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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고영 <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고영산복도로에 한 척의 방이 정박해 있다.저 방에 올라타기 위해선 먼저 계단을 올라야 한다.백마흔여섯 계단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방바람이 불 때마다 티브이 안테나처럼 흔들렸다가세상이 잠잠해지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방은1m 높이의 파도에도 갑판이 부서질 만큼 작고 연약한 쪽배다.저 쪽배엔 오래된 코끼리표 전기밥통이 있고성냥개비로 건조한 모형함선이 있고좋은 추억만 방영하는 14인치 텔레비전이 있다.갑판장 김씨를 집어삼킨 것을 20m의 파고라고 했던가,사모아제도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 그는 어쩌면산복도로에 뜬 저 쪽배의 항해를 걱정했을지 모른다.가랑잎 같은 아이를 가랑가랑 쪽배에 싣고신출내기 선장이 된 그녀,멀미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리움이었다.. 더보기
달/고영 달 고 영식은 밥 한 덩이하늘 가운데 불쑥 떠올랐다.식은 밥이라도 한 숟가락 퍼먹으면유년의 주린 배가 불러올까헛배라도 부를까군침을 흘린 적이 있다.꽁보리 섞인 고봉밥그릇 속미끌미끌한 밥알들마사토처럼 거친 볍씨들어머니, 밥그릇을 품고 뭐하세요? 식은 밥그릇 속에서과수댁 어머니가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아들아,굶주림을 버릴 수만 있다면밤하늘에 밥그릇이라도 띄워놓고치성으로 받들고 싶구나.달 속에서 벼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중에서----- 더보기
둘이 혼자가 되어/릴케 둘이 혼자가 되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Reiner Maria Rilke)언젠가 우리는 둘이 혼자가 되어 숲가에 서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불꽃처럼 환한 모습, 모든 것이 하나임을 느낍니다. 서로 꼭 껴안고 있으면 우리는 귀기울이는 땅에 서서, 몸을 겹친 나뭇가지들처럼 부드러운 옷 사이로 자라날 것입니다. 눈을 뜨는 숨결이 협죽도의 송이들을 흔들어 줄 때면, 보세요,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서로 다정하게 얼러주니까요. 나의 영혼은 느낍니다, 우리가 문고리를 더듬고 있음을. 나의 영혼은 쉬면서 그대에게 묻습니다, 그대가 나를 이리로 데려왔나요? 그러면 그대는 그리도 멋지고 그리도 밝게 미소로 답합니다. 우리는 더 걸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문들은 저절로 열리겠지요....... 이제 .. 더보기
입춘날, 운주사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박제천 입춘날, 운주사 빈 터에 배를 띄우고 싶다 박제천 코가 깨진 미륵보살,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문둥이보살, 얼굴마저 지워진 크고 작은 돌부처, 나 몰라라 잠을 자는 기왓장 보살이 모두 모이는 곳 부뚜막귀신, 대들보귀신, 보리뿌리귀신, 동서남북 오방신, 여기서는 모두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곳 햇빛 좋은 입춘날, 눈이 부신 햇빛 거울로, 제 마음속, 무덤속 어둠을 불살라, 보살도 부처도 잿더미가 되고 마는 날. 돌쩌귀를 열고 나오는, 얼음장을 깨고 나오는, 겨우내 내린 눈을 가슴으로 껴안아 녹인 물로 가득가득 속을 채운 냉이며 달래, 움파며 승검초, 죽순이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네. [시작노트] 이제 입춘이다. 입춘 전야가 해넘이이기에 이날밤 콩알을 뿌려 잡귀들을 좇아낸다고 한다. 입춘부터를 새해로 잡는 해.. 더보기
