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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배흘림 등잔 / 손옥자 배흘림 등잔 손옥자한때는 빛이었을 배흘림 모양의 등잔 오늘은 알뜰시장 한 귀퉁이에 헐값으로 몸을 내어 놓았다그 옛날 다 태우지 못한 불이 아직 몸속에 끓고 있는데 지나가는 누구라도 좋다몸의 유연한 선과 그윽한 백자빛에 혹한 자아니면 남은 정열을 읽어내는 사람이라면값이 문제랴등잔은 목을 길게 뽑고 사람을 부른다따가운 시선이 몸을 핥고 지나간다 손거울 머리핀 짝없는 찻잔까지 다 팔리고 덜렁 혼자남았다 -심지는 필요없어 불 켤 일 없으니까- 누가 목줄기를 잡아 뜯는다어둠속에 버려진 자존심이 불을 켜고 잃어선다 파란 불곷이 바늘끝처럼 날카롭다등잔은 원추모양의 뚜껑을 어둠속으로 쑤욱 밀어올린다모가지 꼿꼿하게 세우고 시집 2004년 문학아카데미 이미지 출처http://phrd.empas.com/r/im_pa/u=p.. 더보기
영산홍/서정주 영산홍 서정주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산자락에 낮잠 든슬픈 소실(少室)댁소실댁 툇마루에놓인 놋요강山너머 바다는보름 살이 때소금 발이 쓰려서우는 갈매기 ************간결한 새행 속에 선명한 이미지를 부각하여 주제를 표출하는 시다.봄에 피어나는 그 영산홍의 붉은 빛을 해마다 보아오지만, 영산홍의 그 이름에서오는 산이 비친다는 것을 살려 이렇게 잘 표현한 시도 드물 것이다.봄이 가고 있어도영산홍은 아직 한창 푸르지만, 그 꽃잎들도 금방 우수수 떨어지겠지.땅에 꽃물을 들이면서........봄이 오면 영산홍은 곧 피고, 또 지겠지... 더보기
낙화/이형기 낙화 이형기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루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은 얼마 전에 작고하신 분으로, 바로 이 시 때문에 낙화시인으로 유명하다.경남 진주 출생으로 현대시의 기법을 일찌감치 구사하신,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분이시다.많은 원로시인이 계시지만, 이형기 시인만큼 현대시의 특성을.. 더보기
박제천/ 혼잣말놀이 혼잣말놀이 박제천돌이 좋아졌어요 눈길만 주면 재잘재잘 소리가 새어나오는 돌의 입이 좋아졌어요 온마음을 다해 내 소리를 듣고자 저 솟아나오는 돌의 귀를 보세요 온몸에 그림을 그리는 돌의 손을 보셨나요 바람의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는 눈송이 눈송이 물감으로 채색을 하는 돌의 손, 손을 따라 빛나는 돌의 눈을 보셨는지요 돌을 쥐고 있으면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려와요 내 손의 손금마다 흘러가는 돌의 피, 돌의 숨소리 어쩌다 내 손에 와 돌이 된 별 하나, 마냥 좋아하는 게 죄 같아서 밤마다, 다시 돌아가라고 있는 힘껏 하늘로 던지면 밤마다, 다시 별똥별로 불타서 내게 돌아오는 돌이 있답니다 더보기
마량항 분홍풍선/김영남 마량항 분홍 풍선 김영남 골목이 시작되고, 골목 옆구리 파도 출렁대는 곳에 환한 창이 있다. 그 창에선 초저녁부터 김칫국 냄새가 번지고 가끔 웃음소리도 들리곤 한다. 그런데 빠져나온 웃음소리 하나가 창을 부풀게 한다. 자꾸만 부푸는 게 마치 커다란 분홍 풍선이다. 쪼그리고 앉아 그 풍선 잡고 있으니 내가 질질 끌려간다. 에구머니나, 분홍 풍선이란 잠자던 것들까지 깨워 띄우는 신기한 기구, 허름한 유리창에선 더욱 높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 찬 바람 불면 더욱 슬프게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난 그 풍선을 잡고 먼 나라로 가고 싶다. 항구란 배만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 풍선을 잡고 더 따뜻하고 아늑한 나라로 출발하는 것임을,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면 예서부터 흔들리는 귀환이 시작되는 곳임을 배운다, 마량항 부둣가.. 더보기
일몰이 달다/노명순 일몰이 달다 노명순쳐다만 보아도 감물 들어 버리는홍시어머니가 기도의 그리움으로걸어놓은 까치밥저무는 하늘에온 몸과 마음 뜨겁게 불살라떠놓은불은 물 한 사발의 정화수까치떼가 몰려와 빨간 홍시를 덮친다달 디 달 다노명순 시집, ,, 문학아카데미 시선 203, 2008 더보기
