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여행/동유럽(폴란드,체코,헝가리, 오스트리아,슬로바키아)

동유럽 기행 2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2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2011년 1월 9일 일요일 흐림

브루노에서 기상, 흐릿하고 안개 낀 날.

어젯밤에 보았던 비에 젖은 길, 아침이 되자 촉촉이 젖어있나 싶더니, 여전히 또 내리는 비. 오전엔 무조건 이동이란다. 한없이 달리고 달리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주로 여행 전반에 관한 것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리고 나치와 히틀러, 유태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바깥 풍경은 수시로 바뀌었다. 브루노를 출발하여 달릴 때는 체코를 벗어나기까지 프라하에서처럼 대체로 다양한 벽과 건물색을 접할 수 있었다. 예전에 서유럽에서 보았던 통일된 색조의 건물들보다는 그린, 핑크, 아이보리, 벽돌색 등 파스텔색조의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시골 풍경은 넓은 평야가 주로 계속되었다. 전에 프랑스의 시골을 달리던 때와 같이. 체코의 건물은 유럽풍 중에서 대체로 다양한 편이라고 생각되었다. 안개가 끼지 않았다면 더욱 선명하였을 풍경이지만, 안개 속에 신비로운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드문드문 눈이 쌓인 곳도 통과하였지만, 겨울 날씨치고는 포근한 편이라 시작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달렸을까?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파랑과 초록으로 채색한 주유소 건물이 보이고, 우리네 24시 편의점처럼 생긴 휴게소에서는 간단한 음료와 맥주를 팔고 있었다. 일행 중에는 동유럽 맥주가 맛있다고 사서 마시기도 했다. 나도 친구와 한 캔 사서 먹었는데, 양이 많아서 혼났다. 다른 건 과자종류, 포장된 빵, 초컬릿 종류 등…….

버스에 탑승하려고 나와서 잠시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데 낯익은 차들이 눈에 띄였다. 바로 현대차를 수송하는 트럭을 본 것이다. 어찌나 반가운지, 다들 환성을 질렀다. 주변의 작은 도시에 현대차 공장이 있다고 한다. 운전기사는 외국인이었다. 또 주변에 주차된 차 중에서 한국어로 광고가 썬팅 된 승합차가 있었는데 ‘세탁’이라고 써 있었는데, 기사는 역시 외국인이었다. 어디나 알 수 없는 외국어 간판만 보다가 한글과 우리 차를 보니 감격스러웠다. 타향에 가면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스쳐가는 도시

휴게소 풍경

국경지대

한가로운 농촌 마을

11시 40분 쯤, 회색의 황량한 건물 앞에서 버스가 섰다. 바로 체코와 폴란드의 국경이라고 했다. 버스기사 아드리안만 내려서 서류에 서명을 하고,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잠시 내렸다. 국경 통과가 이렇게 손쉽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다른 나라들은 아예 멈추지도 않고 통과되는 경우가 더 많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드디어 폴란드다. Poland, Polska. 공식 이름은 폴란드 공화국(Republic of Poland/Rzeczpospolita Polska). ‘낮은 땅’, ‘평원의 밭’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PL이라는 약자로 표기되는 나라이다.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서니, 건물들이 체코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통일된 색조감……. 국경지대는 달려오던 시골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활기찬 느낌이 들었다. 톨게이트를 통과하자말자 거대한 고가도로가 눈에 띄여 그랬는지 모르지만, 간판들, 건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날은 우중충, 지난 밤 잠을 설쳤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여행의 첫날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축배를 들고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피로감은 없었지만, 날씨 탓인지 잠도 간간히 쏟아졌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다. 폴란드 쪽으로 갈수록 눈이 많이 왔는지 눈 덮힌 평원, 그리고 숲을 한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묵은 부르노 쪽 보다 추운 듯도 했다. 사실 차 안에서는 온도를 느낄 수 없었지만, 눈 덮인 들판과 언덕을 바라보니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유럽은 버스기사들의 근무시간을 철저하게 통제한다고 한다. 차에 장착된 ‘타코메타’를 언제 검문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란다. 우리처럼 카메라 단속만 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운행기록이 남기 때문에 장시간 운전할 경우, 2시간 간격으로 일정시간 동안 꼭 쉬어줘야 한다고 한다.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인데도 우리 나라는 아직 그런 면에서는 요원한 것 같다.

