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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아를르의 별이 빛나는 밤 외 3편/최가림

아를르의 별이 빛나는 밤


최가림


의자는

빈센트 반 고흐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듣는 소리가 궁금한 것이다

이 세상엔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게 거기에 놓여 있는 황갈색 침대 하나,

그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그가 밤이면 꾸는 꿈이 궁금한 것이다

떠나고 돌아오고 또 다시 떠나는 열차처럼

침대는 차 있음과 비어 있음의 반복이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는

별이 빛나는 밤 속에 묻어둔다

아를르의 쓸쓸한 풍경을 묻어둔다

이 세상에는 갈 수 없는 곳,

끝내 닿을 수 없는 곳도 있다

그는, 기다려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그것들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있다.





일출



조개들은 화롯불 위에 나란히 눕는다 점점 뜨거워지는 불길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뒤챈다 죽을힘을 다해 여미고 있던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말간 혓바닥을 밖으로 내민다 사랑은 그렇게 견딜 수 없이 뜨거울 때 밖으로 내미는 것이다 내 안에서 붉은 해 하나 울컥 올라온다.



프리지아의 비 외 1편 *문학과창작 2008년여름



최가림



잠깐,

아주 조금,

새순처럼 가늘고 여리게,

그렇게 비가 내 옷깃을 적셨다.


나의 마음도 비를 적셨다.

잠깐,

아주 조금,

가늘고 여리게


아직 피지 못한 프리지아의 꽃대처럼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햇볕을 그리워하던

어느 늦겨울날


프리지아의 비는

잠깐,

아주 조금,

나를 적셨다.


성냥갑 안에 내가 산다



내가 나를 조그만 성냥갑 안에 가둔다

아무도 나를 가두는 사람 없는데,

아무도 붙잡는 사람 없는데, 내가 나를 가둔다


나 혼자 그리워 해놓고 네가 나를 그리워하게 했다고 한다

나 혼자 사랑해 놓고

네가 나에게 자꾸 다가와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눈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내가 나를 조그만 성냥갑 안에 자꾸자꾸 가두고 있다

내가 나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아무도 손바닥 펴보라는 사람 없는데

나 혼자 눈송이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눈은 말없이 조용히 내리기만 하는데


내가 지금 갇힌 것이 눈 때문이라 하고,

추억 때문이라 하고, 그리움 때문이라 하고,

그리고 너 때문이라고 한다.


조그만 성냥갑 안에서

눈사람이 되도록 내가 나를 자꾸 가두고 있다.

백자 다기


최가림


넓은 이마에 반지르르 윤기 도는 목덜미가 볼수록 아름답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물빛 눈동자의 그녀, 깊이가 다른 바다를 들여다보듯 목을 빼고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속에서 찻잎 하나가 외롭게 흔들리며 말갛게 나를 올려다본다.

누군가를 기다린 모양이다. 평생 굴려온 가슴앓이를 옹이진 내 마음에 슬며시 털어놓는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일까 입술을 달삭이다 끝내 말을 흐리고 만다.

오직 하나뿐인 빛깔과 모양을 자랑하며 하얀 모시치마 저고리 단장하고 인연을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내 손을 잡는다.

흙의 숨소리 간직하고 살아낸 세월,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바닷속 헤아리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일이다.




바하의 비


비오는 날에는 아무래도 바하의 메뉴엣이 제일이다 촘촘히 그려진 음표 중에 하나라도 놓치면 나의 연주는 망친다

한평생 연습만 하다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난해하기만 한 생의 음표들, 몸과 마음을 다 던져 연습한 한 곡조차 능숙하지 못한 손놀림, 마음에서는 검은 구름이 스믈스믈 올라온

도도도 레레레 미미미… 더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악보들은 점점 흘러내려 흔적도 없이 흐믈흐믈 사라져 버린다

비는 박자도 맞지 않는 리듬을 창문에 대고 두들겨 댄다 불협화음만 가득한 이 연주, 몇 시간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바하의 메뉴엣은 오늘도 미완성이다

-시집 '아를르의 별밤'-

최가림 시인

숙명여대 음대 성악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전문가과정

2003년 '월간문학21'신인상

2005년 ''문학 21문학상'수상

2007년 '문학과 창작' 봄호에 '바흐의 비'를 발표하며 '최가림'으로 활동 재개

시집 '아를르의 별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