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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 외 3편/손옥자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

손옥자

유난히 재능이 많던 내 친구가

파산 신청을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울역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 지하도를 간가

바짝 웅크린, 동그랗게 몸을 만 늙고 어린생들이

저마다 몸에 봉오리 하나씩 달고 누워있다

작년 봄이 흘리고 간 물오른 가지처럼

볼록볼록 봄을 품었다

저들이 철쭉이 만발한,

며칠 지난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지만

저들은 지상으로 나오기 위해

활화산처럼 허리를 세우고

숨 죽여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도로 낮게 들어오는 바람이 신문지를 들썩거리며 검은 활자

들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격자무늬 소리를 내면서따각따각 따가

닥따가닥 모나게 떨어진다 따가닥따가닥 말밥굽 소리 어설프게 들

린다 계단을 오르며 내리며 바쁘게 아침을 몰고 가는 소리 몰고 오

는 소리 차가운 소리들 어지럽게 들린다.

저들은 낮게 더 낮게 최대한 몸을 낮추고

땅과 호흡을 맞추면서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땅이 가진 무궁한 정기를

몸 안 가득 채워 넣고 있다

혼신을 다해 온몸으로

봉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지나가다 스치기만 해도

그 자리서 확, 터져버릴 것 같은 봄, 아니 가공할 무언가를

저들은 품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無言歌를

천지연 폭포

차를 타고 산 중앙을 가로질러 가는데

우리 어머니 수의 한 벌이

산 중턱에 걸려 있구나

평생에 낮잠 한번 편히 못 주무시더니

짙은 녹음을 베고

예서 곤히 잠들어 계시는구나

딸이 사주면 장수한다는 수의가

올 윤달에도 못 사고 그냥 넘겨버린 수의가

이제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축 처진 채 걸려 있구나

색色

네가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날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내 눈을 응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지금처럼 침묵한다고 해서

날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네 몸은 이미

농염한 色으로 불타고 있고

네 몸이

어찌할 수 없는 빛깔을 드러낸다는 것은

네 마음이 이미 나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다

色은 色으로 아는 것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검붉게 익어버린 네 몸을

나도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으니

이제 내 안에 들어와

너의 그 황홀한 향기를 맛보게 하라

네 농염한 色을 내 몸 깊숙이 찔러 넣어

무명, 무취, 무색의 내 생을

찬란히 꽃 피우게 하라

장미여!

매홍리 가는 길

섬진강이 얼음으로 묶여있을 때

매화나무는 동면에 들어갔지

강이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녹색으로 풀려났을 때 나무는

지리산 자락으로 내려와

굽은 길 펴면서 함께 길을 걸었지

기슭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몸이 닿을 듯 닿을 듯 할 때마다

마른 가지에 생기가 돌았어

팝콘처럼 톡토독 꽃잎을 터트렸어

골짜기로 접어들면서 꽃잎은

토독톡톡 토토독톡톡

우리의 사랑처럼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터졌어

매홍리 매화마을로 접어들 때는

절정이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대 잇속 같은 꽃이파리만 천지에 가득했지

정말 화안했어

가지사이로 흘리는 작은 꽃이파리,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대 미소를 읽어낼 수 있었지

* 매홍리 : 전라도 홍쌍리 마을


손옥자 시인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국민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2002년 '고장난 자전거'로 '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구로문화원 시창작 강의, 경기평생교육학습관 문예창작 강의, 교정시설 시창작 강의 등

여섯 곳에 출강하고 있다.

'문학아카데미'간사회 회장,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겸 사무국장,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

협회, 국제펜클럽 회원이다.

시집'배흘림등잔' '1번 출구 혹은 3번 출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