동백이 활짝 동백이 활짝 송찬호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꽃을 활짝 피웠다허공으로의 네 발허공에서의 붉은 갈기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더보기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허만하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허만하길이 끝나는 데서산이 시작된다고 그 등산가는 말했다길이 끝나는 데서사막이 시작한다고 랭보는 말했다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구겨진 지도처럼로슈지방의 푸른 언덕에 대한향수를 주머니에 꽂은 채목발을 짚고 하라르의 모래바다 위를걷다가, 걷다가 쓰러지는 시인모래는 상처처럼 쓰리다시인은 걷기 위하여 걷는다낙타를 타고 다시 길을 떠난다마르세이유의 바다는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따라온다눈부신 사구, 목마름, 목마름영혼도 건조하다원주민은 쓰레기처럼 상아를 버린다상아가 되어서라도 살고 싶다바람은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낙타는 십리 밖에서도물냄새를 맡는다맑은 영혼은 기어서라도 길 끝에 이르고그 길 끝에서 다시 스스로의 길을 만든다지도의 한 부분으로 사라진다시인 허만하1952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의과.. 더보기
물결의 화석/허만하 물결의 화석 허만하1.금속성 번득임을 머금고 처음으로 형태를 가지는 순간물은 기절했다. 목숨은 처음으로 목마름을 깨닫는 순간처럼 아름답게 기절했다.2.벌겋게 달아오른 용암은 어쩌다 강을 역류하지만 투명한시간의 물살은 분명히 낮은 곳으로 흐른다. 육중한 공룡 발자국이 다음 발을 떼는 틈새를 비집고 산벚나무 꽃잎처럼낭자하게 떨어진 새 발자국. 태어남과 같은 숫자의 소멸이지구에 있다.3.물은 소멸에 굴하지 않는다. 물은 목숨의 필연을 사랑한다. 물살을 차고 뛰어오르는 연어의 낙차를. 인류가 없는지구의 시간 속에서 일제히 눈부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꽃들의 탄생을 보라. 목숨의 혈통은 끊임없이 흐르는 투명한 물이다.4. 물을 실은 강물이 원시의 들판을 흐르고 공룡이 마지막울음소리가 저무는 지평으로 멀어져가는 때 .. 더보기
폭포는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허만하 폭포는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허만하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연어만이 아니다. 낙하지점에 이른 나이아가라 강물은 한순간의 연푸른 망설임 끝에부들부들 떨며 허공에 몸을 던진다. 폭포는 원래 11 ㎞ 하류에 있었다. 몸으로 빙하기 암반을 깎으며 흐름을 거슬러현재의 위치에 이른 1만 년의 물보라.설악산 자락 남대천 늦가을을 찾아 북태평양 2만 ㎞ 검푸른 물 너울을 헤치는 연어의 집념처럼 폭포는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치밀한 보폭으로 물길 방향을 거슬러 오른다.죽으러 가는 생물은 태어난 자리를 찾는다.언젠가는 노을을 반사하는 암벽을 노출하고 사라질 폭포는 천의 천둥소리와 함께 중천에서 부서지고 있다. 1년에1.2cm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시시각각 상류를 향하여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는 장대한 물의 낙차. 나이.. 더보기
흙의 꿈/허만하 흙의 꿈 허만하서걱이는 풀숲 속에 보이지 않는 짐승의 길이 있듯 하늘에는 더 높은 하늘을 젓는 새의 길이 있다. 부분은 전체보다 클 수 있다. 밭두렁 돌무더기 속에서 신혼의 손이 찾아내었던 암막새 조각이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화려한날개 펼치고 있는 가릉빈가. 갈고리 발가락이 잡을 나뭇가지는 천년의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솔바람 소리 내며 타오르던 장작불 불길이 구워낸 황홀한 흙의 상상력. 무쇠보다 강한 흙 조각에서 가을바람 소리가 나는 것은 이름없는 신라 와공 새김칼날 끝에 비치던 은백색 억새 물결 때문이다. 황룡사 절터 밭두렁 길에서 바라본 코발트블루 하늘의 맑은 높이. 풍경이란 말이 동사가 되는 추령재 칠십굽이에서 다시 만나네.흙도 꿈을 가지면 맑은 노래 꽃잎처럼 뿌리는 새가 되네. 더보기
연꽃을 보며/박제천 연꽃을 보며 박제천머리가 띵하도록 더운 날엔얼음 채운 소주로 불을 달구고가쁜 숨 몰아쉬며너에게 찾아가리가슴에 들끓는 욕정부르르 떨리는 핏줄이손목이며 목줄기에 퍼렇게 드러나도록추스리며 너에게 달려가리달려가 거추장스러운 옷가지 벗어제치고 불덩이가 된 이 내 몸을 너에게 던져주리손톱 끝에 발톱 끝에수 만개의 머리카락 끝에전기가 일도록네 속에 이 내몸을 잠기우리모든 불을 재우고너와 함께 쉬다가 깔깔거리며 달겨드는 내 영혼을살껍질로 다시 싸 안으리물이여. 더보기
詩/파블로 네루다 시 (詩)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