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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부처님 소나무 외 4편/이영신

부처님 소나무

목포에서도

멀리 더 멀리

나가 앉은 홍도 단옷섬

절벽엔

소금 바람소리에 키가 자라지 않는

소나무 한 그루 살고 있다.

발아래엔 풍란 한 포기 키우질 않는다.

빠돌 하나도 거느리지 않는다.

혼자 살고 있다. 친구도 먼 친척도 하나 없다.

저녁때면 이장을 맡은 낙조가

불그름해진 채로 한 번 휘익 돌아보고 갈 뿐

검푸른 바다 들판에

, 농어네 가족 희희낙락하는 것

물끄러미 바라보고,

시간이 들여다보고 물러나면

솔잎 옷 어쩌다 갈아입고…

한 번도 ‘호젓하다’ 말하지 않는다.

입이 무겁다.

차마고도 , 캐러밴

자칫

헛디디기만 해봐라

수심 600미터의

호수,

어디 어림짐작이라도 해봐라

나의 살

나의 머리카락

나의 뼈

나의 정수리 백회혈

짙푸른 호수 속에는

정결한 제사상이 하나 놓여있네.


묵묘墨墓




쑥부쟁이 칡덩굴 가시여뀌

10월 바람에 한 풀 꺾이니

있는 듯 없는 듯 하던 묵묘墨墓가 드러났다.

둥그스름하게 드러났다.

누구네 집 누구라 불리우던 이름도 없이

성씨 하나도 없이

피붙이는 저 푸른 하늘 저 뒤 어디

언뜻 보여졌다 스러지는 구름 한 조각이거니

그냥 침묵을 담은 말줄임표이거니

기다리다 기다리다 봄 여름 겨울, 겨울 지나

잎 지고 흩날리는 백암산 늦가을 속

볕 좋은 입동 전 날

묵묘 주인장 모처럼 느긋해지는 하루

한 마디 툭 내던진다.


그대 잠깐 쉬어갈 자리로 내주면

앉을텐가?


묵언默言



그이는 이미 저승 쪽으로 한 발 내디디며,


얼굴 닦아드릴 수건을 꺼내 세숫대야에 물을 받자

물소리

유난히 콸콸 쏟아지네.

수건을 적셔 물을 짜내니

물소리 무심하게

또롱또롱 떨어지네.


물아,

수돗물아,

냇물아 강물아,

바닷물아,

종내는 하늘로 흘러갈 물들아.


날 좀 어떻게 해 다오!

라 캄파넬라



칡덩굴과 산딸나무 사이

우둘두툴한 자갈 위에 처음 보는

무늬 천이 있구나.

가죽혁대와 같은 무늬 천이 놓여 있구나.

찬찬히 살펴보니 누룩뱀이 옷을 갈아 입고 갔구나.

누룩뱀이 벗어 놓고 간 겉옷이구나.

엄마가 지어 입힌 그 옷을 벗느라

꽉 끼인 그 옷을 벗어내느라

몸부림을 쳤겠구나. 무척이나 쳤겠구나.

초승 달빛을 전등 삼았을까?

새벽 별빛을 전등 삼았을까?

누가 손 잡아주었을까?

그 누가 손 잡아주었을까?

옷 하나 벗고 새옷 갈아입기도

만만찮다고

한나절 사이 톡톡히 값을 치렀구나.

숨 한번 내쉬는 것도 만만찮다고

값을 치렀구나.


-시집 '부처님 소나무'-


이영신 시인

덕성여대 도서관학과 졸업

1991년 '현대시' 신인상

2009년 '문학과창작' 작품상

시집 '망미리에서' '죽정리 흰 염소' 부처님 소나무'

'시의 나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