안는 순간, 저, 자전거나무

더 이상의 과녁이 필요 없다는 듯

딱, 멈춰 섰을 것이다

......

이 부분이 가슴에 왈칵 와 닿았다.

빗물을 개구리알로 비유한 '투명개구리'에서"천지가 다 연못이다."이 부분도 너무

마음에 든다. 비오는 날 차창밖을 보면, 정말 개구리알들이 올챙이가 되어 또 다시

개구리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양파론'역시 주목을 받은 작품이

다. '더욱 작고 단단해지는/그, 눈부신 부재의 중심에서/나는 더 이상/만져지지 않는

옷으로 남는다.' 마음이 알싸해지는 표현이다. '녹색비단구렁이'는 시집의 제목이다.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교수)는 시집 해설에서 '녹색비단 구렁이'에 대해이색적

소재를 대상으로 하여 심미적 감각을 아름답게 표상하고있다고 하면서,

"강영은 시인은 '몸'에 새겨진 감각을 통해, 주체(인간)와 대상(우주) 사이에 상호연관

성을 부여하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삶의 비극성과 우주적 심미성 사이를 진자 운동하

도록 돕고 있다. 그 사이에는 사실적인 인과 관계가 유추 관계가 없고, 따라서 합리성

의 육체를 부여하는 이른바, '산문적 해명paraohrasing' 의 여지 또한 매우 적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그 안에는, "몇 겁의 비밀로 이루어진 몸"(양파론)이 역동적 심미성을

지닌 채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편들이 시적

완성도가 높고, 다양한 소재들과 역발상의 기법들이 무척 다채로워서 배울 것이 많은

작품이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보고 싶다. 영은 언니가 새해에는 더욱 좋은 시를 많이

얻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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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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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2004년

시선 선집)외 공저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총무 간사, 창작21기획위원

좋은시공연문확회 기획위원, 진단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kiroro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