드디어 ‘오시비엥침O'swiecim(아우슈비츠Auschwitz)’에 도착했다. 독일식 발음은 아우슈비츠이지만, 폴란드말로 오시비엥침이므로, 그 나라에 대한 예의로 봐선 오시비엥침이란 말이 맞다고, 현지 가이드가 친철하게 설명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수용소의 개념은 수정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히틀러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때의 상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동유럽은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강세를 보여 8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치와 지리적 배경을 분리해서 설명하기 힘든 것 같단다. 거기서 유태인들은 경제적인 부를 구축하였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태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었다는 것이다. 히틀러 한 사람이 유태인을 학대하였다고는 볼 수 없으며 시대적인 경제공황의 어려움을 돌파구로 쓰였다는 지적이 있다고 한다. 수용역이 보이고, 역 주변엔 여러 개의 선로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교통의 요지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도 이 교통의 요지에 수용소를 건설했다고 한다. 북유럽, 동유럽, 서유럽의 어느 곳으로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올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말이 동유럽이지, 위치상으로는 폴란드 등이 바로 심을 먹었다. 점심 먹고 수용소를 보는 것이 무척 다행이라는 설명과 함께…….

아름다운 집들

유럽 교통의 요지

아우슈비츠역

포로들을 실어날랐던 선로에 지금은 관광객을 싣고 달리는 열차

점심 식사를 한 레스토랑

폴란드에서 투잡으로 가이드를 하고 있는 L가이드의 안내로, 점심식사를 했다. 'Zajazd Skopion'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건물 모양은 전형적인 유럽풍 주택으로 인디언 핑크빛 부드러운 벽에 하얀 색을 군데군데 칠한 깔끔한 벽이었고, 지붕은 벽돌색이었다. 생선, 마카로니, 감자를 주재료로 한 요리라고 했는데, 나온 것은 당근과 자주색양배추, 양배추를 익힌 샐러드는 별로였고, 주요리는 포크커틀릿이었다. 손바닥 만하게 만든 우리 식 돈까스보다는 양이 꽤 많고 부드러운 편이었는데, 고소하고 먹을만 했다. 오랜 시간 이동했기 때문에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중후한 붉은 벽돌로 지은 입구 앞에서 가이드가 입장 수속을 밟는 동안, 전체적인 수용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유서 깊은 붉은 벽돌 건물들의 중후함이 고전적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앞쪽의 수용소 지도 뒤로 보이는 아이보리색 벽에 짙은 갈색 지붕을 한 기념품 가게들이 보이고, 그 뒤로 커다란 나무들이 들어서 있고, 멀리 하얀 지붕을 인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눈으로 덮힌 지붕 때문인지 몰라도, 여느 박물관들처럼 그저 아름답기만 했는데, 뼈아픈 역사의 장소라니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입구에서 수신기를 하나씩 받아들고 1시 30분 정도 관람을 했다.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1수용소이고, 주변에 제2수용소가 있으며, 원래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차 대전이 가속되면서 경제적, 민족적 필요성에 의해 유태인들을 타겟으로 삼았고, 유럽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이 곳이 유태인들의 주된 수용소가 되어, 역사적인 산 증언의 자리가 되었다. 이 수용소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굴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살기 위한 취사를 위한 굴뚝이요, 다른 하나는 화장을 위해 죽이기 위한 굴뚝이다. 가스실도 지붕에서 가스를 분사하는 구멍을 두었으니 이 또한 굴뚝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비가 간간히 내리는 음침한 날씨에

"Abeit Machtere"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라는 쇠로 된 글자가 맞이하는 아치형 수용소의 문이 보인다. 그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유태인들을 거침없이 몰아붙여 수용하였고 급기야 대량학살의 오명을 남긴 곳, 그 혼들이 몸에 느껴지는 듯 했다. 언젠가 대탈출 시도가 있었다던가? 그 때 아치 문의 ‘B'자를 거꾸로 해 놓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둠으로써 말없는 저항의사를 표현했다는 아픈 알파벳, 그 뒤로 우울한 빛의 건물들이 보이고, 아치 바로 뒤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앙상한 나무가 휑뎅그래 서서 더 쓸쓸해 보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잘 몰랐지만, 아치 입구 옆 목조 건물이 우울한 빛이다. 폐쇄적인 냄새가 확 풍긴다고나 할까? 세로무늬 짙은 갈색 목조건물, 그리고 위쪽으로는 망루가 설치되어 용도가 짐작이 되었다. 아치 반대편으로는 길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취사를 위한 굴뚝들이 보였다. 회색으로 보이는 갈색 나무 벽인데, 나무결이 세로로 만들어졌고 지붕도 검은 빛이 도는데 눈이 쌓여 있었다.