가을/벌레/송태옥 가을 송태옥폐활량이 정상인의 50%도 못되어 산을 오르지 못하는호흡기장애인인 나는산을 오르지 못하니까기도원 산을 천천히 마냥 기어서 걸으며마음껏 단풍을 감상하지요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장애이기 때문에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지요기어서 기어서 마음껏 단풍을 음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지요벌레 벌레 한 마리가 오늘 내 손바닥 위에 앉았다이벌레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하고 생각하다가문득 생각했다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도 이와 같으시지않을까?나는 하나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거라고아니 벌레만도 못한 거라고내 한 목숨, 내 인생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고하나님의 뜻에 따른 거라고-송태옥 시인 첫신앙시집 ,예영시선,2008 더보기
마음의 마디/정재록 마음의 마디정재록 엑스레이에 찍혀 나온 내 손가락들이대나무를 닮아 있다내 손은 크고 작은 다섯 주의 대나무가 서있다엄지는 마디가 두개, 다른 손가락들은 세 개씩이다손가락들은 더 이상 마디가 늘지 않는 대신그 마디를 꺾어 뭐든 움켜쥘 수 있다대나무처럼 마디가 늘어나면더 많은 걸 움켜쥘 수 있겠지만내가 손에 쥘 수 있는 분량의 눈금은 이미 정해져 있다그 대신 내 마음이 마디 수를 늘려간다손과 마음의 눈금이 점점 차이가 벌어지면서그 사이를 허공이 끼어든다대나무는 제 마디마디 허공을 들여앉혀 저를 세우지만내 마음은 그 허공을 움켜쥐느라 마디마디 꺾인다엑스레이에 찍혀 나온 손가락뼈마디들은뭐든 움켜쥐고 싶은 내 마음의 골수로 차 있다쥐락펴락 꺾어 온 손가락 마디에서내 마음의 마디를 본다잠시나마 마음의 눈금을 끌어내.. 더보기
내 마음의 연약지반구역 /문세정 내 마음의 연약지반구역 문세정 서해포구 월곶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처럼 내 마음에도 무르고 약한 땅이 있습니다 심장을 중심으로 반경 5cm지점은 언제나 진흙입자들로 덮여있어 무게를 버티는 힘이 매우 약하답니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슬픔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엔 강도 3.0이상의 지진이 일어 정신을 잃을 만큼 전신이 흔들리기도 하고요, 한번 내려앉은 지반을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답니다 네, 그럼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죠 자칫하면 당신이나 나나 대책 없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 나를 통과하려거든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마음속도계를 조절해가며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물이 흐르는 대로 순순히 몸을 내맡기는 나뭇잎처럼 당신과 나의 숨결이 맞닿아야 해요 그 순간만큼은 지나간다.. 더보기
예수를 리메이크하다/문세정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문세정그는 늘 트로트 찬송가를 부르며 나타난다목에 걸린 소형 녹음기 반주에 맞춰노래를 부르며 지하철 호선 구간을 뱅뱅 돈다칸칸마다 음표처럼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하루 종일 연속 재생되는 그의 노래언젠가,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변하고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약해지고부터그의 찬송가는 트로트 버전이 되었다를 4분의 4박자로 꺾었고흥겨운 대목에선 바이브레이션을 넣기도 했다한 소절 한 소절 깜깜한 세상을 귀로 읽으며새 음표를 붙이고 장조를 바꾸다 보면아주 가끔씩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는동전소리도 그의 귀엔 취타악기음으로 들렸다퇴근길 풀죽은 몸들을 싣고지루한 음보로 달리고 있는 객차 안아주 느린 몸동작으로 악보를 넘기듯다음 칸을 향해 그가 나를 지나쳐가고중간 중간 박자를 놓친지하철이 황급히 허리를 .. 더보기
