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가사 한 벌을 거두다
주경림
밤새도록 봄비가 내리고 개인 다음날, 관음석상이
지금 막, 눈 비비고 깨어나는 아침 햇살을 불러
길상사 뜨락에서 젖은 옷을 말리고 서 계십니다
젖어서 무거웠던 보관이 가뿐해집니다
왼쪽 어깨를 감싸안았던 농묵의 가사 한 자락이
차츰, 중묵, 담묵으로 볕 바래더니 스스륵 흘러내려
무릎께 이르러서는 파필,
촘촘했던 천의 자락의 주름도 흩어져 버립니다
이제, 햇살 한 가닥이 편단우견의 겉가사를 거두어가고
화강암 고유의 회백색으로 말갛게 드러났습니다
맨발 아래, 미처 마르지 못한 빗물이 질퍽하게 고였습니다
나는 질퍽한 슬픔 한 덩이로 시커멓게 엎드렸습니다
관음석상 뒷편으로 개나리꽃이 화들짝 피어났습니다
개나리꽃, 후불탱화 속에 수많은 부처님이
천수 천안의 노란 꽃송이들을 흔들며
말갛게 비치는 속가사마저 벗어
속 뒤집어 빗물의 흔적을 말끔히 말려보라고 합니다
알몸이 되라고 합니다.
-문학과 창작 2006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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