수용소 입구

Abeit Machtere

살기위한 굴뚝일까

죽음을 위한 굴뚝일까?

겉보기엔 평범한 건물들

문을 들어서자 넓은 운동장이 펼쳐지고 곳곳에 삐죽이 튀어나온 것들이 보이고, 그 운동장을 기점으로 관리동인 듯한 붉은 벽돌 건물들만 빼고는 철조망들이 사방으로 쳐 있다. 그 너머로 길다란 목조건물이 보이는 곳도 있고, 다른 쪽으로는 또다른 철망이 쳐진 문들 뒤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빼곡하다. 건물 사이사이 멋드러진 나무들과 작은 목조 망루들도 보인다. 예전의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보다는 무척 낡았던 듯 하다. 드디어 사람들을 수용했던 건물로 들어갔다.

불이 켜져 있는 건물들만 관람이 가능하게 되어 있나 보다. 숫자와 블록으로 표시된 건물을 가이드를 따라 들어갔다. 입구에는 희생자들의 사진이 회랑처럼 전시되어 있고, 당시의 상태를 보존한 방들이 보였다. 그저 맨 바닥에 짚을 깐 곳도 있었다. 지금은 시멘트 바닥으로 만들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가축들이나 키우던 외양간과 다름없이 진흙바닥에 짚은 깐 곳이었다고 한다. 또 2층, 3층 나무 침대가 빼곡한 곳은 그나마 나은 듯도 보였지만, 그 곳 역시 짚이 깔린 곳도 있고, 더러 매트리스가 깔린 곳도 있었다. 화장실은 오픈 되어서 사생활이라고는 보장되지 않았다. 방마다 전시된 사진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점심 먹은 것을 토하고 싶을 정도로 사진들의 모습은 상상 보다 더욱 무서웠다.

나치들은 유태인들을 수용하면서 아주 용이주도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이 수용소는 재해석되어야하고 이미 다른 시각에서 보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유태인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경제가 어렵지 않을 때는 몰랐겠지만 경제공황이 심각해지자, 그 돌파구의 일환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다른 사람은 다 어려워도 끈질기게 잘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상대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에 제거해야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유태인들이 경제와 두뇌로 세계를 지배한 원동력이 몇 가지 있다고 한다. 첫째는 교육시스템,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와 같이 ‘탈무드’로 대변되는 그들의 밥상머리 교육의 효과라는 분석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히브리 스쿨에서는 문화교육이 뿌리깊게 이루어지고, 고등교육에서는 토론교육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둘째는 나라가 없이 떠돌았으므로 직업적 제한으로 인하여 음지에서의 고리대금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동하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하다 보니 아이디어 산업과 두뇌형 사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에 세계를 움직이는 브레인이 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셋째는 기부문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은 길거리에 쓰던 물건을 두고 가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사용하고 또 기부하는 것이 상용화되어 현재 세계적으로도 기부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 미국을 움직이는 정치, 경제,법률 등 브레인의 대다수가 유태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의 경제 재건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특히 미국의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여파가 미친 실업자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대전을 일으켰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침공 때 폴란드 포로와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먼저 건립이 되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기 위하여 이 수용소를 이용하였다.


당시 수용자들의 모습

가스 실

목욕하는 줄 알고 아이들 먼저 가스실로

수용자들의 물건들

사진들을 보면 수용된 사람들은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아주 다양한 층이 있었다. 말이 수용소이지 끌려오자 말자 학살된 경우가 많다. 오시비엥침으로 들어가는 열차에는 사람들이 가득 넘쳐 흘렀지만, 나오는 열차는 빈 열차였다고 당시 사람들이 증언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어 함께 살게 한다고 유태인의 별을 부착시켜 이주시켰다. 이사를 하려면 사람들은 귀중품 중의 귀중품을 모두 챙겨 올 것이므로……. 일부러 짐의 양까지 정해줬다고 한다. 열차에서 내리자 말자 경계심을 풀기 위해 노인과 어린아이들 먼저 목욕을 하라고 들여보낸 다음, 귀중품을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벗어놓고, 목욕하듯이 학살을 시켰다고 한다. 그들이 가져온 귀중품은 모두 군수품과 독일인들을 위한 경제 재건에 쓰여졌다고 한다. 철저한 계획에 의해 그들의 금품을 갈취한 것이다.

