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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자전거 안장을 누가 뽑아갔나 외 4편/박순덕

자전거 안장을 누가 뽑아갔나

박순덕


이 동네에서만 벌써 세 번째다

가볍게 몸을 얹고 중심을 잡아 달릴 수 있던 자리

두 다리가 맘 놓고 걸터앉아 폐달을 돌리던 곳

집에서 회사까지 오가는 동안

내 가늘고 보푸라기 진 길을

둥글고 보드랍게 감아주던 길패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출근해 보니 책상 치워져 있던

그 어느 날 같다


나는 하릴없이 주저앉아 폐달을 돌려본다

체인만 돌 뿐 바퀴는 그 큰 눈만 멍하니 뜨고 멈춰서 있다

안장이 뽑힌 자전거의 목에서는 녹슨 피가 엉긴 듯 흐르고 있다

참수형을 당한 듯한

이 안장 없는 자전거를 나는 또다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집에까지 끌고 갈 것인가

새 안장을 씌워 또 한 번 삶의 길을 둥글게 감아 볼 것인가

아예 이번 기회에 그를 버리고

맨발로 혼자 걸어가 볼 것인가


손잡이를 잡아주며 끌어본다

안장을 잃은 자전거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따라온다 대기발령장을 받아들고

집으로 가던 내 어느 날 같다




[배역을 맡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돌공장 뒤꼍을 기웃거리다가 보았다

못에 박히다 만 예수가 쉬고 있는 것을

돌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입에 담배 한 대 물고 있고

석공도 그 앞에서 또한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있다

잠시 타협 속에서 담배 한 대 나눠 피우는 것처럼,

예수가 청했을까 잠시 쉬었다 하자고

석공이 청했을까 잠시 쉬었다 하자고

서로가 내막을 다 알고 시작한 일

서로의 할 일은 분명한데

서두를 까닭이 있는가 아니 미적거릴 까닭이 있는가

석공은 예수를 만들어낼 것이고

예수는 십자가에 피 흘리는 형상으로 매달려야 하는 것

찬물을 끼얹고 전기끌을 대고 살갗을 지지고

앨리앨리 라마 사막다니

정으로 쪼고 망치로 내려치고

앨리앨리 라마 사막다니


진열장 속 마리아상은 어느새 묵상에 들어갔다

뒤꼍에 아이 하나 낳아놓은

아주 예쁜 이름의 루드리까나 마리아,

19살에 내가 받은 세례명이다



[속리산 단풍놀이 동행기]




할매하랍시들, 속리俗離산 단풍놀이 나왔네

쪼골쪼골한 몸에 색고운 등산복을 차려입은

천지사방 단풍든 나무나무 사이에서

동행길에 있는 동료를 자꾸 잃어버리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짧은 거리 사이에서도

서로들 이름을 불러불러 세우네


저 퍼런 바깥세상 이제 막 벗어나니

이 세상은 더욱 환하기도 하여라

나무나무 단풍길 잡기놀이 하듯

앞서며 뒤돌아보며 기다려주며

자꾸 서로를 부르며 확인을 하네


어디로들 숨은 거야, 허 참, 나 먼저 갈라네

나무를 탁탁 치며 으름장같은 너스레를 떨면

아이고 같이 가 여기 있잖아 별일이네 왜 나를 못 봐

헐레벌떡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오는 색고운 낙엽들

호호호 서둘러 따라가네


속리俗離산 하늘 트인 쪽

단풍 더욱 고운 길을 따라

할매하랍시들, 단풍든 하늘로 걸어 들어가네



[독약탕기]




탁혈을 다스린다는 탕약을 달인다

무공해 유기농 약재

똥오줌 발효시킨 거름만으로 키운

당귀오미자숙지황구기자황기백출백복령…

특별 주문하여 뭉근한 불에 종일 달인다

온도 센서가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달여지는 약

입으로 코로 눈으로 보고 먹고 마신 것들

한꺼번에 다 집어넣고

온 몸이 진득하게 신약身藥을 달인다

진물나게 힘들었던 오늘

종일 나를 달여낸 진하게 잘 우려진 약 한 사발

온몸과 마음을 모두어 정성껏 달인

탁혈을 다스린다는 약을 먹고

나는 탁혈 한 사발을 쏟아낸다

색깔 좋고 냄새 좋은 오줌,

약탕보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눌러 짜내어

몰래 변기에 쏟아버린다

나는 성능 좋은 독약毒藥탕기다



[내 살 속에는 언더웨어가 있다]




몸속에 스며든 살팬티를 벗어버릴 길이 없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옷 속의 살을 풀어내자

또 어김없이 두드러기가 우둘투둘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종일 눌리고 조였던 살 속의 라인이 솟아오른다


조이지 않으면 흘러내려 들통 날지도 몰라

헐렁한 속옷은 겉옷에 말려들어

구김살을 만들기 십상이지

벗어보려고 해도 벗겨지지 않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이 폭동의 현장


오늘도 누가 볼까 봐 숨어서

그 살 속의 옷을 손톱가위로 갈기갈기 자른다

팬티를 입은 척 할까 봐

피 흘리는 옷조각들이 바리게이트를 친다

나를 벌거벗겨 놓고야 나에게 보여주는


이 붉은 라인,

내 알몸을 정직하게 일깨워 준다


벗어버리려고 해도 벗겨지지 않는

내 살 속의 언더웨어가 피를 흘린다

-시집 '자전거 안장을 누가 뽑아갔나' 중에서-

박순덕 시인

전라북도 전주생

1995년 '자유문학 '신인상

경인교육대학원 졸업

동국대 문예예술대학원 졸업

시집 '자전거 안장을 누가 뽑아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