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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남해안 서부

보길도를 찾아서9/망끝전망대, 예송리에서

조용히 앉아서 땀을 씻으며 더 머무르고 싶은 세연정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았다.

땅끝이 아니고, 바로 망끝 전망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도 대마도도 보인다는 그 곳을 찾아가는 길은 정말 드라이브 코스로는 제격이었다.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 그리고 작은 섬에 이런 산이 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산과 빼곡한 나무들, 작은 마을들과 작은 해수욕장들을 지나치며 드디어 커다란 바위에

"망끝전망대"

라고 쓰인 언덕에 다다랐다. 저 멀리 보이는 섬들, 푸른 바다, 하얀 파도, 그리고 아스라한 안개.....덕분에 멀리 볼 수는 없었지만, 외딴 섬에서 그리던 다른 땅을 바라볼 수 있었던 그 곳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지 짐작이 갔다. 하나의 돌파구였을 것이다.




외로운 섬 처녀가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을 테고, 열정만 넘치던 청년이 부모님을 등지고 육지로 떠날 수 없어 한숨만 지으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을 지도 모를 그런 곳, 유배된 사람들이 걸어걸어 그리운 사람들 대신에 바라보던 그런 먼 땅과 조우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으리라.

안개가 부옇게 끼어 있어서 더 먼곳까지 볼 수 없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 눈 속에는

먼 바다, 먼 땅들이 보이는 듯 했다. 심안이라고 했던가?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현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시공을 초월한 그런 삶의 숨결이 배여있기에, 특히 선조들의 체취가 서린 유적들을 쳐다보노라면, 폭넓은 시야를 갖게 되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망대에서 길은 거의 끝나 있었고, 산자락을 돌아들면 공사현장이 보인다. 보길도 일주도로를 닦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조금 더 가서 아직 숨겨진 해안의 비경을 더 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파헤쳐진 땅을 더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냥 기념 촬영을 하고 다음 행선지로 옮기기로 했다. 바위 앞에서는 섬 아주머니들이 잘 말린 멸치와 미역을 팔고 있었다. 일행 중 일부는 잘 말린 파르스름한 멸치를 사기도 했고, 보길도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전망대에 심어 놓고 왔다.

다음은 예송리 해수욕장이다.

망끝전망대에서는 오던 길을 다시 돌아 선착장 부근에서 다시 예송리로 갈 수 있었다. 아직 섬의 일주도로가 완성되지 않아 전망대에서는 그 쪽으로 바로 넘어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예송리!

이름에서 풍기는 것도 바로 소나무의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담한 해수욕장은 소나무숲과 갖가지나무들로둘러싸여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상록수림으로 유명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해변은 바로 까맣고 작은 돌들, 일면 빠돌이라는 돌들로 이루어져 물이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언젠가 남해 여행을 하면서 빠돌에 관한 시를 한 편 얻은 적이 있다. 지금 이 컴퓨터에는 그 자료가 없어서 올릴 수는 없지만, 까맣고 납작납작한 돌들이 반짝반짝 윤이 나, 물이 더욱 맑게 보이기도 한다. 이 돌들을 스쳐갔을 숱한 파도, 그리고 숱한 사람들의 발자취, 세월의 무게까지 더하여, 우리의 유한한 생이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도 되었다.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예사로이 볼 수 없는 여행의 참맛, 그래서 틈만 나면 떠나고 싶은 것이다.

해수욕장 너머로 보이는 여러 바위섬들은 한 폭의 그림같았고, 그 사이를 오가는 바나나보트, 모터보트들이 물살을 가르며 피서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작은 배 한 척이 해변에 정박해 있어, 우리 일행은 거기에 걸터앉아 저물어 가는 예송리 해변에서 더위를 식혔다. 날은 너무나 더워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없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 그나마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아이들은 물 속에서 한가롭게 놀고, 나무 숲이 만들어준 그늘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누운 사람들의 한가로운 풍경에 우리까지 마음이 넉넉해졌다. 해변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작은 고깃배 한 척에 일렬로 줄을 지어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좋은 사진 한 장을 또 얻었다. 초상권이 있으므로 여기에 올릴 수는 없지만, 그 눈빛이 우리들의 삶은 잠시잠시 쉬어가게 하는 작은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쯤 더 머물고 싶었지만 우리는 뱃시간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

선착장에 와서 표를 사고 나니 시간 여유가 좀 있어서 수산물직판매장 같은 곳에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미역과 김, 멸치 등 싱싱한 것을 골라서 차에 싣고 우리는 들어올 때보다는 훨씬 큰 배에 올랐다. 중간에 다른 섬을 들러서 오는 배였는데, 달리면서 보던 섬을 가까이에서 보니 더 아름다웠고, 안개 속에 희미한 작은 섬이 아주 기억에 남는다. 하얀 물결은 배를계속 따라 오고, 하루종일 돌아다닌 우리는 교대로 잠을 한 숨씩 자기도 했다.

해 질 무렵이 되어 가는 바다는 또다른 모습이다.

바다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니 수십, 수백의 얼굴을 가졌음을 익히 알았지만, 남해 끝자락 푸른 바다를 보니 새로운 기쁨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석양빛을 받아 황홀하게 물든 바다, 점점이 박힌 작은부표들의 흔적이 유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날개를 단 듯도 했다.



드디어 출발했던 땅끝마을이 보인다. 땅끝에서 해가 꼴깍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