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시

비의 집/박제천

<비의 집>
아마, 거기가 눈잣나무 숲이었지
비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
아니,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
그래,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것 같았어
아마,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도 그랬지
힘을, 주어서도 안되고...
그저 가벼이 껴안는 것처럼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
그리,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아마, 눈잣나무도 어디 아픈 거야
문득, 지금은 없는 병든 아내가
혼자, 눈잣나무 되어 비를 맞는 것으로 보였어
그만, 나도 비에 젖으며 그렇게
그냥, 가벼이 떨리는 듯한 눈잣나무에 기대어 있었어

-박제천 시집 <도깨비가 그리운 날> 중에서-

아침부터 천둥이 치면서 비가 내린다.
그 전에 눈 뜨자 말자 책장을 보며 박제천 선생님 시집들에 시선이 꽂혔다. 2012년에 펴내신 시집 <도깨비가 그리운 날>을 펼쳐 들었다.
'지식을 만드는지식'사에서 펴낸 시인들의 육필 시집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선생님의 필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당시 내쳐 읽었지만, 처음 읽은 듯 가슴이 아려왔다.
작은 스탠드 불빛으로 책을 보다가 거실로 나가서 내쳐 읽었다.
비가 내릴락말락 하니 마음도 싱숭생숭해졌는데, 천둥이 치더니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의 집'이 특히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이 사모님을 먼저 보내시고 <아>라는 시집에서 절절이 그리워하는 시들 중에 실렸던 시로 그 시집을 읽고 내내 눈물지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눈잣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찾아보았던 기억도...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리'고, '눈잣나무는 비에게 내려도 좋다고' 말하고, 비는 눈잣나무를 부드럽게 씻겨주고...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자늑자늑'이라는 말이 한 없이 포근하고 평화롭다.
병든 아내를 씻기던 그 손길이 비가 되어 눈잣나무를 씻겨주는,
눈잣나무와 비와 아내, 그리고 시인이 물아일체가 되어 그리움을 증폭시켜 준다.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신 선생님이 정말 그립다.
이젠 두 분이 만나서 오손도손 이야기하고 계실까?

생과 사가 별 게 아니지만, 이별은 정말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