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시

쌍계사 죽비소리 외 3편/윤동재

쌍계사 죽비소리

윤동재

쌍계사 벚꽃 길 벚꽃이 한창일 때

벚꽃 구경 나섰다가

벚꽃 손에 이끌려

쌍계사까지 들르게 되었지요

쌍계사 경내 들어서자

갑자기 죽비소리가 쏟아졌지요

벚꽃과 내가 깜짝 놀라

어디서 나는지 둘러보았더니

진감선사대공탑지 앞에서

진감선사가 최치원의 두 어깨 위로

죽비를 사정없이 후리치고 있었지요

모든 것이 헛되니

탑을 만들지도 말고

비명을 짓지도 말라고 했건만

어째서 탑비의 글도 짓고 글씨도 썼느냐고

진감선사가 최치원의 두 어깨 위로

사정없이 죽비를 내리치고 있었지요

죽비소리가 지리산 쌍계사 골짜기를

쩡쩡 울리고 있었지요

이삭 성당

러시아 빼쩨르부르그에 있는 이삭 성당

서울대학교 노문과를 졸업하고

빼쩨르부르그 대학에서

뿌쉬킨 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가이드가 이마의 땀도 닦지 않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이삭 성당을 세우는데

사십만 명의 일꾼이 죽었어요!"

그러자 설명을 듣다 말고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한 마디 내뱉는다

"아' 고맙고 고마워라 조선의 왕이여!

조선의 왕들은 큰 건물 하나 세우려고

수십만 명을 죽이지는 않았지!"

러시아 사람 늙은 부부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맞는 말이라며

손뼉을 크게 치고 있다

이삭 성당 안을 구경하던

독일 사람 관광객들이

무슨 일인가 놀라서

모두 이쪽을 보고 있다

앙코르와트 산스크리트 비문

지난 겨울 나느 베트남의 호치민 시를 거쳐

캄보디아의 시엠 레압에 있는 앙코르 유적을

둘러보았습니다 오전에는 열대밀림 사이에 있

는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 조각된 바욘 사원

과 프랑스가 복원 공사를 맡아 한창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바푸온 사원을 둘러보았습니다

타 프롬 승가원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호

텔로 돌아와 낮잠을 한 잠 자고나서 오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진 앙코르와

트를 둘러보았습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가 세웠

다는 앙코르와트는 중앙탑의 높이가 63미터나

되는데 나는 거기에도 올라가보았습니다 그런

데 회랑 뒤쪽으로 가니 산스크리트 비문이 있

었습니다 비바람에 깎일 대로 깎여 글씨를 제

대로 알아볼 수 없었는데 현지인 가이드는 자

기가 알고 있는 문자를 머릿속에서 모두 지우

고 나면 누구든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문자를 지우려고 무척 애를

써 보았지만 끝내 지우지 못해 읽지 못했습니

다 우리 일행 가운데 아들딸들이 팔순 기념으

로 보내주어 오셨다는 할아버지 한 분은 자신

이 알고 있는 문자를 지우는 데 성공하여 산스

크리트 비문을 읽고 우리에게 얘기해 주었습니

다 비문에 씌어진 글자는 수백 글자가 넘지만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한

마디뿐이라고 했습니다 착하게 살자 그것뿐이

라고 했습니다 현지인 가이드는 비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낸 사람을 처음 만났다고 했습니

다 앙코르 유적을 둘러보고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가서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구경할 때도 나

중에 서울로 돌아와서도 앙코르 유적의 모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해

준 산스크리트 비문 내용만 잊혀지지 않고 줄

곧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도 또렷또렷 떠오르

고 있습니다

대표작

어떤 문인은 등단작이 대표작이기도 하고 어

떤 문인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대표작을 쓰기

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문인은 늙어 죽기 직

전에 가서야 겨우 대표작을 쓰기도 합니다 그

러나 아예 대표작 한편 쓰지 못하고 죽는 문인

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지난해 러시

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톨스토이 생가

에 가 보았더니 톨스토이는 살아생전에 그 많

은 작품을 썼지만 그것들은 다 그가 죽어서 진

짜로 쓴 대표작을 한번 연습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은 흔

히들 말하는 대로《전쟁과 평화》도 아니고《안

나카레리나》도 아니고 《부활》도 아니었습니

다 톨스토이 생가 2층 서재에 빼곡히 꽂혀 있는

어느 작품도 아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

은 생가에서 숲 사이로 난 길을 한참 따라가야

볼 수 있는 반 평도 채 되지 않는 그의 무덤이었

습니다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울타리도 비명

도 없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학비

조차 하나 없는 톨스토이의 무덤이야말로 단연

그의 대표작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귀족이어

서 귀족의 묘지에 묻혀야 했지만 스스로가 거

기 묻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극히 쓸쓸하고

초라하여 오히려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그의

무덤이 톨스토이의 대표작이라는 것을 알았습

니다

"가슴 속에 깨달음이 넘치면 절로 글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구태여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 살아 움직이는 빛을 발한다." 혜강 최한기의 말

이다. 나는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시를 쓰고 있

다.

..........

시는 밥이다.

시는 물이다.

내 시도

배고픈 사람의 밥이 되기를

목마른 사람의 물이 되기를

-시인의 말-

- 윤동재 시집 <<대표작>>(지식산업사. 2008) 중에서-

윤동재 시인







1958년 경북 청송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82년 <<현대문학>> 시 추천완료.

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강사.

<시안>편집국장

*지금까지 낸 책:

학술서 <<한국현대시와 한시의 상관성>>(지식산업사, 2002).

시집 <<아침부터 저녁까지>>(현대문학사, 1987). <<날마다 좋은 날>>(문학아카데미, 1998).

동시집 <<서울아이들>>(창비, 1989). <<재운이>>(창비, 2002). <<동시로 읽는 옛이야기>>(계림북스쿨, 2003). <<구비구비 옛이야기>>(주니어 김영사, 2004). 시 그림책 <<영이의 비닐우산>>(창비, 2005). 일역본 <<영이의 비닐우산>>(이와사끼 쇼땡, 2006). <<도둑 쫓은 방귀>>(지식산업사, 2008)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화상/최금녀  (3) 2009.06.15
반달 외 3편/김여정  (0) 2009.01.03
뒤꿈치 자서전 외 3편/정순옥  (8) 2008.12.31
단시초短詩抄/강우식  (1) 2008.12.31
산경山經 /한광구  (9) 200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