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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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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고영

산복도로에 한 척의 방이 정박해 있다.

저 방에 올라타기 위해선 먼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백마흔여섯 계단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방

바람이 불 때마다 티브이 안테나처럼 흔들렸다가

세상이 잠잠해지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방은

1m 높이의 파도에도 갑판이 부서질 만큼 작고 연약한 쪽배다.

저 쪽배엔 오래된 코끼리표 전기밥통이 있고

성냥개비로 건조한 모형함선이 있고

좋은 추억만 방영하는 14인치 텔레비전이 있다.

갑판장 김씨를 집어삼킨 것을 20m의 파고라고 했던가,

사모아제도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 그는 어쩌면

산복도로에 뜬 저 쪽배의 항해를 걱정했을지 모른다.

가랑잎 같은 아이를 가랑가랑 쪽배에 싣고

신출내기 선장이 된 그녀,

멀미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쌓일수록 계단 숫자도 늘어

어느덧 산꼭대기까지 밀려온 쪽배 한 척

그녀에게선 사모아제도의 깊은 바다냄새가 난다.

높은 곳으로 올라야 아빠별을 볼 수 있다고

밤마다 전갈자리별에 닻을 내리는 쪽배의 지붕으로

백년 만에 유성비가 쏟아져 내린다.

-고영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 천년의시작.200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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