생체실험대상이 되었던 사람들

희생자들 사진

마굿간 같은 곳이 숙소

머리카락으로 매트리스를 만들었다고 함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아이를 안은 어머니, 그리고 노인들의 표정은 별로 두려움이 없다. 경계심도 가지기 전에 소리없이 하늘나라로 보내 버린 것이다. 목욕탕처럼 만든 가스실, 정말 말도 안된다. 지구상에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니 믿을 수가 없지만, 그 증거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쩌면 행복하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 못 먹어서 뼈가 뒤틀린 사람들, 생체 실험으로, 의약실험으로 기형이 된 사람들, 가족들이 보는 바로 옆의 ‘총살의 벽’에서 사살된 사람들, 탈출하다가 수천볼트의 전기에 감전되어 죽은 사람들, 구타를 당해서 형편없는 팔 다리 사진들, 몽둥이와 총으로 마구 맞는 사람들, 아무 죄의식도 없는 독일병사들의 발 아래 늘어선 시체들……. 끔직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특히 아이들을 거세한 사진 앞에서는 차마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는 사람들과 그 밑에 깔려서 독일군에게 짓밟히고 있는 사람, 귀신처럼 웅크리고 앉아 개밥그릇 같은 나무 그릇에 담긴 죽을 떠 먹고 유령같은 사람들의 사진과 동상들…….

또 다른 전시실에는 죽은 사람들의 변변치 않았던 누더기 옷들, 침구들, 소지품들이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산더미처럼 모아 놓은 곳, 그 머리카락으로 만든 메트리스, 그 메트리스에 누군가 잠을 잤다니! 가스실에 쓰였던 액화가스를 담았던 깡통들, 사람들이 쓰던 빗과 솔종류, 그릇들, 병뚜껑, 생활도구와 목발들에 혼이 달려 내 영혼을 마구 끌어당기는 듯 머리가 아파왔다. 아,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있다니!

바닥에 짚만 깔고

총살의 벽

3층 침상

가스실과 화장장

독일인들은 그래도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은 한다. 그러나 우리민족을 비참하게 만든 일본은 아직도 제대로 사죄는 커녕, 오늘날도 망발을 일삼는 발언으로 우리의 속을 뒤집는다.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장 많이 찾는 사람들은 1위가 역시 폴란드인, 잊지 말아야할 역사라고, 2위가 미국인들인데 다양한 인종들이 많고 유태인도 많지 않을까? 3위는 독일인으로 사죄하는 마음이고 그 밖에 7위까지가 주변 유럽인들인데, 우리 나라는 8위에 해당된다고 한다. 비슷한 역사를 가졌으므로 동병상련의 마음이 아닐지? 그런데 일본은 칼문화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나 역시 그 일환이 되어 수용소를 방문하고 보니, 정말 가슴 아프고,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우리네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역사를 재조명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들 속이 메슥거리는데, 밖에 나가면 무료 화장실이 없을 거라고 화장실을 다녀오란다. 예전의 그 화장실이 아니고 개조를 하였는데도 그 때 어땠을까 생각하니 볼 일이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바로 가스실과 화장장이었다. 수용건물들과는 다른 한 쪽에 가스실이 있었다. 음침한 건물로 들어서니 천정에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 곳으로 가스를 분사시키고는 문을 닫아버리면 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다 이 세상을 떠났을까? 몸서리가 쳐졌다. 그 앞으로 붉은 벽돌로 만든 커다란 굴뚝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이래 저래 죽은 사람들의 뼈와 살이 승천한 곳, 그 시간이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 있음이 죽음보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다시 밖으로 나오니, 들어 설 때의 그 하늘이 아니요, 그 건물들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의 영혼들이 온통 떠돌며 절대로 잊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듯 했다. 하얀 눈 쌓이 지붕, 그리고 땅이 하얗게 보이지 않고, 피로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