비의 집/박제천 비의 집 박제천아마 , 거기가 눈잣나무 숲이었지비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아니,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그래,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것 같았어아마 ,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도 그랬었지힘을, 주어서도 안되고...그저 , 가벼히 껴안는 것처럼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그리 ,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아마 , 눈잣나무도 어디 아픈 거야문득 , 지금은 곁에 없는 병든 아내가혼자 , 눈잣나무 되어 비를 맞는 것으로 보였어그만 , 나도 비에 젖으며 그렇게그냥 , 가벼히 떨리는 듯한 눈잣나무에 기대어 있었어 -박제천 시인 신작 시집 '아 ,' 에서 더보기
눈의 집/박제천 눈의 집 박제천 눈오는 날 눈사람 만나보고 싶었네 눈보라 속 그 얼굴 그려 보았네 내리는 눈발로 그 이름 써 보았네 눈송이 눈송이를 모아 눈의 집을 만들어보았네 눈사람 만나러 눈밭으로 나갔네 눈보라 속에서 눈밭 속에서 눈무덤 속에서 손길도 닿기 전에 서로서로 부둥켜 안은 채 숨죽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눈송이들 그 눈송이들 속에서 눈사람의 눈을 보았네 눈사람의 귀도 보았네 눈사람의 입술도 보았네 눈보라에 그린 그 얼굴, 눈발로 쓴 그 이름이 눈송이 눈송이되어 눈보라치고 눈밭 되고 눈무덤 되어 기다리는 눈의 집을 보았네 더보기
종이의 집/박제천 종이의 집 박제천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내는 종이에 글씨를 쓰지요 나 역시 40년이나 종이와 함께 살았어요 종이 한 장 펴놓으면, 세상이 다 내세상 같아 뿌듯했지요 이세상의 기쁨은 물론 저세상의 죽음이며 고통도 만났지요 내게 있어, 종이는 내 살이었어요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나는 그 종이의 집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종이마다 내 삶을 써놓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못이 되어 내 삶을 벽에 박아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며 바다를 종이 삼아 새와 물고기, 파도와 비바람으로 글씨를 써보았지만 그것들 역시 덫이 되고 닻이 되었지요 이제 나는 눈으로 종이의 집을 만듭니다 내리는 눈송이, 눈송이마다 눈이 있고, 가슴이 있고, 물과 불로 반짝이는 눈송이 종이를 만들지요 눈송이 종이에 하염없이 써나가.. 더보기
월하독작(月下獨酌) 이백(李白)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고독을 노래했다. 꽃이 만발한 숲속에 한동이 술이로다 그러나 친구가 없어 홀로 마실 수밖에 잔을 들어 돋아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대하니 세 사람이 되었구나 달은 본디 술을 못하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라 움직일 뿐이로구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개不解飮 影從隨我身 더보기
수자직(繡子織)으로 짜기/이 솔 수자직(繡子織)으로 짜기 이 솔햇빛이 발등에서 쪽마루로조각조각 빛을 내며찰랑찰랑 소리를 낸다물결무늬만큼 맑은 소리를 낸다햇빛에 발바닥이 미끄러지고햇빛의 발목까지 몰에 잠긴다하얀 종아리가 눈이 부시다실핏줄이 파랗게 내 비치는햇빛의 하얀 종아리가 눈이 부시다손을 대면 손자국이 그대로 찍힐 듯한하얀 종아리물에 잠기면 물빛으로햇빛에 잠기면 햇빛으로 투명하다맨발로 햇빛과 물살을 건너딛는다물빛과 햇빛이 쪽마루에서비단을 짠다실핏줄이 파랗게 드러나 보이는 더보기
눈물렌즈/이영식 눈물렌즈 이영식어머니, 눈물 너머 바라본 도시의 숲과 새들이 슬퍼요밤 도토리 몽땅 털린 다람쥐 청설모가 슬프고아파트 공사장 쇠붙이로 둥지를 엮는 철새가 슬퍼요눈물 닦인 세상은 슬픔 밖인 줄 알았는데구겨진 신문지로 견디는 노숙의 잠이 슬프고나어린 가장들 라면 끓이는 소리 설거지 소리가 슬퍼요어둠 속 떼 지어 일어서는 붉은 십자가 숲에서도눈물로 녹여야 닿을 수 있는 희망온도가 있나봐요언제부터 실금이 갔는지 슬픔이 자꾸 새요, 어머니 -시집, '희망온도, 천년의시작, 2006' 중에서- 더보기