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날, 운주사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박제천
입춘날, 운주사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박제천 코가 깨진 미륵보살,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문둥이보살, 얼굴마저 지워진 크고 작은 돌부처, 나 몰라라 잠을 자는 기왓장 보살이 모두 모이는 곳 부뚜막귀신, 대들보귀신, 보리뿌리귀신, 동서남북 오방신, 여기서는 모두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곳 햇빛 좋은 입춘날, 눈이 부신 햇빛 거울로, 제 마음속, 무덤속 어둠을 불살라, 보살도 부처도 잿더미가 되고 마는 날. 돌쩌귀를 열고 나오는, 얼음장을 깨고 나오는, 겨우내 내린 눈을 가슴으로 껴안아 녹인 물로 가득가득 속을 채운 냉이며 달래, 움파며 승검초, 죽순이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네. [시작노트] 이제 입춘이다. 입춘 전야가 해넘이이기에 이날밤 콩알을 뿌려 잡귀들을 좇아낸다고 한다. 입춘부터를 새해로 잡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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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파블로 네루다
시 (詩)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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