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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뒤꿈치 자서전 외 3편/정순옥

뒤꿈치 자서전

정순옥

여태 그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을 찬찬히 본 적도 말하는 것을 들을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고 기록도 없는 그들이

내겐 아직 선사시대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산 없어 잠시 서 있는 지하철 역 계단에서

우루루! 맨얼굴의 그들이 떼로 쳐들어왔습니다.

샌들이나 슬리퍼에 끼워져 가는 그들

트고 갈라진 놈 옆에 오종종한 놈 하나 지나고 나면

입 꽉 다물고 눈만 부라린 놈이 오고

그 뒤를 힘없이 따라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장딴지 힘줄 세워세워 버팅기는 아우성도 들려옵니다

어떻게 굴려왔을까 저 앞부리에 매달린 시간의 어깨들을

하고 생각하는 사이 그들은 또 자꾸 밀려갑니다.

지하로 내려오는 우산 발길에서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딛고서

또 타박타박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저마다 뒤꿈치로

젖은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보게 된 그들 앞에

자꾸만 내 뒤꿈치가 가려워집니다

그 겨운 숨소리를 그 이야기를

거친 문장으로라도 오늘은

꼭 써야, 써야만 할 것 같습니다.

있기는 있는 거냐

-쪽2

정 순 옥

옛다 지발 이거라도 갖고 싶멋 나갔다 오라 마, 허구헌 날 그 놈의 청소

기에 설거지 좀 집어치고! 으이구 그 꼬락서니 하고는 사내 자슥이 그리

매가리가 없기는 지가 뭐가 못 나서, 못 배우기를 했어못 생기기를 했어

집안이 못 나기를 했나 자슥놈이 없기를 해, 뭐 그런다고 힘을 못 쓰기를

해 아이구 이눔아 이 쥑일 눔아...

'사오정'도 못 보고 '오륙도'도 못 가보고 집안에 들어앉은지 삼 년째

행여 밤길 무서울까 끝나는시간에 데리러 갔다가 그 식당 옆엔 얼씬도

말라는 마누라의 쌩쌩 칼바람 칼바람소리 김장 김치 갖고올라온 어머니

눈 피해 청소기만 돌려대는 서른아홉 붉은 발치에

만 원자리 지폐 두 장

무너지는 초록하늘이다

팔린다 팔려

-쪽3

정 순 옥

아 지금부터 우리 동창의 자랑이며 대성인력그룹의 회장이신 덕만이

가 한 말씀허시겄습니다요이번에 동창회 후원금도 겁나게 많이 내부렀

당께요, 자 우레 박수박수...

쿡쿡 시험 시간이면 매번 내 등허리를 찔러대던 그놈, 학교하나 조용

히 못 다녀서 즈그 아부지 때묻은 고무신과 녹슨 자전거 바큇살에서 겨

우 건진 고등학교 졸업장, 그놈만 왔다 가면 하나씩없어지는 가재도구

나 돼지 소를 판 돈, 으이구 넘살시러워 지발 집에 오지 마라 하고 등

짝을 후려치던 즈그 어머니 손에 슬리퍼짝 찍찍 끌고 똥개처럼 도망가

던 그놈

-야, 니는 뭔 놈의 공부를 시방까지 허고 있다냐 인자 취직을 해야제

취직, 너 갈 데 없으면 우리 회사 댕길래? 말래?

게놈지도 배달 준비 중

정 순 옥

풍경은 늘 그런 식의 세포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누군가 후 하고

뿜어낸 작은 소리의 후폭풍이불 뿐, 최초의 유전자는 분명치 않은 채

입술 닿는 곳마다 누닐 머무는 곳마다 세포가 증식되고있다 거기에선

또 다른 이국 변종이 생겨나고, 그 변종들 영락없이 날개를 달고 경

계를 무너뜨리며온몸 들쑤시고 다닌다

변종세포가 자라는 사이 사람들의 눈과 귀는 거기에 빨대를 꽂고

턱없이 고전적인 '더불어 삶'의흡인력을 실험 중이다. 커튼 없는 그

실험실에서는 꼭 누군가 발 빠른 중간 보고서를 함부로 퍼 나르고,

정리도 안 된 설익은 고 낱자들 앞에서는 정지화면의 사유나 늙은이

의 걸음도 보지 못한 채

턱없이 쓰러지는 한 생이 있다

애초부터 촉수가 잘 드러나지 않던 그 게놈지도는

이미 부러진 생의 뒤편에서나 가느다란 울림통으로 잠시

'진실 배달 준비 중'으로 깜빡거리다

그러다 말 뿐

진실은 진실로 배달되지 않는다

-<뒤꿈치 자서전> 정순옥/문학의 전당 시인선 61 (2008)-

정순옥 시인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전주교대 및 고려대 대학원 졸업.

2004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세상의 붉은 것들은 모두 아프다'가 있다.

수주문학상(우수상)수상

교원문학상 수상.

김포서암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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