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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반달 외 3편/김여정

반달

김여정

반달이 떴다

하늘이 떴다

조각배가 떴다

바다가 떴다

반달이 내 한쪽 심장을 먹어치웠다

하늘이 내 생을 먹어치웠다

조각배가 내 한쪽 심장을 다시 뱉아냈다

바다가 내 생을 다시 토해냈다

오늘 나는 조각배에 반달을 싣고

남은 반달을 찾으러

하늘 바다를 노 저어 간다

달빛 레이저

달개비꽃들이

푸른 달빛 레이저를

흐릿한 내 눈동자 속으로 쏘아댄다

(아직 백내장 수술을 안 한 지구의 왼쪽 바다)

내 눈썹 위의 달개비꽃빛 나팔꽃들이

달의 알들을

숨은 별들을 향해 발사한다

우주 공간이 온통 레이져쇼로

현란하다

(백내장 수술은 이제 필요없다는 의사의 말)

소금꽃

제부도 바닷가 뻘밭에

자줏빛 카펫을 깐 듯

곱게 핀 꽃

꽃 같지 않은 꽃

우리말로 나문제꽃

소금 먹고 자라는 소금꽃 보고

한평생 가슴속에 소금 저리면서도

조용한 미소 잃지 않고 산

어머니 모습 떠올라

그리움이 하늘에 고운 노을로 피어올랐다

요란하게제 모습 드러내지 않고

겸허히 잔잔한 빛깔로만

삶의 깊이를 가라앉히는

오래 가라앉혀 진한 앙금이 된 참사랑으로

말없이 타인의 아픈 내장의 병을 치유하는

그윽한 아름다움이 곧 참꽃임을

그날 새삼 깨달은 내 가슴의 뻘밭에

푹신한 카펫을 깔 듯

따뜻한 빛깔의 소금꽃

나문제꽃이 함빡 피어 오르고 있었다.

빙어를 먹다

제철인 빙어 맛보기란 잠깐 지나치고 만다며

강변 횟집으로 안내한 후배 시인들이

물속에서 팔팔 뛰는 빙어를 산채로 먹어 보란다

내 생전에 생목숨을

산채로 먹어 본 일 없어

팔짝 뛰어 오르게 노랄 저만큼 물러앉는데

한사코 일단 먹어 보란다

성질이 최단급으로 급해서

최단 시간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음에 들고 만다는

멸치만한 작은 빙어

그 빙어의 싱싱한 생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최단 시간에 먹어치워야 한다며 재촉이다

싱싱한 맛은 최단 시간에?
싱싱한 영감은 최단 시간에?

젓가락으로 미꾸라지 잡기

옆자리의 동석 시인은 집게손가락으로 잘도 낚아 올린다

쩔쩔 매던 내 낚시 솜씨도 차츰 늘어

싱싱한 생명을 통째로 입 안으로 넘기다가 문득

성질 급한 그놈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아차, 내가 나를 신나게 먹어치우고 있었구나

신나게 탐식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다니,

이런 멍청이

그 순간 뱃속의 빙어들이 입 천정을 치받으며 뛰쳐나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가 새 생명을 회복하여

영감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김여정 시인



성균관대 국문과,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화음> <해연사> <사과들이 사는 집> <봉인 이후> <초록 묵시록> 등

시선집 <레몬의 바다> <그대 꿈꾸는 동안> <흐르는 섬> 등

수필집 <고독이 불탈 때> <너와 나의 약속을 위하여> <오늘은 언제나 미완성> 등

시 해설집 <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별을 쳐다보며> 등

<김여정 시전집> 발간

대한민국문학상, 월탄문학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남명문학상, 동포문학상,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정문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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